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제가 걸렸네요? 이번엔 제 차례군요.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으신 거죠? 첫 키스한 이야기를 해 달라구요? 아무리 진실게임을 한다지만 너무 심한 거 아네요? 이건 개인의 프라이버시라구요. 음냐...그래도 꼭 해야한다구요? 그게 진실게임의 규칙아니냐구요? 후훗, 혹시 다들 짜고서 절 고른 거 아네요? 알았어요. 좋아요. 할께요.하지만 제 이야기가 지루하다고 중간에 끊어버리기는 없기예요.
첫 키스라.....조금 오래된 일이네요.
제가 대학을 들어간 건 92년도였어요. 뚜렷한 생각이 있어서 진학한 것도 아니었고 전공과목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 시큰둥한 날들을 보내다가 동아리에 가입을 하게 되었어요. 아직도 그 동아리사람들 하고는 자주 연락을 하곤 하는데 컴퓨터를 빙자해 술 마시는 동아리 였죠. 뭐...그때는 한창 동아리가 처음 만들어질 때였고 그래서 열의를 가진 선배들은 밤을 새며 컴퓨터에 매달리곤 했었죠.
근데 참 웃긴 동아리였어요. 무슨 동아리에서 가입시험을 치겠다고 그러네요? 나, 참... 암튼 가입한 한 달 동안을 DOS 라는걸 갈켜줘요. 그리고 한달 뒤 시험을 봐서 붙는 사람만 그 동아리 회원이 될 수 있는 거죠. 말도 안된다구요? 자꾸 끼어들지 마세요. 저도 말도 안되는 동아린 줄은 알았지만 그래도 오기가 있어서 교육을 받고 시험을 치기로 했어요.
근데 제가 뭘 알겠어요. 컴퓨터란 건 어마어마한 사람들이나 만져보는거라 나와는 동떨어진 세계의 이야기일꺼라고 생각을 하고있었는데 말예요. 첫 날 갔더니 시꺼멓고 네모난 걸 들고 "이게 디스켓입니다"하고 설명하더라구요. 전 그냥 입을 쩌억하니 벌리고 구경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 때 절보고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리데요? 고개를 돌려봤었죠.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벌써 5년이 다 되어 가는데 처음 보았을 때의 그 모습을.......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구요... 분홍색 남방을 단정하게 목까지 단추를 잠그고 금색 핀을 남방 주머니 쪽으로 꽂고 머리는 단정하게 깎았었고, 청바지는 꼭 끼는걸 입고 있더라구요.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한쪽 눈을 찡긋 하는 거였어요.
그 애가 메모지를 하나 건네주데요. 텅 빈 종이엔 썰렁하게 DD 라고만 적혀 있었구요. DD, 네, 그게 그 애 이름의 약자였었어요. 그리고 난 이후로 그 애를 DD라고 불렀어요. 그 친구와 무슨 찐한 사이가 되었냐구요? 아니, 자꾸 이야기하는데방해할꺼여요? 가만히 좀 있어보란 말예요. 흐음......원래 뜸을 들여야 이야기가 맛있다던데....
친했죠. 정말 1학년 1학기때는 그 친구와 술마시러 다녔던 기억밖에 나지 않아요. 물론 둘이서만 다닌 건 아니었어요. 신영이라는 다른 친구가 늘상 방해물처럼 끼여서 어울리곤 했죠.
그래서 셋이서 늘 수업을 째고 술을 마시고, 시험을 치고 나면 다음날 시험준비도 하지 않고 곧장 극장으로 가 새로 나온 영화들을 보고, 그리고 학교에 두고 온 가방을 가져오기 위해 소주를 한 손에 들고 학교까지 걸어갔었어요. 왜 버스를 타지 않았냐구요? 술을 마시느라 돈을 다 써버렸거든요.
그렇게 셋이서 조금 많게 혹은 조금 어울리지 않게 그렇게 몰려 다녔으니 뭐가 될수도 없었겠죠.
그러다가 어느 날 그래요, 나 군대에 간다고.... 일 학년이었을 때예요. 내 주위의 누군가가 군대를 간다고 말한 적도 들어본적도 없었는데 그 애는 마치 남의 일을 말하듯,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나 군대가"....라고.. 처음 알게된 남자애가 군대를 간다고 가로등 켜진 거리에서 그렇게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을 해야하는 건지 어떤 말을 건네줘야 하는 건지 전 망설이며 한참을 서 있었죠. 결국 그 친구는 절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는 손을 흔들며 가버리더군요.
그게 마지막이었냐구요? 시시하다구요? 자꾸 초치지 말랬죠??? 아우..자꾸 이러면 나 이야기 안 할거예요...네, 알았어요. 인제 조금밖에 남지 않았어요. 지루해도 조금만 더 기다려줘요.
