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카닥 기타동영상에 5.18관련 동영상이 올라온걸 보았습니다
찰카닥 메인에 진압군과 맨뒷쪽 진압경찰들의 모습도 보이구요..
혹시나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봐 글을 남깁니다
안병하 전남도 경찰국장을 알고 계십니까..
그분에 대한글을 남기고자 합니다
안병하 도국장님은 육사 8기생(김종필 민자당대표위원, 윤흥정 5·18당시 호남지역 계엄사령관 등과 육사 동기)이었다. 5·16때 경찰로 들어가 강원도경국장과 경기도경국장을 거쳐, 79년 2월 20일 전남도경국장으로 부임했고 치안본부장 자리가 바로 코앞에 다가와 있었고 그만큼 탄탄하게 공직생활을 해오던 터였습니다
하지만 80년 5월 그는 5.18이라는 역사적인 순간을 맞습니다
그는 5.18 당시 경찰관들에게 진압방침을 내립니다
데모 저지에 임하는 경찰의 방침’
·절대 희생자가 발생않도록(경찰의 희생자 있더라도)일반 시민 피해 없도록
·주동자 외는 연행치 말 것(교내서 연행금지)
·경찰봉 사용 유의(반말, 욕설엄금)
·주동자 연행시 지휘보고(식사 등 유의)
하지만 계엄군은 안병하 도국장님에게 경찰 발포명령을 내립니다
이에 도국장님은 거부 의사를 밝히게 되죠..사격절대불가...
더 이상 경찰이 역사의 죄인이 돼서는 안된다. 당신 한몸 희생해서 무고한 광주시민의 생명을 해치지 않고 나아가 경찰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을 수만 있다면……’하는 생각에서 그런 선택을 하셨습니다(광주비망록중..)
하지만 이는 80년 5월 26일 ‘직무유기’라는, 공직자로서는 씻을 수 없는 ‘명예훼손’과 함께 연행. 고문, 사직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5·18과 관련해 책임선상에 있었던 공직자 중 누구도 그만큼 책임추궁을 당하지 않았고 스스로 도덕적 책임도 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신군부에 협조했던 상당수의 인사는 5·6공 아래에서 출세가도를 달렸고 그들은 지금도 광주의 진실에 대해서 ‘함구’하고 있었고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안병하 국장의 당시 행적은 그들과 극명하게 대비를 이룹니다
그의 결단력은 경찰간부가 광주시민 편을 든다는 이유로 계엄군에게 심하게 구타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반대로 광주시민들은 경찰서가 파괴되지 않도록 항쟁기간 동안 시민군이 철저하게 보초까지 섰으며 80년 5월 24일 상무대에 경찰지휘본부를 설치했던 안 국장이 임무수행을 위해 직접 도경에 들어가보니 ‘경찰국장실의 명패, 모자, 정복, 서류 등은 물론 관사도 그대로 보존돼 있어 깜짝 놀랐다’고 육필원고에 적었습니다
만약 그때 안국장이 계엄군의 지시대로 발포를 명령했더라면 경찰 손에 의해 많은 시민들이 희생됐을 것이고, 경찰은 영원히 오명을 씻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당시 경찰들은 입을 모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군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다는 이유로 모진고문을 당하고 연행되었던 치안본부에서 나오면서부터 그는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었고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오랜 공직생활에도 불구하고 청렴한 그의 성격 때문이었는지 재산이라곤 서울 방배동 집 한 채가 고작이었고 밑빠진 독에 물 붓듯이 들어가는 치료비 때문에 오래지 않아 그 집마저 팔아치워야 했습니다 4천만원만 있으면 신장이식 수술이 가능해 정상인으로 생활할 수 있다는 의사의 언질도 있었지만 그 돈을 마련할 길이 없었습니다
결국 무능한 존재..직무유기라는 공직생활의 불명예를 안고 단칸방에서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통받다 88년10월 숨을 거두셨습니다
가족들에게는 유언으로 신 군부에 동조하지 않은 자신의 판단이 옳았으며, 언젠가는 역사가 나를 알아줄 날이 반드시 올 것이며, 가족들 모두 국립묘지로 나를 반기러 오는 날이 올 것으로 믿는다는 말씀을 남겼다고 합니다.
후에 몇번의 민주화운동 희생자로 신청되었지만 매번 기각되었습니다..
우리의 무관심속에 진정 국립묘지에 묻히실분은 쓸쓸이 어느 산귀퉁이에서 자리를 하고 계셨고 5.18의 군부책임자들은 국립묘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005년에서야 국립묘지로 이장하셨고..2006년 순직경찰로 인정받으셨습니다...
5.18 이후 25년이 지난후에서야...불명예를 벗으실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고통속에서 살았지만 자식이나 후세들이 그 분에 대해 ‘무능한 공무원’이 아니라 ‘자랑스런 민주경찰의 표상’으로 여겨주었으면 더 바랄 게 없다는 가족분의 말씀이 더욱더 쓸쓸하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