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영희는 무거운 도시락 걱정에 마음이 어두웠다. 오늘도 도시락을 다 먹지 않고 남겨 온다고 엄마의 꾸증을 들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너는 왜 내 마음을 몰라 주니? 내가 이 도시락 반찬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아니? 우리 때는 이렇게 좋은 도시락은 구경도 못했다. 반찬만 해도 그렇지. 이렇게 맛있는 것이 어디 있니? 거의가 김치나 단무지였고, 잘 사는 집이래야 멸치 볶음이 고작이었지. 소풍날이래야 삶은 계란을 맛 볼 정도였어. 아니, 없는 아이들은 숫제 남들이 도시락을 풀 때면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곤 했지. 도시락을 가지고 올 형편이 못 되어서 굶었던 거야."
영희는 지레 엄마의 잔소리를 떠올리고는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속마음 같아서는 도시락의 남은 밥과 반찬을 어디 사람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다 쏟아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아이들은 못 먹어서 죽어 간다는 선생님의 말이 생각나서 그냥 뚜벅뚜벅 걸었다. 영희는 낮에 선주가 피자 먹자고 유혹하지만 않았더라면 하는 아쉬운 탓을 해보기도 했으나, 그것도 핑계밖에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이내 알았다. 영희의 한 가닥 기대는 오직 엄마가 집에 있어 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면 설거지를 해서 깨끗이 치워 놓을 텐데... 사실 외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해 계시기 때문에 요즈음은 집을 비우는 일이 많은 엄마였다. 그러나 영희가 은근히 바란 것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관에 들어서는 영희의 눈에는 소파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엄마의 뒷모습이 비쳐 들었다. 영희는 마루 위로 올라서며 조용히 말했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엄마는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그래, 날이 벌써 더워지지? 어서 좀 씻으렴." 영희는 살며시 도시락을 식탁 밑으로 밀어 넣었다. 엄마의 목소리가 다시 건너왔다. "오늘도 도시락을 다 먹지 않은 모양이지?" "어찌 아셨어요, 엄마?" "넌 도시락을 다 비운 날은 식탁 위에다 올리는데 남긴 날은 식탁 밑에다 놓아 두는 버릇이 있거든." "그게 아니고 엄마, 선주가 오늘이 제 생일이라고 피자를 사주어서..." "그래, 알았다. 그런 날도 있을 테지." 오늘은 의외로 엄마가 너그러워서 영희의 걱정을 활짝 걷히게 했다.
영희는 제 책상 위에 가방을 놓아 두고 나오다가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볼품없는 네모난 양은 그릇을 보았다. "엄마, 이게 뭐예요?" "으응... 그것도 도시락이다." "애걔걔! 이런 도시락도 있어요, 엄마?" "그래, 엄마가 학교 다닐 때는 벤또라고 더 많이 불렀지." "그런데 엄마, 이것이 어디서 났어요?" "우리 집 다락에서 찾아내 왔다." "누구 건데, 엄마?" "내가 학교 다닐 때 쓰던 것을 시집 올 때 가지고 왔지." "엄마! 이런 것을 혼수품이라고 가져왔어요?" 영희가 아무런 생각 없이 한 말인데, 엄마의 얼굴에는 순간 그늘이 덮이고 있었다.
영희는 얼른 세면장으로 들어가서 세수를 했다. "영희야." 엄마가 찾고 있었다. 영희가 나가 보니 엄마는 양은 도시락에 빨간 딸기를 차곡차곡 담고 있었다. "엄마, 부르셨어요?" "그래, 오늘은 병원에 계시는 외할머니한테 함께 가보자. 의사 선생님이 얼마 사시지 못할 것 같다고 하더구나." 영희는 병원이 싫지만 외할머니께서 얼마 살지 못할 것 같다는 말에 놀라서 아무런 대꾸 없이 엄마를 따라 나섰다.
