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애송시 (한용운편)

아시나요항공 작성일 06.04.17 21:2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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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침묵

님은 갔읍니다. 아아 나의 사랑하는 님은 갔읍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읍니다.
황금의 꽃깥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 갔읍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읍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 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읍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 부었읍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읍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나룻배와 행인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았읍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읍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꽃 싸움

당신은 두견화를 심으실 때에 꽃이 피거든 꽃싸움하자고 나에게
말하였읍니다.
꽃은 피어서 시들어가는데 당신은 옛 맹세를 잊으시고 아니 오십니다.

나는 한 손에 붉은 꽃수염울 가지고 한 손에 흰 꽃수염을 가지고
꽃 싸움을 하여서 이기는 것은 당신이라 하고 지는 것은 내가 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당신을 만나서 꽃싸움을 하게 되면 나는 붉은 꽃수염울
가지고 당신은 흰 꽃수염을 가지게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나에게 번번히 지십니다.
그것은 내가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나에게 지기를 기뻐하는 까닭입니다.
번번히 이긴 나는 당신에게 우승의 상을 달라고 조르겠읍니다.
그러면 당신은 빙긋이 웃으며 나의 뺨에 입맞추겠읍니다.
꽃은 피어서 시들어 가는데 당신은 옛 맹세를 잊으시고 아니오십니다.


한용운. 1879 - 1944. 충남 홍성 출생. 호는 만해. 3.1운동 당시 불교계
민족 대표 중의 한 사람. 타고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시작 전편을 통해 불교적인 사상이 개진되고 있다.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개혁자로서 또한, 위대한 민족 운동가로서 실천한 민족시인이었다.
시집으로 과 소설 및 저서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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