결국 DD는 군대를 갔어요. 전 아침에 동대구역 앞으로 나오라는 친구들의 전화도 무시하고는 계속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었어요. 밤새 한 잠도 자지 못했으면서 눈이 빨개져서 혹시나 DD가 전화를 걸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망설이며..... 가만히 누워있었어요. 근데 전화벨도 안 울려요. 너무 속상하더라구요. 가만히 누워있는데, 밖엔 햇살이 눈이 부시게 빛나는데, 아침이라 새들이 짖는 소리도 들리는데 그냥 눈물이 줄줄 흘러 내리데요. 그날 정말 많이 울었어요. 그렇게 DD는 제 생활에서 사라져 버렸죠. 아주 조그마한 기억들만을 남겨두고 말예요.
여름이 지나갔어요. 그 친구를 데리고 여름은 가을의 뒤로 사라져버렸죠. 그리고 전 조금씩 DD가 없는 생활에 익숙해져갔어요. 간간이 동아리친구들 앞으로 보내져오는 DD의 메일을 반가워하는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구요. 딱 한번 저에게 엽서가 왔어요. 보통 가게에 가면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관제엽서 뒤에 "네가 보고싶어. DD" 라고만 적어서 보냈더군요. 그런데..전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냥 한번 읽어보고 가방에 쿡~ 쳐박아 버렸죠. 그러다가 다른 친구를 통해서 DD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가출하셨고, 그렇게 텅 빈 집을 할머니와 둘이서 지키고 있었는데 그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그 이야기를 해주데요. 어떻게 DD에게 말해줘야 할 지 모르겠다구요....
전 그제야 DD가 왜 그렇게 내게 거리를 두었는지, 왜 한번도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었는지, 항상 빈 어깨만을 보여주었는지 이해가 되더군요. 그리고 절 한번만 보고 싶다고 했던 말이 너무 의미심장하게 와 닿는 거였어요. 너무 미안해서, 그래서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내서라도 만나 보려고 생각했어요. 기말고사를 마치고 시간을 내서 DD를 만나러 가볼 욕심을 내었어요.
간간이 눈이 내리던 겨울이었어요. 마지막 기말고사 과목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왔는데 난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군복을 입고 늠름해진 어깨를 가진 DD가 날 보며 씩~ 웃고 있더라구요. 그냥 무지무지 반가워서 어떻게 온 거냐구, 밥이냐 먹었냐구, 이런저런걸 물었어요. 그랬더니 빨리 돌아가야 한다면서 잠깐...날 보러 들렸다고 그래요. 난 동아리 방에라도 가자고, 그래도 싫데요. 그냥 저 얼굴만 잠깐 보고 갈꺼라구요. 괜히 쑥스럽고 할말도 없어지고, 그래서 러브로드길을 한참 걸었어요. 눈이 조금씩 내리는 날, 다들 시험에서 해방된 기분을 만끽 하는 날, 그 애와 그 길을 걸어가는 게 꿈만 같더라구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었어요. 그리고 DD가 절 데려다 주겠다고 해서 저희 집까지 같이 갔었죠.
저희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이 보이는 가로등에까지 왔을 때였어요. 그 애가 그래요. "널 데려가고 싶었어."라구요... 그래서 전 그랬죠. "어딜?" 그냥 그 앤 말없이 씩 웃기만 했어요. 그러더니 "혼자 가면 심심할 것 같아. 같이 갈래?" 라고 물었어요. 난 아무생각 없이 그랬어요. "안돼. 지금 집에 들어가야 해. 늦었단 말야." 라구요.... 그 땐 정말 늦었거든요. 10시까지였는데 벌써 10시 30여분이 훨씬 넘어가고 있었으니 말예요. 그 애, 그냥 말없이 절보고 웃어주었어요. 그리고 잠깐 눈을 감아보래요. 눈이 내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어느새 종종걸음으로 다들 집으로 들어가 버리고, 옆집 개 짖는 소리만 크게 들리고 아니 조금 더 오래 눈을 감고 있으니까 눈이 내리는 소리가 그리고 눈이 쌓이는 소리가 들렸어요. 멍하게 그 소리에 취해있는데 따스한 숨결이 제 입술위로 내려오더라구요. 그리고 마치 공기가 사라지듯 혹은 눈이 녹아버리듯 그 기운은 사라져버렸어요.
제가 눈을 떴을 때, 골목 앞뒤로 아무도 지나가는 사람은 없고 텅 빈 어둠의 끝만이 보였어요. 마치 제가 꿈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듯 말예요. 맞아요. 꿈......같았어요. 정말...
