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수기증 두번째 리뷰

바켄뢰더 작성일 16.10.19 04: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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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수기증 두번째


골수기증을 한 후 나는 학교에서 골칫덩이가 됐다.선생들과 불화도 심했고 사실 불화라기 보다 일방적이었다.당시에는 학생이 선생한테 대든다는게 상식밖의 일이었으니까.틈만 나면 두발검사를 한다며 머리채를 잡고 머리를 흔들며"이게 학생의 머리길이냐" 하는데 딱히 반항이란걸 할수가 없다.반친구들이 왕따하는것과 선생들이 왕따 하는게 차이점이 있다면선생들은 권력으로 짓누르기 때문에 어디 하소연 할데가 없다.예를들어 선생들의 불합리함에 교육청에 신고한다고 해보자.그렇다면 선생들은 나에대해"이 학생은 평소에도 품행이 방정하지 못하고 두발, 복장불량에 학생으로서 들고 다니면 안되는소지품까지 가지고 있는것이 여러번 적발되어 주의를 받은 기록이 있습니다"이렇게 보고를 한다. 한국은 선생이 학생에 대해 평가서를 작성하지만 학생이 선생을 평가하는 시스템이 없다.그러니 당연히 나는 그에 반하는 근거 자료가 있을수가 없다.(북미로 이민와서 놀란것중에 하나는 evaluation form이라는 평가서에 학생이 교직원을 평가하는 자료를 분기별로 내고 그것이 교직원을 평가하는 근거가 된다)그리고 나는 결정적으로 학주에게 "너 따위가 대학은 무슨 대학이냐" 라는 소리를 듣고'이 학교는 내가 있을 자리가 없다" 생각하고 자퇴를 했다.그 이후 학교 친구들한테 들은 바로는 긴급 교무회의가 있을정도로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갔다고 했다.한국의 고등학교는 나에게 다른 사람을 도우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줬다.아버지도 그런 학교라면 다닐 필요없다며 시원하게 자퇴를 허락해주셨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학교를 그만두면 내 인생은 끝날거 같고 앞으로 미래가 없을거라고 생각했지만막상 그만두니 발목의 큰 족쇄하나가 풀려나간거 같았다.정말 후련했다. 내 마음대로 할수 있구나.정말 1년동안 마음대로 하고 살았고 여행도 마음대로 하고 다녔다.그런데 어딜가서 일을 하려고 하더라도 일단 최소 고등학교, 일반적으로 대학생 이상의 학력을 원했다.그래서 나는 곧바로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보고 바로 졸업장을 받았다.시험도 어려운게 없었고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도 충분히 문제를 풀 수 있었다.그리고 곧바로 수능도 쳤고 대학교를 들어갔다.내가 좋아하는 학과 내가 하고 싶은 공부였다.당연히 내가 좋아하는걸 공부하니 성적우수로 장학금을 받으며 다녔다.방학중에는 노가다와 돼지농장에서 일을하며 돈을 벌었다.돼지 똥통에서 일을 하더라도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었기에 즐거웠고 흥이 났다.차라리 좀 더 일찍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일찍 대학교를 오면 좋지 않았나 하고 생각이 들정도였다.
그러던 와중 나는 신검이 꽤나 늦게까지 안오고 있었다.친구들중 몇몇은 벌써 군대에 가 있는 녀석들도 있었고 나는 어차피 갈거빨리 가고 싶은 생각에 몇번이나 병무청에 전화를 걸어 확인했지만곧 통지서가 갈거라고 할뿐 날짜는 모르겠다고 했다.그러던 와중에 조혈모세포 은행에서 전화가 왔다.또 골수기증을 할 수 있겠느냐고.보통 했던 사람에게 또 물어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그정도로 여러 사람에게 혈액성분이 맞는 경우는 드믈기 때문이다.나는 곧바로 승낙했다. 조건부로.또 소변줄을 끼운다면 나는 그자리에서 취소하고 병원에서 탈출하겠다고.소장님은 좀 고민을 하시더니 안그래도 소변줄에 대해 굉장히 클레임을 많이 받아서소변줄 없이 수술을 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었다고 하셨다.그렇게 잠시후 다시 전화가 오더니 소변줄 없이 수술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승낙했고 몇일후 성모병원으로 올라가 이전에 절차 그대로 검사와 채혈을 했다.간호사 누나는 아직 그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다.채혈하는중에 누나가 와서"너 이번에 또 한다며? 두번하는건 네가 처음이다 야 ㅋㅋㅋ 근데 왜 말안했어?""아 미안, 나도 농장에서 일하다가 연락받고 거의 곧바로 올라온거라 누나한테 말 못했어""어휴 그래서 온몸에 돼지 똥냄새가 나는구마 ㅋㅋ""ㅋㅋㅋ 집에서 샤워하고 올라왔는데 냄새가 안빠지네. 누나 오늘 몇시 퇴근?""좀 늦을텐데 괜찮겠어? 너 검사 아무리 늦게 끝나도 몇시간 기다려야 할텐데""ㄴㄴ 괜차늠. 나 월급 받고 올라왔으니까 같이 영화 보러가자""응. 그럼 근처에서 놀고 있어. 끝나면 연락할게"그날따라 왠지 채혈하는데 피가 잘 안빠졌던 날이었다.보통 10분이면 200ml 하나 나오는데 그날은 한시간이 되도 200ml가 다 안채워져서담당 간호사도 왜이러지 하며 계속 체크를 했던 날이다.
