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VICEAPI.NMV.NAVER.COM일본명 나시모토 마사코(梨本方子),한국명 이방자(李方子).일본 왕족 출신으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의 비가 되었던 여인.한국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니고 그 경계선에서 늘 흔들리며 살아야 했던 비운의 여인.평소 칸노 미호를 좋아하던 내가 우연하게 본 무지개를 이은 왕비. 솔직히 조선황실을 객관적으로 그릴 수 없는 일본의 성향 탓에 볼 마음은 나지 않았다. 후지 TV 자체가 보수우익 방송인데다가 한일합방과 침략 행위를 미화할 것은 보나마나 뻔할 것이기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동대지진이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일본의 침략행위에 대해서 인정을 하는 장면도 보이고 민감한 사안에서는 드라마 부제가 기적의 부부애 스페셜인 것처럼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로맨스에 집중함으로서 희석시키는 등 나름대로 한국을 배려하는 성의를 보였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적 소재로 한국에서 다루지 않는 조선 황실을 소재로 해서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난다. 그러나 뭐니해도 아름다운 칸노 미호를 2시간 내내 볼수 있었다는 점에서 가장 큰 소득이었다. 한 마디로 제사보다 잿밥에 관심을 두었던 무지개를 이은 왕비 감상이었다.이방자 여사는 1901년 11월4일 메이지 일왕의 조카인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의 딸로 태어났다.행복한 소녀시절을 보내던 마사코는 1915 년경 일본 왕세자비의 최종 후보로 간택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불행의 시작이었다. 건강검진 결과 불임으로 판명나면서 후보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놓고 다른 후보 측의 흉계였다는 말도 있다.곧이어 당시 일본에 볼모로 가 있던 영친왕과의 정략적 결혼이 추진됐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마사코와 결혼시켜 조선 황실의 대를 끊겠다는 일본의 의도가 깔린 것이다. 일본의 왕세자비를 꿈꾸던 한 소녀는 그렇게 망국의 황태자비 이방자가 된 것이다. 어느 한쪽에도 속하지 못한 삶은 고단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된 독립신문은 원수의 여자를 취한 영친왕을 금수라고까지 했다. 고종 황제의 붕어 등으로 인해 두 사람이 가례를 맺은 것은 1920년 4월28일. 이듬해 아들진을 낳았지만 1922년 한국을 첫 방문했을 때 독살 의혹 속에 아들을 잃었다. 이후 아들 구를 얻기까지 10년이 걸린다.이 여사의 삶은 일본의 패전으로 요동쳤다. 영친왕과 함께 평민으로 강등됐고 일본 국적을 상실하면서 생활비를 걱정해야 할 처지에 빠졌다. 1945년 광복은 그녀에게 또 다른 고통이었다. 그는 일본의 왕족이 아니었다. 그저 재일 한국인일 뿐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조선의 황실을 인정할 수 없다며 영친왕 부부의 입국을 거부했다.오랜 기다림 끝에 63년 귀국했지만 한국에서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영친왕은 이미 반신불수에 실어증 상태였다. 정부측의 소극적인 태도로 구황실 재산 환원 문제도 난관에 빠졌다.생면부지의 한국 땅에서 그는 봉사의 삶에 나선다. 영친왕과 함께 1966년 신체장애인 재활복지재단인 명휘원을 설립하고 각종 봉사 모임을 만들어 장애인들을 위해 살아가기 시작한 것이다.그러나황실 재단이 설립했던 숙명재단의 경영권 분쟁으로 “쪽발이 여자는 나가라”는 소리까지 들었다.1970년 영친왕이 세상을 떠나자 주변에선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권했다. 하지만 그는 한국에 남았다.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장애인들을 내버려 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79년에는 사업에 실패한 아들 이구가 일본으로 떠났다. 아들의 귀국을 설득하던 그녀는 86년 아예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아들의 동거녀 아리타 기누코와 마음이 맞지 않아 친척집을 전전했다. 결국 1년 만에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귀국했다. 입국한지 2년 후인1989년 5월 11일, 이 여사는 낙선재에서 삶을 마감했다.모두들 그를 비운의 여인으로만 기억한다. 하지만 여기에 덧붙일 것이 하나 있다. 어려움을 딛고 봉사의 길을 걸었던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사실을.이방자 여사의 회고 - 자서전 '세월이여 왕조여' 중에서어머니.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8년전 95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딸의 운명을 아파하며 수없이 눈물을 흘리셨던 어머니.자식이라고는 딸 둘을 낳아 큰 딸인 나의 행복하고 화려한 장래를꿈꾸셨던 어머니가 오직 나라를 위하여라는 명목으로 나를시집보내면서'딸 둘 뿐인데....' 하며 우시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아니 나이가 들수록, 자식을 낳아보고 잃어보고, 죽음에 가까워 질수록 가슴에 맺혔던 멍은 무게를 더욱 저리게 느끼게 된다.나를 볼 때마다 미안한 얼굴, 괴로운 얼굴로 손을 잡으시고 '용케도 여기까지 살아왔구나. 그러나 의무를 잊지 말아라' 하시던어머니 말씀대로 의무를 다하지는 못했어도 나는 여기까지 살아왔다.사람들은 나를 비운의 왕비라고 한다. 그러나 이제 낙선재 뜰에서서 회고해보는 나의 지난날들은 마냥 비운만은 아니었다.긴 폭풍우 속에서도 가끔 한조각 파란 하늘과 눈부신 햇살이 보이듯이 연인으로서의 사랑과 행복이 있었다. 무지개 같은 꿈과 희망도 있었다.비록 고달프고 외로웠던 기억이라하더라도 이제 회환과 슬픈의대상이 아니라마냥 끌어안고 싶은 것들, 내가 사랑해야 할 소중한 나의 것들로 받아들이고 싶다.전하와 나는 피차 불행한 조국의 왕족이었기에 서로 눈물겨운 역정을 나누는 부부가 되었다.거목이 휘어질 때그 기우는 아픔이 크듯 망해가는 나라의 왕세자였기에 당하는전하의 아픔은 옆에서도 감히 추측하기 힘든 것들이 많았다.인간으로서 전하는 훌륭한 분이었다. 따뜻하고 깊은 마음과 중후한 인품, 뛰어난 영불어 실력과조선 유학생들을 위한 나름대로의 장학회 사업 등 망국한을 되씹으며몸부림치는 그분을 보며나는 한일 융화보다는 외로운 그분의따뜻한 벗이 되고자 했었다.부부로서 두 사람은 오히려 행복했다. 험하고 암담한 길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두사람이 인간으로서의 결합과 깊은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나는 두 개의 조국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나를 낳아준 곳이고하나는 나에게 삶의 혼을 넣어주고 내가 묻힐 곳이다.내 남편이 묻혀있고 내가 묻혀야할 조국, 이 땅을 나는 나의 조국으로 생각한다.나는 한국인이고 내가 묻힐 곳도 한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