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6년~1907년 까지 지속 된
영국과 러시아 간의 상호 견제 및 확장 경쟁
19세기에 이르러
영국의 2국가 해군정책에 따라
2위 3위의 해군력을 가진 국가가 연합을 해도
영국의 본토 함대 조차 상대를 할수 없을 수준의
막강한 해군력을 보유한 영국은
사실상 전 세계 바다를 통제하는
명실 상부한 최강국이 되었으며
이는 다른 의미로
영국의 허락이 없으면 어떤 국가도
더이상의 식민지 확장을 못 한다는 뜻을 가지게 됨
대표적인게 인도 식민지에서의 프랑스 축출
영국과 프랑스가 함께 식민지화를 경쟁하던
인도는 영국이 인도 합병을 국책으로 정하자
영국의 해군력으로 바다가 통제 된 프랑스는
곧 바로 인도에서 축출 되고
차선책으로 베트남으로 후퇴하였으며
영국에 의해 인도제국이 성립함
이 사건으로 인해
사실상 전 세계의 패권은 영국이 장악하게 되었고
식민지 협상으로 영국이 점령 통제하는게
부담인 지역만 프랑스에게 양보해 주는 정도의
식민지 분할이 진행되었음
당연히 후발주자인 독일 이탈리아는
이들의 이권을 넘어서는 식민지 확장을 계획하는게
사살상불가능
그런 막강한 해군력으로 통제되는
식민지 침략의 유럽 질서를 흔들어 버린
단 1개의 국가가 있으니
바로 러시아
러시아 제국은 표트르 대제 이후 해군력을 만들고자
노력하여 발틱함대와 흑해 함대를 창설해
북해 방향과 지중해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였으나
북해는 영국 본토와 독일에 막혀 한계점을 가지는 거였고
유일한 수단인 흑해 함대를 동원
오스만 제국을 압박하여 보스포로스 해협(이스탄불-소아시아 해협)을
건너고자 했으나
이를 저지한게 바로
영국과 프랑스였음
나이팅게일의 활약으로 유명한
크림반도 전쟁에서
말 그대로 흑해함대는 궤멸당해 소멸하게 되었고
러시아는 해군력을 통한 해외 진출을 포기하게 됨
그 대신 취한 정책이
해군이 아닌 육지를 통한 확장
유럽 국가들은 모두 바다를 통해 세계로 나가야 하는데
해군력은 영국이 통제하니 영국의 패권을 인정해야 하지만
러시아는 그 중 유일하게 아시아와 육로로 이어진 나라였단거
러시아가 영국의 간섭을 무시한 채
육지를 통해 아시아 확장을 시작하자
국가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 받아들인
영국이 위기감으로 러시아 견제를 시작한 것이
바로 The Great Game 이라 부르는
50년에 걸친 러시아 견제 정책임
그 중요 지역이 페르시아 (이란) 아프가니스탄
이 지역이 지정학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일찍이 해군력으로 프랑스를 축출한 바 있는
인도에 러시아가 육지로 진출해 국경을 마주한다는 것
영국의 각종 외교 견제와 국지 전투가 벌어졌고
러시아에 대한 적대적 이미지가 유럽에 퍼지게 되는
기간도 바로 이때임
이게 왜 사건이 중요한가 하면
우리가 대한민국의 역사를 배우며
한번 쯤 들어보는
러시아의 남하정책 / 부동항 확보 정책이
바로 이때 영국이 러시아를 막아야 한다고 호소하고
국가적, 국제적으로 견제하며 주장한 내용임
침략국가 러시아가 남하를 하는데 막을 국가는
영국이 유일하다 이거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지역에서의 이러한 견제가
너무 거세자 (인도와 관련되었기에)
러시아가 이란을 대체 할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극동의 중국이었고
이 과정에서 한반도 문제역시 연결되어 버림
영국이 조선과 개항을 하며 일으킨
영국의 거문도 점령 사건이 그 때문이며
이는 조선과 러시아가 수교를 맺기 2년 전에
영국이 사전에 러시아를 견제하며 발생한 사건임
이후 조선을 식민지화 하려는 일본과 엮이며
