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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의 시작
전쟁은 인간이 여러난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 할때 떠올리는 아이디어다.
구원군을 요청하는 비잔틴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특사를 접견했을때 교황 우르바누스2세또한
그랬을지도 모른다
당시 비잔틴은 셀주크 투르크라는 신흥국에 아나톨리아반도 대부분을 빼앗긴 상태였다.
특히 수도 콘스탄틴노플에서 불과 3일거리에 있는 니케아까지 함락당한 지경이였음.
비잔틴 제국은 아직 해상권은 장악하고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병력이 턱없이 모자랐다.
수도에서 3일거리에 적이 있자 그리스 정교회와 가톨릭으로 서로 교리차이로 대립하던것도 사라졌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비잔틴은 체면을 구기면서 까지 명목상 서로마의 수장 교황에게 구원군을 요청할수 밖에 없었다.
사실 요청한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였다.그러나 그동안은 구원요청에도 응답없는 메아리로 끝났었다.
교황 우르바누트2세는 그 전임자 그레고리우스7세의 정식후계자인데
둘다 가톨릭 개혁파로 그당시 가톨릭 개혁파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세속의 수도원화" 였다. 교황의 말을 황제들은 그냥 잘 따르면 된다고 보는 강경파.
전임자 그레고리우스7세는 속세의 황제가 성직자 임명권을 가지려 하자 바로 파문 시켰고.
당시 27세의 신성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는 파문을 풀어달라고 카노사에 있던 교황에게 무릎을 꿇었슴
중세 파문의 위력은 매우 강력해서 파문당한자는 바로 그리스도의 적으로 간주되고 파문된 자와 관계된 모든 사람이 적으로 돌려진다는걸 뜻함..ㄷㄷ(마녀사냥!!!)
거의 사형선고나 다름없었지.1077년 겨울 눈이 내리던 밤
하인리히4세는 어쩔수 없이 교황앞에서 무릎을 꿇을수 밖에 없었다.결국 파면은 물러줬지만
그레고리우스 7세의 대승이였다. 하지만 그레고리는 정치적인 인간은 아니였음.
하인리히4세는 수치심을 씻기위해 이후 8년동안 정치적으로 그레고리우스를 압박한다.
결국 그레고리우스7세가 죽은건 로마가 아니라 도피처인 살레르노요새였다.
그다음 교황 빅토르3세가 즉위했지만 황제와 관계를 청산하지 못하고
결국 2년만에 죽고
후임 우르바누스2세가 즉위. 전임자 교황과는 다르게 이 교황은 매우 현실적인 교황이였다.
교황은 신성로마황제와의 관계와 비잔틴 황제의 특사의 요청을 듣고 두가지 난제를 해결할 방도를 찾는다.
당시 카톨릭 국가들은 서로 치고박는 전국시대 상태였는데.
도요토미가 다이묘들의 반란이 두려워 조선을 침공했듯.
카돌릭 국가들에게도 어딘가에 몰두하게 만들 구실이 필요했다
안그러면 교황자리가 위험해지니까
1095년 11월 교황은 클레르몽에서 공의회를 개최한다.(공의회는 로마시대 원로원과 비슷한 기능을 하던 모임)
공의회에서 우르바누스2세는 일장의 연설을 한다.
기록으로 남은건 없지만 대략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서 연설한걸로 보인다.
전반부에는 카톨릭의 타락을 꾸짖으며 윤리가 땅에 떨어졌다는 말을 하며 같은 그리스도 끼리는 싸우지 않는
'신의 휴전'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후반부에는 그화살을 이교도들에게 돌린다.휴전을 하더라도 우리에겐 중대한 적이 도사리고 있다.우리는 동방의 형제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야한다고 주장해 .(공동의 적을 만듬)
후반부는 이렇게 말했다고 짐.
