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번째는 김오랑 중령으로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 한 엘리트 장교로 하나회 온상이었던 특전사 내부에서 유일한 비하나회 출신 장교로 12.12 군사 반란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지키다가 반란군의 총격에 전사했다.
친분이 있던 박종규 중령이 투항을 권고했지만 X까를 시전 한 뒤 권총을 들고 반란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참군인으로 원래 부대 뒷산에 가매장 되었으나 후일 서울국립현충원 제 29묘역에 안장 되었다.
김오랑 중령의 미망인 백영옥 여사 역시 1991년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으며 원래 남편의 곁에 합장 되는 게 원칙이나 무연고 납골당에 안치되어 2008년 다른 무연고자들과 같이 산골 되었다.
2014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오랑 중령에게 보국훈장 삼일장을 추서 했고 2022년 김오랑 중령의 사망을 순직에서 전사로 처리하면서 사후 42년 만에 명예 회복에 성공했다.
2번째는 정선엽 병장으로 국방부 50 헌병대에서 군 복무를 했는데 전역 3개월을 앞둔 말년병장으로 반란군 제1공수특전여단 병력이 침입하자 우리는 중대장의 명령 없이는 총을 줄 수 없다며 반란군에 대항했다.
그러다 몸 싸움을 하던 중 반란군의 총에 전사하며 23살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는데 총 4발의 총격을 맞았으며 정선엽 병장의 모친은 아들의 정확한 죽음의 원인을 모른체 돌아가셨다.
형 정훈채 씨의 노력으로 2022년 4월 대한민국 정부는 정선엽 병장의 죽음이 신군부에 의해 은폐 되었다고 인정 정선엽 병장의 죽음을 교휵 훈련 중 순직에서 전사로 변경했지만 전사 장병에게 오는 1계급 특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2024년 법원은 대한민국 정부가 정선엽 병장의 유족에게 총 8천 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고 이후 정부가 사실상 항소를 포기해 유족들은 8천 만원의 배상금을 받는데 성공했다.
김오랑 중령,정선엽 병장은 참군인의 표범들로 김오랑 중령은 3년 8개월을 특전사에 몸 담은 엘리트 장교로 몸이 아픈 아내를 돌보기 위해 승진에 유리한 부대로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전사에 다시 복귀한 애처가였다.
정선엽 병장은 의협심과 애국심이 남달랐던 청년으로 원래 사관학교에 입학하려 했으나 주변의 추천으로 조선대학교 공과대학-전자 공학과에 입학한 앞으로 미래가 촉망 받았던 청년이었다.
김오랑 중령,정선엽 병장은 반란군의 의해 결말이 정해진 싸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상관을 지키려는 군인 정신을 발휘하다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참군인들로 사후 40년이 지나 서야 명예 회복을 할 수 있었다.
김오랑 중령,정선엽 병장을 죽인 하나회 출신들은 1993년 집권 한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물갈이 되었고 김오랑 중령을 사살 한 박종규 중령 역시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강제 전역 당했다.
이후 군인 연금을 포함 한 모든 예우를 박탈 당한 뒤 생활고에 시달리다 식도암 4기에 걸려 2010년 사망했으며 죽기 전 동료인 김오랑 중령을 사살한 행위를 크게 후회 했다고 한다.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하나회를 숙청 이들 군대 내 사조직을 밀어낸 덕분에 김오랑 중령,정선엽 병장의 경우 비록 40년이 지나긴 했지만 끝내 명예 회복에 성공했다.
2024년 개봉 한 서울의 봄을 통해 김오랑 중령, 정선엽 병장의 숭고한 희생이 많은 국민들에게 알려졌고 특히 정선엽 병장의 죽음은 사랑하는 아들들을 군대에 보낸 부모님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