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은 [군 면제자]다.
생방송 성기노출, 국가기관의 도청등 굵직굵직한 이슈에 비교되긴
어렵겠지만 공적인 책임을 지닌 남성들(연예인, 운동선수, 고위층자녀들)의
군복무 문제는 한국이라고 하는 특수한 상황속에서 언제나 관심을
끌게되는 뉴스가 아닐 수 없다.
건장한 운동선수가 군대를 가지 않는다면 그이유는
대략 세가지 정도로 압축된다.
첫째 아시안게임이나 그에 준하는 아시아권대회에서 우승(혹은금메달)을
하거나 올림픽 혹은 그에 준하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3위이내에
입상한 경우 그 팀 혹은 개인은 국위선양이라는 공로를 인정받아
군복무를 면제받게된다.
둘째 건강함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직업운동선수]들이 건강문제로
군면제를 받는다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겠지만
단단하고 건강할것만 같은 이들의 몸은 우리의 예상외로 고질적인
질병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반복해서 육체단련 및 혹사를 해야하는 그들은 어떤의미에선
정밀한 기계와도 같고 약간의 손상에도 큰 댓가를 치루는 경우가
빈번히 일어난다..
따라서 그들은 첨단의학에 의해 매일매일 체크되고
체계적인 치료와 트레이닝을 반복하지 않으면 정상적인 생활이
당장 어려워 질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첨단 의학의 도움을 받아 당장 움직이는데는
불편한점이 없지만 합법적으론 군면제를 받을 수 있을정도의
육체적문제를 안고사는 경우가 종종 존재한다.
셋째 둘째와 같은 이유로 군면제를 받을 수 있다는점을 악용해서
있지도 않은 질병을 만들어내거나 작은 문제를 과대포장하여
면제의 수단으로 삼는방법이 있다.
물론 이방법은 범죄이며 발각될시에는 법의 엄정한 심판을 받게된다.
그러나 이상훈의 [군면제]이유는 위의 세가지중 어디에도
해당하지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내 최고의 좌완투수였던 이상훈이라면
분명 첫 번째의 이유로 군면제 혜택을 받았을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상훈은 자신의 실력이 만개했던 대학4학년이전까지 이렇다할
국가대표 경험도 국제대회 경험도 갖고있지않다..
그리고 그는 이미 그전에 군면제혜택을 받았다.
[군복무 면제]의 사유중엔 [극빈자]보호를 위한 지침이 있고
이 지침은 가정에 실제적인 경제생활을 할 수 있는 실직적가장이
오직 자신밖에 없을때 해당될 수 있으며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몸이 불편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산동네
단칸방에서 생활해야했던 이상훈은 이 지침에 준하여
[군복무면제]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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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탁월한 운동신경을 지닌 가난한
주인공이 각고의 노력끝에 최고의 스포츠 스타가 되어
엄청난 명예와 부를 누리는 [라이프 스토리]를
심심찮게 접할 수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현실속에서의 일이며 클럽차원의 학원스포츠가
잘 발달해있는 외국에서는 종종 현실이 되기도 하지만
열악한 한국 스포츠계에선
거의 실현 불가능한 판타지 같은 이야기이다.
철저하게 [엘리트 스포츠]를 지향하는 한국의 사회에서
운동을 하는 자녀를 상위학교(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고등학교에서
다시 대학교로..)로 진학시키기 위해 엄청난 로비자금이 오고간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며 이외에도 개인이 사용하는 운동도구 구입비용이라던지
합숙비등 자녀를 운동선수로 키운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자녀를 교육시켜
대학에 진학시키는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비용지출을 감수해야만
가능한 일이기에 어느정도 경제적 여유가 뒷받침 되는 집의 자녀들이
아니라면 운동을 시작하기도 또 계속 해나가기도 쉽지않은것이
한국학원스포츠의 실상인 것이다.
나는[아마추어]시절의 이상훈에 대해서 잘알지 못하는 관계로
그가 어떠한 방법으로 이런문제를 해결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못한다.
