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타인 데이. 2월 14일 근처만 되면 모든 세계의 연인들이란 연인들은 전부 무엇에 쫏기는 듯이
경쟁적으로 초코렛을 사고, 만날 약속을 잡고, 어떻게 좀더 좋아한다는 말을 멋지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그런 고민들... 고민들... 그런 걸 보고 행복한 고민이라고 하나요?
2월 14일의 아침. 전 다른 날과는 달리 일찍 일어났습니다. 오랜만에 밝은 햇살을 오랫동안 맞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이나 기분 좋은 하루가 될 것 같았습니다.
몸을 뿌드득 일으키고, 화장실에 가서 세수하고, 이 닦는 20년동안 계속 되어온 습관 아닌 습관을
행사처럼 마치고 나서 옷장을 열었습니다. 옷장 안에는 길거리를 걷다가 무작정 사버린
5000원짜리 분홍 스웨터가 아빠가 큰 맘 먹고 사주신 롱코트와 같이 힘겨워 하는 눈치로
걸려있더군요. 이 놈, 제가 아니면 누가 입어주겠습니까. 분홍 스웨터를 꺼내 걸치고, 청바지를
입은 뒤 전 어머님께 나간다는 말도 안하고 그냥 집을 빠져 나왔습니다.
그녀랑 만날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제 옆에는 항상 그녀가 있습니다. 지하철 타러 같이 가는데도
옆에서 계속 싱긋 싱긋 웃어주더군요.
" 춥니? "
" 아니. 너만 안추우면 나도 안추워."
" 그래."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신촌역으로 향했습니다.
신촌역에는 그렇게 사람이 많을 수가 없더군요. 저마다 행복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즐겁게
웃으며 오늘을 즐기는 그 수많은 커플들. 저도 질 수 없었죠. 제 옆의 그녀를 보며 전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웃어주었습니다. 안을수도 없고, 손을 잡을 수도 없지만 같이 있는 것으로도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주 가던 철판 볶음밥 집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녀는 좀 배불러 하는
눈치길래 하나를 시켜 둘이 나누어 먹었습니다. 이상하게 목에 걸려 왔지만 그냥 모른 척 하고
꾸역 꾸역 먹어댔습니다. 꾸역 꾸역...
그리고 잠시 신촌 거리를 거닐었습니다. 소화도 시킬 겸, 거리도 볼겸. 오랜만에 와 본 거리라서
그런지 어색하기도 하고, 그 많은 사람들을 헤쳐나가는게 거북하기도 하고, 그래서 저와 그녀는
그냥 가만히 벤치에 앉아서 겨울의 햇빛을 몸으로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제가
예매를 해 두었던 영화를 볼 시간이 되었습니다. 전 제 곁에서 따스하게 지켜보고 있는 그녀와
같이 영화관으로 향했습니다.
역시 영화관에도 사람이 많았습니다. 재미있는 영화라고 소문이 났었으니까요. 그러나 전
영화내용은 하나도 기억 할 수 없었습니다. 옆에 앉아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게 더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었으니까요. 너무 행복하니 눈물이 나더군요. 손을 꼭 잡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슬프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오니 벌써 저녁 9시. 밤은 벌써 별들로 어두움을 밝힐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고, 달은
나무가시처럼 세상을 찔러대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제가 살며시 얘기하더군요. 초콜렛 사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그래서 전 아무말 없이 가게로 들어가 제일 예쁜 초콜렛을 사서 손에 들고는
얘기 했습니다. 이건 내가 산 게 아니라 네가 사 준거라고. 그때 그녀의 표정은 제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기쁜 표정이었습니다.
......
그 날 영화관에서 옆의 빈자리에는 제 눈물방울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을 껍니다. 혼자 걷던 신촌
거리에 남겨진 발자국 하나하나마다에도 고스란히 슬픔이 담겨져 있을 껍니다.
그렇게.. 전 1년전에 골수암으로 떠나버린 그녀와 함께 행복한 발렌타인 데이를 보냈습니다.
그녀와 함께.....
이젠 놓아줄께. 안....녕. . . . .. .
- 이 글은 제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쓴 글입니다. 제 친구처럼 슬픈 발렌타인 데이를 보낸 분이
없기를 빌며 이만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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