당시에 나는 이천에 있는 농장과 현장에서 일하고 올라오느라누나와 저녁을 먹는데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눈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를정도였고영화를 보면서 처음 10분정도만 기억나고 남은시간은 코를골며 잠이들었다고 한다.누나가 고마운건 이런 나를 다 이해해 주고 감싸안아 주는거였다.내가 고등학교를 자퇴했을때도 가장 많이 이해해주고 도와준 사람도 가족이외에는 누나뿐이었다.
어차피 일은 거의 일용직이었기에 빠지는건 내 마음대로 였고 검사가 있을때마다 현장소장에게 이야기를해서미리 인력사무실에서 다른 사람을 보충 시켜 놓았다.당시에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거의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일용직이라고 하면 거의 개개인이 따로 일하는 느낌일지도 모르겠지만그렇게 오래 일하다보면 서로 자주 보는 사람들끼리 그룹이 생기게 되고 팀이 구성된다.우리도 5명 정도가 팀이 구성되어 자주 같은 현장에 투입되었다.이천 중심부에는 미란다호텔이 있는데 그곳에서 자주 볼링도 치고 목욕도 하며 놀던 사이였다.그래서 좋은일 한다는데 말릴사람 없다며 빠진날은 다른날 보충하거나 평소에 조금씩 더해서모자르지 않게 준다고 배려까지 해주셨다.이천에 해병대 출신이 정말 많은데 현장소장님도 해병대 출신이었다.굉장히 호탕한 사람이고 의로운 사람이라 이사람과 이전에 '킴스클럽'이라는 할인마트에서 만났던 형에게영향을 많이 받게 되어 훗날 해병대에 지원하여 입대하게 된다.
일은 대부분 농장과 관련된 건설현장이나 철거, 수리등이었다.이천에는 도드람이라는 회사가 있고 그 덕분에 돼지 농장이 근처에 굉장히 많아 일거리도 풍부했다.한번은 이천 고백리 근처에도 일이 있어서 갔는데 이제껏 본 이천의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다.무슨 종교집단 같은 느낌인데 신자들끼리 행사도 자주 하는 느낌이고 건물들이 무슨 최고급 재료로만 쓴 느낌이다.훗날 그곳은 나중에 시크릿가든을 찍게 되더라.
그렇게 시간은 흘러 금새 입원날짜가 됐고이전과 마찬가지로 준비를 했다.그당시 나는 PS2를 가지고 있었다. 훗날 한국에 정발이 되더라 ㅠㅠ역시 만화책과 PS2를 준비해가서 심심할때 게임이나 할까 했는데이번엔 왠지 검사며 준비며 바빳다. 연결하기도 귀찮아서 밤에는 만화책만 보고 있었다.몇일전까지 하루종일 노가다를 하고 온 터라 몸도 피곤했다.저녁에 누나가 퇴근하고 병실에 와서 같이 처음만났던 병실 이야기를 하며 놀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배가 고파 죽을지경이었다.10시쯤 되니 의사선생님과 소장님이 들어왔다.
"하하 학생 우리 또 보는건가. 두번째라며?"
그렇게 말하면서 내 상태를 체크 했다. 검사결과도 문제없고 상태체크도 문제도 없다고 한다.
