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오적

까망머리리 작성일 17.08.15 08: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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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택 후손 

장남 이상우 : 공주대 총장 역임(1998졸)
차남 : 공주대 물리학과 명예교수

 

박제순 후손

자 박부양 :(이완용의 손자 이병길과 나란히 조선 귀족 모임인 동요회 이사를 지내면서

일제 강점기 내내 부귀영화를 누림)
손 박승유 : 서울대 음대와 남가주 대학 음대를 졸업 후 강원대 음대 교수 역임.

 

이완용 후손  

증손 이윤형 : 광복후 은신, 60년대 대한사격연맹 사무국장/

그 뒤 17년간 캐나다 생활/ 80년대 말, 국내에 들어와 이완용 땅찾기 소송/ 승소, 수십억원을 챙김)
삼손 이병주 : 일본으로 밀항-귀화/ 일본 정부 환대
증손 이석형(이병주의 아들) : 1979년, 이완용 부부의 묘(전북 익산군)를 파내 화장함 

 

경술국치가 일어난 1910년 당시

이완용의 재산은 지금의 가치로 200억 원에 이르는 100만원을 갖고 있었는데

1907년 고종 강제퇴위와 정미7조약의 대가로 10만원(20억 원),

한일병합 조약 체결의 대가로 15만원(30억 원)을 챙겼다.

무상으로 빌린 국유지를 제3자에게 팔아넘기는 파렴치한 수법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렸으며

이런 재산을 이용해 군산. 김제. 부안 등의 비옥한 논을 집중 매입해

일제 초기 이완용이 보유한 토지규모가 여의도의 두 배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이완용은 이 토지를 1915년에서 1917년 사이 일본인 대지주에게 처분해 현금을 보유하면서

당시 경성에서 '현금왕'으로 불리며 사채놀이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친일재산조사위원회가

이완용의 후손으로 부터 환수한 토지는 공시지가로 7,000만원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이완용의 증손자 되는 이윤형은 1992년 '조상 땅 찾기' 소송으로

서울 서대문구 일대의 땅2,372m(712평 - 당시 시가 30억 원) 되찾은 뒤 팔고 나서 캐나다로 이민했다 

 



1905년 을사늑약 기념사진 찍은 이토 히로부미와 친일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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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5년 한양(서울) 대관정에서 찍은 한일 을사늑약 체결 기념사진. 앞줄 왼쪽 두번째가 이토 히로부미이며, 을사오적(乙巳五賊) 일원인 이완용(앞줄 오른쪽 두번째), 박제순( " 첫번째)이다.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원 표시는 이토 히로부미, 이완용, 박제순을 드러내기 위해 편집처리한 것임 

 

 

 

그리고 제일 중요한것은  친일파 후손들이 서울땅 70프로 갖고 있답니다. ㅅㅂ

 

그러면 한국땅 몇프로 갖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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