뜬금없이 러시아-일본이 충돌하는 구도가 만들어지게 되었고
한국 근대사에 배우는 구한말의 러시아 간섭과
아관파천 사건을 거쳐
영국과 일본이 1902년 동맹을 맺자
일본은 이제 러시아를 먼저 공격해도 된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사실상 전쟁에 돌입하게 됨
이유는 간단하게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아직 완공 되지 않았기에
러시아의 육군은 극동으로 오는데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하였고
해군은 영국의 지방함대 만으로 통제가 가능했기에
승산이 있다고 일본이 보았던 것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고
예상대로 일본이 러시아를 압박하자
러시아가 극동을 구원하고자
유럽의 발틱함대를 파견하였고
러시아 최강의 함대이기는 하나
실상은 그 조차
영국의 지방함대를 만나면 바로 궤멸되는 영국과 엄청난 해군력의 격차가 있기에
무서운 영국을 피해 아프리카 전체를 돌아 1만 키로 이상을 항해해
어렵고 피곤하게 극동에 도착
준비하고 기다린 일본에 궤멸당하는 패전을 함
그때 침몰한게 이번에 금궤가 발견되었다는
돈스꼬이 전함임
근거는 영국을 피해 지구 전체를 도는 장거리 항해를 하며
보급시 결재 수단으로 금을 가지고 왔을 것이니
그 금화가 함대에 있을거란 주장인데 그 액수는 미지수인 거
이런 영국과의 오랜 경쟁이 끝난게
1907년 러-영협상 임
유럽의 신흥 강대국 독일이 등장을 하며
유럽의 패권을 위협하게 되었고
식민지 보다 더 시급한 유럽문제에
영국 - 러시아 양국이 집중하게 되며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양국이 동맹을 맺게 된 것
이때 부터 러시아는 독일이 확장하는 발칸 반도에 집중하게 되었고
결국 이 지역에서 게르만주의 국가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암살당하며
1차 대전으로 비화되는 계기가 마련 됨
1907년 영국 러시아 협상은 한국사에 매우 중요한데
이때의 협상으로
더이상의 아시아 진출의 필요성을 못 느끼고
아시아 정책을 폐기한 러시아가
한반도와 만주 지역의 패권을 일본에 양보하는 협상을
일본과 진행하게 되었고
이때 한반도 병탄의 최후 협상을 러시아와 하기 위해
하얼빈에 온 일본의 대표가
바로 이토 히로부미임
안중근 의사가 이때 이토를 사살한거임
더불어 러시아는 이 협상을 일본에 유리하게 진행 하기 위해
대한제국의 고종에게 일본의 침략이 부당함을
헤이그에서 전세계에 알리라 종용하였고
고종을 러시아를 믿고 헤이그 밀사를
파견하였으나
막상 도착을 하고 나니
러시아의 계획대로 일본이 부랴 부랴 협상을 진행하며
이미 협상이 무난하게 타결되었고
헤이그에서 러시아는 쓸모가 사라진 대한제국의 대표를 버림
결국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된
억울한 대한제국 대표 이준 열사가 순국한게
바로 이 사건
이때 사건으로 고종은 일본에 의해 강제 퇴위 당하였고
사실상 러시아의 허락도 받은 상황에서 더이상의 시간을 끌 필요가 없어진
일본은 1907년 대한제국군의 강제해산
1910년 강제 한일병탄을 진행함
흔히 아재들이 학교 다니던 시절 교과서 배운
이른바 "러시아의 남하정책"이란 말의
세계사적 내막이 이러함
한국 입장과 전혀 무관한
영국의 국책 이권 사업 용어일 뿐이고
이런 지적이 제기 되어
지금의 교과서에는 해당 용어가 삭제되었음
ㅡ이토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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