"이것은 내가 명하는것이 아니다.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명령하신것이다.성지로 가서 이슬람교도랑 싸워라.설사 그곳에서 죽는다 해도
너희의 죄는 완전히 용서받게 될것이다.신께 부여받은 권한으로 약속한다.그리스도 형제여.성지를 탈환하라.이것을 신이 바라신다"
가슴이 뜨거워진 카톨릭 신자들은 "신이 이걸 바라신다"를 연창하며 받든다.1차십자군 선포가 시작된것이다.
공의회에서 정해진것은 3가지였다.
1.모든 카톨릭 국가는 신의휴전을 받들것.
2.성전에 참가하는자는 가슴이나 등에 붉은 십자가 표식을 붙일것
3.동방으로 출전하는 날짜는 이듬해(1096년)성모마리아의 승천일(8월 15일)로 할것
우르바누스2세는 아주 대담한 도박을 했다.전임자 그레고리우스 7세가 세속의 황제와 실력행사로 겨뤘다면
성지탈환이라는 목표로 모든 카톨릭 국가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수 있었을뿐 아니라 반대자도 대놓고 반대하기 어려운
성전을 주창했기에 자신의 뜻대로 군주들을 휘어잡을수 있었다.만약 성지를 탈환한다면 교황의 권위는 더더욱 높아지리라.
사실 이슬람은 성전을 주창할만큼 악독한 사람들이 아니였다.
이슬람 자체가 성지순례를 중요시 여겼기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순례를 이해하고 있었고
순례를 막는 행위는 하지 않았었다.가끔 도적때가 순례자를 터는 일은 있었지만
이교도라서가 아니라 그냥 지나가다 보이니 턴것이였다.
지즈라라는 세금만 내면 타종교를 믿는것도 허용했다.
그러고 보면 교황 우르바누스2세는 꽤나 대단한 선동가였다.
아무튼 잠시 뜨거웠던건 몇일 못가니까 공의회는 10일에 걸쳐 구체적인 십자군 세부 계획을 세운다. 항목으로 보면
1.십자군에 참가하는 자에게는 완전한 면죄가 이뤄진다.
(카톨릭은 인간이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알고있는데 그것뿐만 아니라 살인도 사해준다고 하는것;;)
2.질병등 불가피한 일로 참가못하는 사람은 돈으로 내거나 참가하는 자들 무기를 사줘라
3.동산과 부동산을 막론하고 참전자가 두고간 재산은 로마교황과 교구인이 책임지고 보증한다.
(걱정말고 나가 싸우라는 소리)
4.십자군 참가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처분하는 재산이나 담보물은 정당한 제값을 받을수 있게
교황이 책임지고 보증해준다.
5.십자군 참가 자격을 얻으려면 해당 교구 성직자에게 십자가 서약을 받아야 참전이 가능하다.
(오합지졸은 안받아주겠다는 뜻-하지만 유명무실해졌음)
6.십자군 서약을 했음에도 출발하지 않거나 중간에 돌아오는 자는 파문에 처한다.
교황은 당초 아주 조직적인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파견하려 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예상외의 세력이 나타났다.
은자 피에르
피에르는 프랑스인 순회수도사(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신부)였는데 그의 진솔한 웅변에 많은 하층민들이 감동을 받았었다.
세상살이에 힘겨움을 느낀 민중들은 성지탈환이라는 목표에 열광했고 피에르를 따라 민중 십자군 대열을 만들었다.
노인 여자 할것없이 모두 피에르를 따랐다.이건 교황 생각과 많이 다른 십자군인데.. 오합지졸은 아예 배제하려고 했던
교황 생각에 많이 빗나간 십자군이였다.사실 성지순례는 돈만 내면 가능한것이였는데..
이슬람에게 통행세를 내야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이슬람에 대한 적대감으로 가득찬 민중들이였다.
이 피에르의 민중 십자군은 프랑스 북부에서 독일에서 강줄기 들이 합쳐지듯 합류해 대략 10만명의 규모였다고 추측된다.
피에르군은 교황이 정한 1096년 8월 15일도 지키지 않고 1096년 봄에 출발해버렸다.