"의사선생님. 소장님한테 들으셨죠? 이번에 소변줄 끼우면 저 탈출합니다""하하 걱정말아요. 안그래도 그건 제외 시키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골수기증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소변줄은 준비과정에서 제외됐다. (이후 다른 기증자들에게도)이번에는 이전과는 달리 준비가 무척 빨랐고 뭐가 척척 진행되는 느낌이었다.대기시간도 별로 없었고 무척 바쁘게 지나갔다.아마도 그동안 여러번의 경험으로 시스템이 최적화가 된거 같다.준비과정이 기억도 안날정도로 순식간에 내 입에는 마스크가 씌워졌고 원. 투. ㅆ...... 마취가스가 들어오면 정말 숫자 세기는 커녕 그대로 훅 간다.그리고 정신을 차리면 또 팔다리는 이동식 침대에 묶여 있고...간호사는 또 "어휴 팔에 힘이 너무 쎄서 수술이 진행이 안되서 묶어놨어요"예전에 그 간호사분은 아닌거 같다.
그렇게 반쯤 의식을 차린채로 이동식 침대에 누운채로 병실로 들려 왔는데이번 수술이 예전과 다른것은 이전에는 마취가 풀리면 금방 제정신을 차렸는데이번에는 몸에 마취기가 좀 남아 있는듯 몸에 힘이 별로 없고이전처럼 패기있게 팔굽혀펴기 같은것도 못할정도로 허리가 쑤셨다.허리를 들어올리기도 힘들었다.골수를 뽑을때는 엉덩이와 허리사이 부근에 구멍을 4개를 만들어 좌우 각각한쪽은 골수가 나오는곳, 한쪽은 고수 대신 채울 혈액이 들어가는 구멍이다.그런데 움직이려고 하면 그 구멍4개로 골수가 쭈욱쭈욱 나올거 같은 느낌이 들정도로이번엔 굉장히 쑤셨다.그냥 모든게 귀찮았고 밥 생각도 안났다.그런데 이번에는 예전과는 달리 수술후 환자를 보조해주는 아줌마가 있었고식사 할때는 내가 팔다리를 움직이기 힘드니까 음식을 수저로 입에 넣어줬다.
저녁에는 소장님과 의사선생님이 들어오시더니곧바로 퇴근한 누나와 엄마까지 들어오셔서 보조아줌마까지 7명이 한병실에...갑자기 병실이 북적북적 댔다.얼떨결에 인사하는 누나와 엄마... 참 뻘쭘...다들 서로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느라 왠지 정작 나는 소외되는 느낌...
소장님과 의사선생님은 내 상태를 체크하고 금방 나가셨고보조아줌마도 어느새 연기처럼 사라졌다.누나는 오늘 같이 내 상태가 별로 안좋아보여서 같이 병실에 남아 있을까 해서 방문한거였는데엄마가 오셔서 뻘쭘뻘쭘 한 상태로 도시락과 음료수만 놓고 갔다."엄마. 어차피 보조 아줌마도 계시니까 엄마는 집에서 쉬셔도 되요. 그냥 내일 픽업하러 오시면 되는뎅?""오냐. 그럼 푹 쉬고 내일 봅세""엄마. 저녁 아직 안드셨죠? 이거 아까 누나가 사온건데 하나 들고 가서 드세요. 어차피 지금 나 식욕이 별로 없어요""괜찮아? 이전에는 팔팔하드마""모르겠어. 이번에는 좀 힘이 많이 빠지네? 이번에는 그냥 조용히 누워 있을라고...""옹야. 조심하고. 내일 오전에 데리러 올께."
드디어 북적북적 대던 병실이 나혼자 남아 조용하게 됐다.간호사가 몇번 주사를 놓으러 몇번 와서 링겔이 귀찮으니까 빼주면 안되냐고 부탁했는데단호하게 안된다고 하더라.그래서 조용해졌을때 링겔을 건채로 조금씩 몸을 움직여 병실 TV에 PS2를 연결해서 플레이 하기 시작했다.한창 플레이 하는 와중에 조용히 보조 아줌마가 들어오셨다.
"학생 이제 좀 괜찮아요? 잘 움직이는거 보니까 많이 나아졌네..""네 많이 나아졌어요. 움직이기도 편해졌고""저 그럼 제가 잠깐 나갔다가 올테니 필요하면 부르세요""네. 걱정말고 편히 일보세요"
그대로 지칠때까지 게임을 하다가 금새 잠이 들었다.그때당시 플2 게임 이코를 플레이 중이었는데 이상하게 그 쓸쓸한 분위기가 현재의 내 상태와 맞물려병실을 더욱 쓸쓸하게 만드는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이번에는 몸은 좀 뻑쩍지근했지만 소변줄을 안하니까 정말 살만했다.