달리는 차 속에서 손수건에 싼 양은 도시락을 만지고 있던 엄마가 영희를 돌아보았다. "영희야, 이야기 하나 해줄까?" "어떤 이야기인데요, 엄마?" "들어 보렴. 그러니까, 벌써 삼십년도 훨씬 넘었구나." 어린 딸과 어머니가 사는 셋방은 둑방 가에 있었다. 어머니가 다니는 시멘트 벽돌 찍어 내는 공장이 가까이에 있어서 이사한 곳이었다. 딸은 전에 살던 산동네보다도 그곳이 좋았다. 봄이면 둑방에 올라가 네잎클로버를 찾으면서 놀았고, 여름이면 질펀하게 피어나는 달맞이꽃을 꺾으면서 놀았다. 한가지 흠이라면, 비가 올 때마다 집안으로 빗물이 넘쳐 흘러들기 때문에 옷 보퉁이를 싸는 일이 있었지만.어머니는 해 뜨기 전부터 벌써 일터로 나가곤 했다. 새벽 밥을 해서 몇 숟갈 들고 일터로 나가 머리로 시멘트 벽돌을 이어서 차에 실어 주는 일을 했다. 어떤 날은 먼 데 있는 아파트 건설 현장까지 날라다 주기도 했다. 그리고는 밤이 늦어 새끼줄에 연탄 몇 장을 꿰어 들고 오기도 했고, 봉지 쌀을 사서 안고 오기도 했다. 그 해에는 장마가 일찍 들이닥쳤다. 옷 보퉁이를 풀 날이 없었다. 그런데 장마보다도 더 큰 걱정거리가 모녀한테 찾아왔다. 시멘트 벽돌 공장 주인이 빚에 쪼들려 밤 사이에 도망가 버렸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일터를 바꾸었지만 그 동안의 품삯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늘 끼니를 걱정했다. 그러나 딸의 학교만은 절대 쉬어선 안 된다며 꼬박꼬박 납부금을 대주었다.
그날도 어머니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밥을 지었다. 그리고는 여느 날과 다름 없이 도시락 둘을 쌌다. 딸은 그날이 마침 당번이어서 도시락을 엄마보다 먼저 챙겨들고 집을 나왔다.
그날 넷째 시간은 체육이었다. 그렇게 체육이 넷째 시간인 날은 셋째 시간이 끝나자마자 도시락을 먹어 치우는 학생들이 많았다. 딸도 당연히 도시락을 풀었다. 그런데 도시락 뚜껑을 무심히 열던 딸은 황급히 도시락 뚜껑을 닫아 책상 속에 밀어 넣고는 밖으로 나왔다. 목이 말라서 수돗가에서 물을 받아 마셨다. 물은 그대로 눈물이 되어 버렸는지 눈으로 펑펑 쏟아져 나왔다. 딸은 체육 선생님한테 몸이 아프다고 꾸며대고는 내내 운동장 가의 잔디밭에 앉아 있었다. 모처럼 갠 푸른 하늘이 그렇게 슬픈 것은 그 때 처음 느꼈다. 딸은 이내 교문을 헐레벌떡 들어오는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의 손에는 일터로 들고 나간 딸의 것과 같은 작은 도시락이 들려 있었다. 딸은 어머니가 도시락을 바꾸어 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데도 얼른 몸이 일으켜지지 않았다. 딸은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그쳐지지 않는 울음을 울 수 밖에 없었다.
영희는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 그 도시락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어요?" 그러나 엄마는 대답이 없었다. "엄마, 그 도시락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냐니까요?" "..." "엄마, 말해 줘요. 그 도시락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어요?" 엄마가 차창 밖으로 얼굴을 돌린 채로 대답했다. "하얀... 하얀 행주가 들어 있었다." '네? 행주가요?" "그래, 밥이 아니라 행주가 든 도시락이었어. 어머니는 ... 시멘트 벽돌을 머리에 이어서 나르는 일을 하는 어머니는, 딸한테는 밥이 든 도시락을 들려 보내고, 당신은 밥 대신 행주를 담아서 들고 다니신 거야." 영희는 엄마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는 병원에 닿을 때까지 아무 말도 안했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환자복을 입은, 앙상하게 마른 외할머니가 영희와 엄마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엄마는 손수건에 싼 양은 도시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어머니, 이 양은 도시락 생각나세요?" 외할머니가 가만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영희는 보았다. "어머니,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딸기 담아 왔어요." 영희는 고개를 돌렸다. 창에 놀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