그가 중고교시절부터 엄청난 두각을 나타내는 독보적인 존재였다면
간단히 설명이 되겠지만(그럴경우에는 돈에 관계없이 각 학교에서
스카웃을 하려고 난리를 칠테니까..) 당시의 이상훈은 결코 그런레벨의
선수가 아니었다.
어쨌든 이상훈은 무사히 중고교를 지나 대학까지 진학할 수 있었고
일반적으로도 그렇치만 스포츠쪽에서도 명문대학이라 할 수 있는
[고려대]에 진학하게 된다.
그곳에서 이상훈은 장차 자신을 따라다니게 될 여러 가지 별명중에
하나를 얻게되는데 바로[빠삐용]이라는 별명이다.
[빠삐용]은 6-70년대를 대표하는 유명한 [OLD MOVIE]로 절대
탈옥이 불가하다는 [철벽의감옥]에서 수십번이나 탈옥을 시도한
[빠삐용]이라는 죄수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인데
이상훈은 고려대 재학시절 합숙소 무단이탈 및 잠적을 셀수도
없이 감행했으며 이런 전력 때문에 감독이나 동료들은
그를 [빠삐용]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하고싶은일도 많고 놀거리도 많은 혈기왕성한 시절에
휴일도 없이 운동장과 합숙소에만 박혀있어야 하는 생활이
분명 견디기 쉬운일은 아니겠지만
엄격한 규칙적용과 협동정신을 전제로 하는 팀스포츠에서
이러한 일탈행위는 분명 잘못이며 이렇게 팀의 질서를 어지럽
히는 선수라면 열 번을 제적당하더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
지만 이상훈은 단한번도 처벌을 받지 않았는데 그것은
이상훈의 일탈의 이유가 기존의 이유들과는 다른 이유였기 때문이다.
고려대의 (고)최남수 감독이 이상훈을 데려온곳은 나이트클럽도
유흥주점도 아닌 건설현장이나 동대문의 새벽 시장이었다.
이상훈에겐 절실한의미로 [돈]이 필요했고 그것은 만약 야구로
성공하게 된다면 벌수있게될 불확실한 미래의 거금이 아닌
지금당장 어머니에게 쌀을 사다드릴 수 있는 현실의 [몇만원]
이었던 것이다.
이런 이상훈의 집안사정을 잘아는 (고)최남수감독은 아무말
하지 않고 그의 행동을 묵인하고 이해했으며 이상훈을 제적
시키려했던 학교측에 맞서 그의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다.
(2002년 한국으로 복귀후 팬들과의 만남자리에서 이상훈은
화제가 되었던 긴머리 헤어스타일에 대해 “내가머리를
기르는 이유는 자르기가 싫기 때문이다 내몸의 일부가 잘려
나간다는 느낌은 나를 견딜 수 없게한다“라고 이야기하면서
“만약 내머리를 자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돌아가신
(고)최남수 감독님뿐이시다“라며 자신의 방황기를 묵묵히
보살펴준 은사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기도 했다.)
다음에 계속....
임수혁과 이상훈..
글의 이해를 돕기위해 우선 임수혁선수(이하임수혁)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임수혁은 1969년생으로 이상훈의 고려대 1년선배로 그의 포지션은 포수이며
졸업 후 부산을 연고지로하는 롯데자이언츠에 92년입단해 주전포수로
꾸준한 활약을보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상훈이 미국에서 선수생활을 하던 2000년 4월18일
LG와의 잠실 원정경기도중 갑작스런 심장발작을 일으키며 의식을 잃은후
아직도 그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응급처지시설이 제대로 갖추어
지지 않아 더 큰 사고로 이어졌던 이사건 이후 국내의 모든 프로스포츠경기는
경기장옆에 앰블란스를 대기해두는 것이 의무화 되었다)
임수혁은 대부분의 포수가 그러하듯 호탕하고 넉살좋은 성격을 지닌사람
이었고 그러한 그를 싫어하는 동료나 후배는 아무도 없었다.