아침에 일어나 식욕도 아직 안돌아 왔는데 병원식을 억지로 우겨넣고 마지막 검사를 마치고 퇴원 준비를 했다.엄마와 소장님이 한께 들어와 이런저런 대화를 하셨다.대부분 이전에 했던 백혈병과 골수기증에 관한 이야기.그런데 소장님이 뻥이 좀 심했다.골수기증은 일생동안 여러번 할수 있는건데 미국에는 100번이나 한사람이 있다고..어이 어이... 10번도 힘든데 100번은 좀 뻥이 심하잖소..아무튼 나에게 안심하라고 한 이야기 같은데 신빙성은 떨어졌다.그렇게 병실을 나와 누나를 스쳐지나가며 '오늘 밤에 전화 할께' 신호를 보냈다.엄마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그 간호사가 어제 저녁에 봤던 누나인걸 알아챘다.
차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내려오던중 왠지 피곤함에 골아떨어졌고 집에 오자마자 짐도 안풀고 침대에 쓰러져 저녁즈음에 일어났다.부모님은 내가 일어날때까지 기다리신후 같이 외식을 하러 나가자고 하셔서 근처 장어집에 갔다.아직까지 입맛이 돌아오지 않았는데 장어구이를 한입 베어물자 식욕이 돌아와 허겁지겁 먹어댔다.구운 장어뼈는 바삭바삭 과자 같은 식감에 장어향이 가득했다.그때 그 장어집은 수원청소년 문화센터 근처 인계아파트 옆 고속도로 건너편이었고 아직 래미안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는 중이었다.그러고보니 그 고속도로도 뚫린지 얼마 안되었을때다. 내가 중학생때까지만 해도그냥 공터에 과수원이었는데 어느순간 개발이 들어가더니 고속도로가 뻥 뚫렸다.고등학생때는 밤낮으로 학교에 있으니 주변에 무슨일이 생기는지 알리가 없었지..주말에는 누나가 몸보신해준다며 저녁을 사줬다.
그리고 그해 겨울 조혈모 세포 은행에서 한장의 초대장이 날아왔다.그동안 골수기증자와 가족들을 한자리에 모여 저녁을 가지자는 만찬회였다.장소는 성모병원 바로 앞 메리어트 호텔이었다. 날짜는 크리스마스 이주일전.태어나서 만찬 파티같은건 처음이었고 그런 호텔도 처음이었다.엘리베이터에 안내원이 있어!!!!!만찬장소는 호텔안의 꽤 큰 홀이 있었고 테이블도 수십개에참석한 사람들도 수백여명정도로 꽤 많았다.식순대로 행사가 시작되었고 소장님이 인삿말을 하셨고 기증자들이 한명씩마이크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소개를 했다.내 차례가 되자 소장님이 직접 내 소개를 해주셨다.
"저분이 우리나라에서 최초,최연소로 골수기증을 해주셨고, 최초로 두번 기증해주신분입니다. "
스피커로 내 이름이 쩌렁쩌렁... 부끄러워 죽겠네..
"처음 저분한테 연락할때 저희도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고등학생이었는데 과연 승낙을 할까..그런데 첫번째는 물론 두번째까지도 일말의 망설임없이 바로 승낙을 해주셨습니다. 너무 감사하신분입니다.처음에 고등학생이라 학교와 트러블이 있을까 걱정했지만 그런건 큰 문제가 안된다고 기꺼이 자신이 가진것을 내주셨습니다.다시 한번 이자리를 빌어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참 몸둘바를 모를 정도였다.나는 간단히 내 소개를 마쳤고 기증자, 기증자 가족들의 박수를 받았다.식사는 필렛미뇽 스테이크였고 오래되어 미화된 기억인지 가장 맛있었던 스테이크였다.아, 그런데 가톨릭 병원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게 식사전에 소장님을 주축으로 감사기도를 올렸다.나는 뻘쭘하니 부처님께 인사를 올림.

그해 가장 기분이 좋게 크리스마스 시즌을 마무리했던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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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건 첫번째 퇴원하던날 받은것.

두번째는 이미 한번 받았으니 안받아도 된다고 했더니

몇년이 지난후 오른쪽게 어느날 갑자기 소포로 날아왔다.

당시에 나는 이미 외국에 있었기에 소포로 보내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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