퓰리처상 역대 수상작

디지털_러브 작성일 07.10.18 02: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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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morial day(전몰장병기념일)에 한 여인이 남편의 묘비를 부여잡고 오열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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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philadelphia inquirer(필라델피아 인퀴어러)의 톰 그랠리쉬, 1986년
               홈리스들의 사회적 문제를 사진에 담아 1986년 피쳐사진부분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이 사진은 그 사진들중 가장 함축적으로 당시 사회문제를 보여주고 있는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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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탠그로스펠드, 1985년 수상.
84년 가을 수단의 난민 수용소에서 굶주림에 지친 이디오피아인 모녀가 식량 배급을 기다리고 있다. 수십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아프리카 대륙의 기아는 이날 저녁 이 소녀의 목숨마저 앗아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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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 로젠탈 ( joe rosenthal ) 1945년 수상.

 일본군 2만여명의 자결 옥쇄와 미군 2만 4천8백명의 사상자를 기록한 제 2차세계대전 최대의 격전지 유황도는 일본의 도꾜에서 650마일 정도 남쪽에 위, 태평양 전략상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1945년, 미국은 국가의 운명을 걸고 전쟁이 종지부를 찍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미국은 도꾜와 유황도를 동시에 급습하기 위해 유황도 탈환을 위한 전면 공격을 개시했다. 72일 동안 계속된 공격으로 섬은 초토화되었으나 동굴 요새에 숨은 2만 3천명의 일본군을 찾아내는 데는 실패했다.
  2월 19일 미해병 4사단과 5사단이 유황도 일각에 상륙, 길을 뚫었고 산 전체를 포위하는 데에는 나흘이 걸렸다. 유황도는 6천8백21 구의 산산조각난 시체와 1만 9천2백17명의 부상병들로 가득했다.
  2월 23일 아침, 적탄이 날아오는 위험 속에서 28연대 제2보병대대 e중대는 성조기를 내걸기 위해 거칠고 험준한 산비탈을 오르기 시작했다. 통신사의 사진기자 조 로젠탈은 갑판장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상륙부대를 따라 섬에 올랐다. 그는 다른 사진기자들과 함께 지뢰밭을 뚫고 전진, 여섯명의 해병들이 격전의 종식을 상징하는 성조기를 유황도 스리바치산 산정에 꽂는 장면을 촬영했다. 이 여섯 명 중 두명은 그 직후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이 한 장의 사진은 미국의 모든 것. 즉 미국민의 자부심과 용기와 희생을 말해 준다. 사실상 이 깃발은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승리를 알리는 동시에 전쟁이 끝났음을 말해 주는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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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와다 교이찌, 1966 수상
 1960년대 중반, 베트남 전쟁이 한창 치열할 때 upi통신사의 사진기자로 종군한 사와다 교이찌는 전쟁의 와중에서 신음하는 베트남 국민들의 처참한 실상을 촬영했다. 이 사진은 그 중의 하나로 퀴논 부근에서 월남인 어머니와 어린이들이 미군기의 폭격을 받고 있는 마을에서 탈출, 필사적으로 강을 건너는 긴박한 상황을 포착한 것이다.
 죽음의 공포 분위기가 감도는 전장속에서 안전한 곳으로 도피하려는 인간의 본능적인 몸부림과, 강인한 모성애가 휴머니스틱하게 표현된 이 사진은 사와다에게 1966년도 퓰리처상을 안겨 주었다.
사와다는 그후 사진의 주인공인 모자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몹시 궁금해 했다. 전선을 차ㅊ아 1년을 해메던 끝에 그는 그 주인공들과 극적인 상봉을 했다. 비교적 평화롭게 살고 있는 이들에게 그는 퓰리처상의 상금을 몽땅 털어 약 1년분의 생활비를 쥐어 주고 행운을 빌어 주었다.
 사와다는 그후 미군을 따라 종군하다가 1970년 캄보디아 전선에서 전사했다. 피묻은 그의 종군기자증이 그의 시체 옆에서 발견되었다. 한 장의 역사적인 사진을 남기기 위해서 전쟁터에서 활약하다가 죽은 사진기자는 많이 있었다. 그러나 사와다처럼 따뜻한 인간애를 지닌 멋진 사진기자는 없었을 것이다.
 1942년 퓰리처 사진 부문상이 제정된 이래 세 명의 일본인 사진기자가 수상을 했다. 그 중 한 사람인 사와다는 그의 사진과 함께 생생한 역사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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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콩 닉 웃 ( hyun cong nich ut ), 1973 수상