특히나 바늘과 실이라고 표현되는 투수와 포수였던만큼 같은학교의
1년터울 배터리(투수와포수를 지칭하는 야구용어) 이상훈과 임수혁은
남다른 우정을 과시했고 이상훈의 ‘빠삐용일지’에는 이례적으로
임수혁과 관련된 경우가 있었다.
대학시절 임수혁의 가정에 좋지못한 일들이 연속해서 생겼는데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여 위기를 맞고 설상가상으로 어머니까지
병을얻어 몸져 누우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일들을 당장 해결할 능력이 있을리 없는 임수혁은
흔들리는 마음을 추스르며 겨우겨우 운동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그일이 벌어진 후 엉뚱하게도 이상훈이 [잠적]을 해버린 것이다.
이상훈의 [탈출]은 어떤의미에선 일상적인 것이었고 동료들은
그저 ‘저녀석 또 병이 도졌구나’하는 정도로 여겨버렸다.
그렇게 한달보름여가 지난 어느날 이상훈은 운동을 할때보다
더 새카매진 모습으로 학교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상훈은 1년선배 임수혁을 조용히 찾아가 흰봉투하나를
건넸다.
“형 내가 해줄수있는게 이것밖에 없수..그리구 운동 열심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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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흰봉투안엔 이상훈이 45일간 건설현장 부산자갈치시장등에서
노동력을 제공하고 받은 보수가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이 사건이후 둘의 관계는 더욱 두터워져 부모님끼리도
서로 왕래하며 지낼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졸업 후
프로에 지명을 받은 두사람은 각각 LG와롯데에서 뛰게
되면서 선의의 경쟁자로 돌아섰지만 둘의 우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2000년 4월 임수혁에게 닥친 불행한 사고이후 많은손길들이
임수혁을 돕기위해 노력했다. 선수협회는 병원비를 마련하기위해
자선행사등을 벌였으며 구대성선수 같은경우는 일본에서 받은
연봉중 일부를 떼어 2000만원을 성금으로 보내기도 했다.
언론에서는 이런미담들을 집중보도하며 더 많은사람이
임수혁 돕기에 동참할 수 있도록 여론몰이에 나섰고
임수혁은 금방이라도 의식을 회복할 듯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도 임수혁은 의식불명상태로
일어나지 못하고 있고 이제는 선수협도 언론도...임수혁의
존재를 잊어가고 있다 (물론 지금도 1년에 한차례정도
임수혁 돕기를 위한 야구스타의 경매행사등은 진행되어
그 명맥은 유지하고 있다)
임수혁이 뛰었던 롯데구단은 더 이상 임수혁의 병원비를
지불해야 하는가 고민하며 이책임을 당시의 상대팀이자
의료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않았던 홈팀 엘지측에 떠
넘기려 하고 있고 이에 엘지구단은 법원에 소송을 내어
‘엘지’가 ‘임수혁’의 병원비를 지불할 의무는 없다라는
판결을 받아내었다(참 장하구나...)
임수혁이 쓰러졌을때 이상훈의 이름은 언론에 오르내리지
않았다.
당시 이상훈은 미국에 있었고 메이저리그라는 최강의
세계에서 살아남기위해 다른일에 신경을 쓸만한 여유가
없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훈은 임수혁의 사고가 일어났던 2000년 4월이후
매월 임수혁 가족의 생활비를 자신의 어머니를 통해
전달하고 있다 ...
대학시절 아무도 모르게 건넸던 그때의 흰봉투처럼...
PS. 임수혁의 사고이후 꼭 2년만이었던 2002년 4월18일
이상훈은 미국에서의 선수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복귀하였다.
국내무대에 다시 서기위해 일체의 연락을 끊고
일체의 여가활동없이 2군연습장에서 오직 훈련 또 훈련
에 매진했던 이상훈이 유일하게 연습장을 벗어난때는
임수혁의 병문안을 갈때뿐이었다고 한다.
네이버 테일러님 블로그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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