1945년 9월 연합군의 행렬이 거대한 사람들의 환호를 받고 있다. 한 영국군이 트럭 아래로 내려 오려는 모습이 눈에 띈다.
1945년 9월 9일 총독부 건물 마당에 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게양되고 있다
1945년 9월 21일 재한일본군이 미 제7보병사단에 양여하기 위해 손수레에 장비를 싣고 가고 있다. 일본군은 한국 남부 지방으로 이동하였고 이곳에서 미군에 의해 무장해제 됐다.
1945년 5월 28일 만주에서 인천으로 돌아온 한 소녀가 인천에 세워진 캠프에 들어가기 전에 이(louse)를 없애고 있다. 이들은 거주시설이 마련될 때까지 캠프에 머물렀다.
1948년 5월 인천항의 난민캠프에서 한 요리사가 큰 솥에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난민 수백 명이 매일 톈진에서 돌아왔고 이들은 거주시설이 마련될 때까지 캠프에서 생활했다.
1948년 2월 28일 덕수궁 건너편 건물에서 찍은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던 석조전 건물로, UN임시위원단의 회의장소로도 사용됐다.
1947년 5월 총독부 뒤편의 경복궁에서 전국중등학교음악대회가 열렸다. 참가자들은 멀게는 부산과 남부 지역에서도 올라왔다. 하이라이트 중 하나는 베토벤과 브람스 등을 연주한 교향악단이었다.
한 젊은 남자가 아이들이 보는 가운데 운동장에서 그네를 타고 있다. 작고 시설도 열악한 운동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의 모습이 애잔하다.
1936년 5월 위생소가 만들어진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청소차가 거리를 청소하고 있다.
1948년 5월 제27헌병분견대가 안전운전을 위한 캠페인을 하고 있다. 사진은 T. P. 로렌스 상병이 운전하는 207헌병대 소속의 지프차로 사고 방지 캠페인용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1945년 10월 젊은 여성들이 전화 교환소의 교환기 앞에 앉아 일하고 있다.
1945년 10월 젊은 여성들이 전화 교환소의 교환기 앞에 앉아 일하고 있다.
1947년 주부 두 사람이 집 근처 개울에서 가족들의 빨래를 하고 있다. 사진을 찍은 미국병사는 ‘비누가 부족하고 한국 전통의 흰 옷을 빨기 힘든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두 사람은 평생 해온 일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쪼그려 앉아 나무방망이로 빨래를 두드리고 있다.
1947년 한 마을 잔치에서 사람들이 춤을 추고 전통 민요를 부르고 있다. 잔치는 해방 이후 매년 개최됐다고 기록된다.
1948년 6월 서울 의주로의 한 담배 공장에서 여성들이 담배갑을 접고 있다. 해방 이후 미군정청 전매국에서는 ‘승리’라는 담배를 만들었다. 당시 담배 1갑의 가격은 3원이었다.
1945년 11월 부산의 한 시장에서 국수를 팔고 있다.
1945년 11월 전주 한 시장의 풍경.
1948년 5월 31일 첫 국회 개회에 앞서 이승만 전 대통령이 개회사를 하고 있다. 앞에 앉은 6명의 외국인은 경제고문 번스(왼쪽부터 두번째), 정치고문 제이콥스(세번째), 주한미군사령부 사령관 하지 중장(네번째), 군정장관 딘 소장(다섯번째), 군정장관대리 헬믹 소장(여섯번째), 교황사절 몬시뇨르 패트릭 번스 주교(일곱번째)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식을 보기 위해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수립식에서는 이승만 전 대통령과 연합군 최고사령관인 맥아더 장군 등의 연설도 이어졌다.
1948년 8월 중앙청 앞에 모여든 군중들이 대한민국의 탄생 순간을 지켜보고 있다.
국수파는 아저씨 국수 먹고 싶어진다 +_+
진짜 맛있어 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