 전쟁의 아픔, 전쟁의 고통, 전쟁의 비극을 이 한 장의 사진만큼 실감나게 말해 줄 수 있을까? 베트남 공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거리로 밀려나온 민간인들, 그 중의 한 소녀가 불타는 옷을 찢어 던지고 벌거벗은 몸으로 공포에 떨며 울부짖으며 내달리고 있다. 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1972년 6월 8일의 일이다. 베트남 육군은 트랭 방에서 수도로 이어지는 1번 국도를 탈환하기 위해 사흘 동안 맹공을 퍼부었다. 그러나 베트공의 저항이 완강하자 남부 베트남 공군의 지원을 요청했다. 공군의 전폭기들은 트랭 방으로 이어지는 1번 국도 위를 저공 비행하며 빗자루를 쓸듯이 공격해 왔다.
  세상을 온통 녹일듯이 불비가 쏟아져 내렸다. 판 틴 킴 퍽이라는 사진 속의 소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소이탄으로 불바다가 되어 버린 마을에서 벗어나 달려나오고 있었다. 달리며 울부짖는 것만이 뼈저린 공포로 부터 탈출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이 처참한 순간을 베트남 종군 기자인 현 콩 닉 웃이 포착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장해 온 그는, 전쟁에 무감각해진 미국인들에게 깊은 감동과 충격을 준 끔찍한 순간을 기록한 것이다. 그가 찍은 이 사진은 베트남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데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벌거숭이로 울부짖던 사진 속의 소녀는 1982년, 20세의 숙녀가 되던 해에 미국 cbs 텔레비젼에 출연, 처참했던 베트남전의 역사를 증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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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lliam c. beall, 1958 수상

 무엇인가를 구경하느라 한곳으로 시선이 몰린 군중들 틈에서 소년과 경찰이 함께 나누는 정다운 눈짓. 어린이의 인격을 존중하는 경찰관의 정중한 태도와 애정과 믿음이 듬뿍 담긴 눈으로 경찰관을 올려다보는 소년의 모습은 그때까지 <워싱턴 뉴스>지에 게재되었던 그 어떤 사진보다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고 전해진다.
  알렌 웨버라는 이 소년은 중국 상인 연합회의 가두 행렬을 보기 위해 중국인 거리인 위싱턴의 모리스 컬리네인에 서 있었다. 빨강, 노랑, 무지개 빛깔등 색색깔의 가면들과 연, 종이, 호랑이 등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했고, 불꽃놀이는 하늘 위에 가지가지 색깔의 섬광을 뿌려댔다. 이 모든 것에 매혹된 알렌은 마치 최면술에 걸린 듯 온통 정신을 빼앗겨 그쪽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전에는 이런 거리 풍경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길가에 인산인해를 이룬 구경군들 역시 가두 행진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이때 한 경찰관이 작은 물체 하나가, 폭죽이 터지고 교통이 혼잡한 도로로 걸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달려간 경찰관과 소년의 눈이 마주쳤다. 모험심이 많은 어린 알렌은 길고 높은 기둥같은 경찰관의 다리 위를 올려다보고, 경찰은 허리를 굽혀 작은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이때 거리에 나왔던 사진가 william c. beall은 그 순간을 목격하자마자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장면은 정지된 순간으로 남아 늘 우리에게 따뜻함을 전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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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빈 카터 (kevin carter)

 아요드의 식량 센터로 가는 도중에 힘이 다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는 소녀. 그 뒤로 소녀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독수리. 이 사진은 전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한편, 사진가의 윤리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촬영하기보다는 소녀를 먼저 구했어야 했다는 비판과, 사진이 가진 사회적인 영향력에 관해서였다. 항상 강렬한 감정에 몰려 극한의 세계를 취재해 온 카터는 자신이 찍은 다양한 현실의 공포를 가슴 밑바닥에 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3살의 젊은 나이에.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국토를 가진 수단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심각하고도 장기적인 위기에 처해 있다. 민족과 종교적인 대립 때문에 벌어진 내전이 오랜 기간동안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뭄과 전*까지 겹쳐 198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 1백만 명 이상이 죽었다. 국제적이고 인도적인 차원의 원조 프로그램도 독재정권 아래에서는 거의 제 기능을 못하고, 구조식량은 기아에 허덕이는 난민에게는 좀처럼 전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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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타니엘 파인 1949년 수상.

 미국 프로야구 선수 생활중 통산 714개의 홈런을 친 홈런왕 베이브루스의 은퇴기념식. 양키즈 스타디움을 떠나는 국민적 영웅 루스, 말년에 병에 걸려 한쪽 다리가 불편함으로 그의 영원한 친구인 배트를 의지삼아 그라운드에 서있는 루스의 마지막 모습을 등번호 3번과 동료들 그리고 관중을 배경으로 넣어 역사적인 분위기를 살린 이 사진으로 나타니엘 파인은 1949년 퓰리처 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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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스시 나가오, 1961 수상 

