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하게도 한반도나 중국 대륙, 미국이 아닌 타이완 섬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총이나 폭탄이 아닌 검을 이용해서 의거를 일으킨 것도 특이한 점. 일제 식민지였던 타이완 섬에서 일본 황족이자 육군대장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久邇宮邦彦王)을 암살했다. 그는 일본 황족을 처단한 유일한 한국 독립운동가이다.
황해도 송화군 태생으로 젊었을 때는 황해도 신천군 군청서기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6년 6.10 만세 운동과 나석주 의사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의거를 보고 깨달은 바 있어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대만총독부의 총독 등 요인을 암살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답답해하던 중, 1928년 5월 대만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검열하기 위해 당시 덴노 히로히토의 장인(고준 황후의 아버지)이자 본인도 황족인 육군대장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久邇宮邦彦王)이 육군특별검열사로 파견된다는 신문보도를 접하고 그를 처단하기로 했다. 5월 14일 타이중 시에서 열린 환영식 환영인파 속에서 기다리다가 구미노미야가 탄 차에 뛰어올라 그를 독묻은 칼로 찌르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구니노미야는 즉사하지는 않았으나 칼에 찔린 상처에서 패혈증이 생겨 다음해 1월 죽었다. 조명하 의사는 1928년 7월 18일 타이완 고등법원 법정에서 열린 특별공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0월 10일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이 사건은 이후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야마나시 한조가 사임하는 간접적인 원인이 된다.(관리 및 후속조치 미흡)
“나는 삼한(三韓)의 원수를 갚았노라. 아무 할 말은 없다. 죽음의 이 순간을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조국 광복을 못 본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계속 하리라.”
- 조명하 의사, 1928년 10월 10일 오전 10시 타이완 타이페이의 일제 처형장에서 순국 직전 남긴 유언 -
서울대공원에 세워져 있는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