그리고 어느새 눈은 그쳐있었어요. 아직도 회색 빛인 하늘을 보며 집으로 가려고 골목길로 접어드는데, 가겟집아줌마가 그래요. "학생, 혼자서 눈을 뭐 그렇게 맞고 서 있었어?" 라구요... 황당하더라구요.
그냥 무시하고 집으로 들어 가려했죠. 그러다 문득 돌아서 그 가로등이 서 있던 곳까지 걸어가 봤어요. 사람들이 유난히 다니지 않는 길이었고 밤이 늦을 때까지 눈이 쌓여있었어요. 그 눈길 위에 발자국이 한사람께 오똑하게 찍혀있었어요. 한사람.... 그건 제 발자국이었어요. 같이 걸어왔던 그곳까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눈을 맞으며 걸어왔던 DD의 군화자국은 보이지 않았어요.
밤새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겁이 났었냐구요. 그건 아니었어요. 그냥 꿈을 꾼 것이었을거라고, 그 애를 본 것도, 그 애와 말했던 모든 것들이 내가 만들어 낸 거대한 환상이었을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때까지 발그스레하던 입술은 내 환상을 부인하고 있었어요.
아침이 되자말자 신영이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다짜고짜 DD에게 가봐야겠다고 그렇게 말을 했어요. 신영인 변덕스런 제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터라 말없이따라와 주더군요. 아침일찍 포천으로 가기 위해 의정부로 가는 버스에 올랐어요. 네시간... 그곳에서 다시 포천으로, 거기서 다시 부대를 찾아 들어가기 위해 택시를 탔어요. 연말이었고 휴가 나온 사람들로 도로는 혼잡했어요. 그리고 마침내 부대에 도착할 수 있었어요. 기웃기웃거리는데 왜 왔냐구 물어보더라구요. 그래, 면회를 왔다니까 안으로 들어오래요. 부대를 확인하고 DD의 이름을 불렀어요. 담당자의 얼굴이굳어지더라구요. 그러면서 그 애를 찾아온 게 맞냐구 그렇게 확인을 해요. 그때까지만 해도 전 아무것도 눈치를 채지 못했죠.
망설이더니 전화를 걸더라구요. 그리고 누군가를 불렀어요. 하지만 DD의 이름은 아니었어요. 불안한 느낌이 들었어요. 무엇인가, 내가 알지 못하는 일들이 진행중이라는 기분이 들었어요. 옆에 딸려있는 큰 식당 비슷하게 생긴 곳으로 들어가서 기다리라고 하더군요.
난로 앞에서 다른 면회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신영이와 난 30여분을 가만히 앉아있었어요. 저도 신영이도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 때 누군가가 절 부르더군요. 상병마크를 달고있었어요. 쭈뼛거리면서 제게 DD를 찾아온 사람이냐고 물어보더군요. 불안해하는 얼굴이었어요.
한참을 뜸을 뜰이더군요. 결국은 제가 먼저 말을 꺼냈어요. DD를 만나러왔는데 왜 만나지 못하게 하느냐구요, 혹시 병원같은데 가 있는 게 아니냐고 그랬어요. 틀리길 바랬던 그 생각이 맞았나봐요. 병원에 있어서 나올 수가 없다고 그러더군요. 그럼, 얼굴이라도 보게 해달라며 제가 그랬어요. 어제 절 만나러 대구까지 내려왔었는데 멀쩡하더라구, 근데 왜 오늘은 병원에 가 있냐구요. 그때까지만 해도 전 그냥 군대에서 말하는 구타같은 걸로 병원에 들어가 있거나 저와 면회가 못되고 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 상병에게 단단히 화가 나있었죠.
"어제요?" 그 남자는 믿을 수가 없다는 투로 말하더군요. 그리고 계속 말을 이었어요. "그친구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은 후부터는 생활하는 것 자체가 무기력해지더군요. 그러다가 결국 어제 수류탄 사고가 나서.......죽었습니다. 자살할 생각이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지만요...어젯밤에 10시 30분경이었어요. 낮에 병원에 실려온 후부터 계속 혼수상태더니..... 온 몸이 점점 식어가더군요. 입원실의 방의 온도를 계속 높이고 주사를 놓았지만 체온이점점떨어졌고.....피는계속흘렀어요. 결국.....죽기 전에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는.....웃는 표정 이었어요. 마치 눈앞에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보고있는 것 같았어요." 라구요.....
네, 그래요. 여기서 제 이야기는 끝이 나요. 그리고 그날밤의 그렇게도 눈이 많이 내렸던 날의 밤의 그 애가 제게 해준 키스가 저의 첫키스였어요. 그때 아마 제가 따라간다고 말했다면 그 앤 절 데리고 갔었을까요? 그 앤 정말로 절 데려 갈려고 그 곳까지 찾아왔던 거였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