원래 가지지 않은 하층민으로 이뤄진 무리였기때문에 병참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냥 당나귀 타고 가는 피에르 뒤를 걸어서 따라가는 형태였음.
그나마 유럽에서는 사람들의 인정에 기댈수 있었으나
그것이 여의치 않을땐 강도짓도 서슴치 않았다.특히 유대인이 사는 지역은 이교도라고 강탈짓이 더욱 심했다.
신성로마제국 영역을 통과할때는 하인리히의 군대가 파견되서 강탈을 멈추고 도주했으나 그뒤엔
이미 천여명의 유대인이 희생되기도 했었다.독일을 뒤로하고 헝가리 영역에 들어갔을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런 무리의 장점은 이런 희생을 개의치 않았다는 것이다.
당나귀 탄 피에르가 앞장서고 식량이 떨어져 굶어죽던 길가다 지쳐 쓰러져 죽던 아무 상관없이 행군만 계속했다.
결국 여정의 반인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을땐 10만에 이르던 무리가 5만 가까이로 줄어든 상태였다.
물론 약탈하다가 헝가리왕에게 죽은 숫자가 수만명이였지만 피에르는 개의치 않았다.
집결지인 콘스탄티노플에 교황이 정한 출발일 8월 15일 보다 2주나 이른 8월 1일에 도착했다.
제후들
교황이 한 호소는 사실 군사력을 가진 군주들을 향한것이였다.여기서 누가 참여하는지가 제일 중요한데..
제일 군사력이 강한 군주들은 제외될수 밖에 없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4세는 교황과 사이가 매우 나빠서 응답조차 하지 않았고
프랑스의 왕 필립은 당시 이혼문제때문에 교황으로 부터 파문당했던 상태였다.물론 사소한일이였기때문에
교황이나 왕이나 별 신경은 쓰지 않았지만 십자군 참가자격은 없었다.대신 프랑스왕의 대리인 위그가
교황이 원하는것만큼의 군대(보명 2만 기병1만)의 반정도만 꾸려서 갔다.필립은 자기휘하의 병사 반도 주지 않았음.
실질적으로 십자군에 나선건 제후들이 였다.
첫째는 노르망디 공작 가문의 장자 로버트(프랑스어론 로베르)
로버트는 노르망디공국을 건설한 노르만 왕조의 시조 "정복자 윌리엄"의 장자였다.
동생 윌리엄2세(루퍼스)에게 영국왕을 뺏기지만 노르망디공국은 로버트의 영토였다(근데 게임에선 왜 동생이 나이가 더 많지??..).
동생과의 다툼으로 인해 돈이 없어서 공국의 땅을 저당잡혀서 간신히 군대를 마련한 인물이다.
교황의 기준에 한참 못미치는 수준의 군대를 가져갔음
당시 나이 42세 몇년이 걸릴지 모르는 원정엔 적합한 나이였다.
블루아(프랑스 파리인근)백작가의 지도자 에티엔
노르망디 공작에 비해 상당히 유복한 가문으로
정복왕 윌리엄의 딸을 아내로 삼았음.
근데..마누라에게 잡혀사는 인물이였다.
십자군 참여한것도 아내 아델라가 "노르망디 공작(오빠)도 간다니 당신도 가세요"라고
등떠밀려 갔다.실제로 1차 십자군 전쟁 동안 안티오키아 공방전 직전에 전황이 불리하니 도망침.
근데 프랑스에 돌아가니까 아델라가 이게 뭔 추태냐고 다시 등떠밀어 가게되는 비운의 사나이;;
교황의 기준 보병2만 기병1만은 껌으로 마련해갔다(하지만 정예병은 아니였음)
다음은 플랑드르(네덜란드,벨기에)가 의 로베르
아직 재위에 있는 아버지도 있었고 물자는 풍족했고 부유한지방 플로렌스라
나름 고급병을 끌고갈수 있었다. 신성로마제국과의 분쟁에서 실전능력도 갖춘
정예병을 거느림.
