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사를 꿈꾸던 선웅군은 올해 제주한라대학교 호텔조리과에 입학한 뒤
아버지 부담을 덜겠다며 야간 아르바이트에 뛰어들었습니다.
선웅군의 긴 하루는 새벽 3시가 넘어야 마무리 되곤 했습니다.
매일매일을 소중한 순간들로 꼭꼭 눌러 담아왔죠.
선웅군이 사고를 당했던 3일, 제주의 새벽은 꽤 서늘했습니다.
이날도 오전 3시경 하루 일과를 마친 그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을 향해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도움이 필요한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할머니가 끄는 수레 바퀴가 도로 틈에 빠졌는지 도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듯 보였습니다.
선웅군은 수레 바퀴를 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곤 직접 수레를 밀며 할머니를 안내했죠.
이후 할머니와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다 그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차량에 치이고 말았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교통사고 탓에 새벽의 고요함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곧장 제주시내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뇌사’라는 청천벽력 같은 판정이 내려졌습니다.
머리 쪽을 심하게 다쳤다고 했습니다.
비보를 접한 가족들은 침통해하면서도, 이내 결정하기 어려웠을 말을 꺼냈습니다.
장기조직기증을 하겠답니다.
사실 선웅군 가족에게는 한 차례 비슷한 아픔이 있었습니다.
선웅군이 6살이던 시절, 어머니가 집 욕실에서 넘어져 뇌진탕을 당한 겁니다.
어머니는 3년 간 식물인간 상태로 투병하다 2007년 숨을 거뒀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가족들은 선웅군 상태가 당시 어머니보다 심각하다는 사실을
단박에 알 수 있었습니다.
얼마 못가 이승과 작별하리란 것도 직감했고요.
때문에 가족들은 선웅군을 또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남기기로 했습니다.
그의 마지막을 숭고하게 기릴 방법으로 장기조직기증을 택했습니다.
그는 7명에게 값진 새 인생을 선물한 뒤 9일, 하늘의 별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요, 선웅군은 다른 이의 심장이 되어 올해도 포근한 첫눈을 맞을 겁니다.
내년에는 또 다른 이의 눈이 되어 노랗게 피어날 개나리를 보겠지요.
그렇게 영원히 우리 곁에서 크고 작은 울림이 되길 바랍니다.
故 김선웅(19)군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