 도쿄의 하비야 홀에서 다음 달에 있을 국회의원 선거 유세가 시작되기 전 3다의 정치적 논쟁을 관람하기 위해 3천명이 모여 있었다.. <마이니찌>의 간부 사진기자인 야스시 나가오는 텔레비젼 카메라맨들과 다른 신문사 사진기자들과 취재를 하고 있었다.. 연사 대기석에서 불과 15피트 떨어진 곳에 있는 나가오는 이미 필름 한 통을 다 찍어 버린 후 였다..
 사회당 당수인 이네지로 아사누마가 연단에 나와 자유민주당과 미국과 일본간의 안보 협정을 헐뜯었다. 연설 시작 몇 분 후에 한 무리의 극우파 학생들이 야유를 보냈지만, 학생들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설을 계속했다..
 사진기자들은 소란의 현장으로 달려갔으나 나가오는 필름이 한 장 밖에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기다렸다. 이떼 유세상 반대쪽에서 갈색 막대기를 든 그림자가 연단으로 달려들었다. 아사누마가 달려드는 대학생에게로 돌아서자 그 학생은 긴 칼로 그의 복부를 깊이 찔렀다. 아사누마가 비틀거리며 연단에서 몇 걸음 물러서자 칼이 다시 그의 가슴을 찔렀다. 연단 바로 옆에 서있던 나가오 기자는 마지막 남은 한 장의 필름으로 두 번째 습격의 칼날을 빼는 순간 셔터를 눌렀다.
 바닥에 넘어진 아사누마는 곧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숨을 거뒀다. 1960년 10월 12일, 칼로 저지른 암살은 사무라이 정신이라는, 별로 오래되지 않은 과거 일본 봉건제도의 기념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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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스 데스퍼 ( max desfor ) 1951 수상

 우리는 민족의 비극이었던 6.25를 결코 잊을 수 없다. 여기 괴물처럼 버티고 선 철교위를 개미떼처럼 기어 올라가는 피난민의 대열이 바로그 비극을 말없이 전해주고 있다
  1950년의 극심하게 추운 겨울, 국경선인 압록강까지 전격했던 유엔군은 수십만 명의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남쪽으로 퇴각하고 있었다. 퇴각하던 유엔군이 평양에 도착했을 때 평양은 처참한 생지옥이었다. 수많은 평양 시민들이 공포에 쫓겨 남쪽으로의 피난길에 올랐다. 남쪽으로 가려면 반드시 강을 건너야 했는데, 그 유일한 길이 바로 폭격으로 부서진 다리뿐이었다.
  보기 흉하게 뒤틀어진 다리가 얼어붙은 강물 위에서 위험하게 흔들거렸다. 이런 다리 위를 기어가는 피난민의 모습은 마치 개미떼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개미가 아닌 인간, 가엾은 농부들이었다. 다리가 얼어붙고 손이 쩍쩍 달라붙는 추위속에서 기어가던 많은 사람들이 얼어붙은 강물 속으로 미끄러져 떨어져 버렸다.
  강위에 부교를 띄우고 강을 건너간 군인들 가운데에서 뒤를 돌아보는 한 남자가 있었다. 통신사의 사진기자 막스 데스퍼였다. 그는 폭격당해 부서진 다리의 쇳조각들 위로 기어올라가 전쟁이 몰고 온 비참한 광경을 촬영했다. 맞은 편 강변에 수천명의 피난민들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혹한 속에서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전쟁 종군 기자인 그는 그날을 이렇게 말했다.

  "내가 비록 전쟁에 강해져 있지만 이 광경은 이제껏 내가 보아 온 것 중 가장 비참한 장면이었다."

 

  (흔히들 한강다리라고 오해하는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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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샐 비더 ( sal veder ), 1974년 수상 
 1973년 베트남 전쟁이 끝나자 윌맹군의 포로가 되었던 수많은 미국 병사들이 꿈속에서 그리던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5년 동안 포로수용소에서 온갖 수모를 다 겪으며 갇혀 있던 미공군 중령 로버트 스텀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통신사의 사진기자 샐 비더는 캘리포니아 드래피스 공군 기지에서 스텀 중령의 가족과 함께 그를 태운 수송기가 도착하기를 초초하게 기다렸다. 마침내 비행기가 도착하고 스텀 중령이 트랩을 내려서는 순간, 가족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그에게 달려갔다. 큰딸이 양팔을 크게 벌리고 아빠의 품으로 뛰어들고 그 뒤를 이어 장남, 둘째딸, 부인 그리고 둘째 아들이 뛰어들었다.
  참으로 감격적이며 극적인 순간이다. 이 사진은 더 이상의 설명이 없어도 기쁨에 넘친 감정을 충격적으로 공감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왜 인류가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눈물겹게 말해 주고 있다. 만약 스텀 중령이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면 이 기쁨의 표정은 슬픔과 절망으로 얼룩지지 않았겠는가.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감동깊게 서술해 주고 있는 사진이다.
  샐 비더는 스텀 중령이 가족과 재회하는 기쁨의 순간을 결정적인 셔텨 찬스로 포착하여 1974년도 퓰리처상을 받았다.
  이 사진은 인간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진실한 횐희의 표정을 담았으며, 아울러 사진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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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수상작중 하나. 멕시코 남부 시골마을에서 한 소년소녀가 말을 타고 달리는 사진을 기차 안에서 촬영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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