다음은 툴르즈(마르세이유인근 남프랑스)백작
레이몬드 생질 원래 툴루즈 엠블럼은 구글에 없다..
저 아래 동물 그려진건 레몽(줄여서)이 나중에 트리폴리를 점령할때 바뀐 엠블럼.
십자군 제후중 유일하게 이슬람과 싸워본 경험 있는 사람임.
서쪽 스페인의 툴레토 탈환때(레퀴콩스타-국토회복전쟁) 참가해 혁혁한 공을 세웠지 (프랑스 남부 영주다)
교황이 십자군 보낼때 지휘관으로 점찍어둔 인물.근데 1096년 당시 나이 50대 중반으로 매우 노장이였다.
이사람은 싸울때 너무 전력을 다하는 나머지 병사들은 쉽게 상하게하는 인물이였음.
선봉장은 할수있으나 지휘관은 어려운 사나이.교황도 전투에 문외한이였기때문에 이인간을 지휘관으로 발탁한듯
다음은 下로렌공작 고드푸루아 드 부용
그당시 프랑스 로렌지방은 신성로마제국 땅이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신롬 황제는 교황과 사이가 매우 나빳다고 했는데
의외의 참전이였다.자연스럽게 레몽을 제치고 십자군의 총지휘관을 맡게된다.
황제의 명으로 교황 그레고리7세를 산탄젤로 성에 가두고 현 교황도 로마에 몇년씩 못들어오게
만들었던 사나이였다.그런 그가 십자군에 참가하는건 매우 의외였음.
교황은 참전할걸로 생각도 안한 영주이다.그런데 그가 참가함.
고드푸루아는 차남이였기때문에 上로렌의 공작인 형에게 下로렌을 맡기고
3남과 4남을 데리고 십자군에 갔어 3남은 외슈타슈 4남은 보두앵이였다.
그리고 사촌인 보두앵(동명이인)도 데리고 십자군 출정에 나섰다.당시나이 36세
창창한 나이였지
프랑스, 신성 로마제국 뿐 아니라
그당시 시칠리아와 나폴리 인근에는
노르만 왕국이 있었다.그곳의 왕자
알타빌라가의 보에몬드도 참전한다.
성전에 가장 먼 사람.
아마 이 사나이가 가는 이유는 왕국의 영토를 넓히기 위함이였을것이다.
노르만의 정예병을 이끌고 감
이슬람 출신 부관들도 많이 있었다.
교황의 요구인 2만명의 보병과 1만명의 기병을 다 맞췄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사실은 그것에 반정도만 이끌고 갔을거라고 추정함.하지만 모두 정예병이였다.당시나이 47세
매우 잘생겼다고 기록되어있음
당시 비잔틴의 공주 안나 콤네나가 쓴 47세 보에몬드 인상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전체적으로 키가큰 유럽 제후들 속에 섞여있어도 머리하나는 더 컸고 머리는 금발이고
마른편이지만 탄탄한 체구였다.파란눈으로 사람들을 쏘아보듯 쳐다보고,당당한 걸음걸이는
자존심이 매우 강해보였다.거친성격이면서도 냉정하고 교활했다.그러면서도 뭐라 표현할수
없는 매력이 풍긴다" - 공주가 뿅 갔네 ㅋㅋ
위 멤버들이 제 1차 십자군 전쟁의 주역들이다. 제후들의 말만 믿으면 10만이 넘는 군세겠지만..
사실은 5만명 정도라고 추정하고있음
각각 다른 가문의 혈족들은 1096년 8월 15일 1차 집결지인 콘스탄티노플로 떠나게 된다.
교황이 괜히 앞뒤로 십자가 옷 입으라고 한게 아니다.
이 많은 가문들이 따로 진군한다면 투르크에 각개격파 당할것이기때문에 같이 묶어주는 공통된 문양이 필요했었음
아무튼 1차 십자군의 주역들은 콘스탄티노플로 출발한다.
1096년 여름.. 비잔틴의 황제 알렉시우스는 십자군을 기다리며 어떻게 이용해먹을까
고민중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