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밤 지갑을 주웠다

카타부라 작성일 08.12.05 12:44:12
댓글 1조회 703추천 1
이건 내일 경찰서에 가져다 줄 오늘 주은 지갑주제로 한 실화이다.
오늘 돌려줄 예정이니 따뜻한 글일꺼라 믿고 올립니다.
오랜만에 생긴 에피소드라 글로 남기고 싶어 작성해 버렸습니다.
읽으실 분의 재미를 위해 약간의 각색이 더해졌습니다.
****

하루 일과가 끝난 2008년 11월 28일 밤 11시반경.
나는 개봉역에서 내려서, 언제나처럼 06번 버스에 올랐다.

-삑-

-환승입니다-

'자리가 있나?'

앞자리 1인석의 아줌마 한분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아 자리도 많은데 넓은 뒷자리로 가야지~'

하며 룰라랄라~ 뒷자리로 가는데..

!!

이럴수가, 넓은 자리에 앉을 생각으로 즐거워진 내가 앉을 자리에
다소곳이 놓여진 지갑이 있었다.

일단 지갑을 옆에 두고 털썩 앉았다.
그리고 머리 속에서 여러 생각이 스쳐갔다.


- 이걸 주워야 하나?
- 주운 다음엔 어떤 표정을 지을까?
- 정거장 주변에 지갑을 잃고 헤메는 사람이 있나 볼까... 아니야 둘러 보는 건 도둑이나 하는 행동 아닌가?
- 내가 어느새 때가 많이 타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걸까? 주워서 돌려줘야겠단 마음이 앞선다.
- 하긴 뭐.. 주워서 주인 찾아주겠다는데, 결국 누군가는 주워서 돌려줘야 하는건데.
- 지갑 디자인이 깔끔한데, 지갑속에 사진이 있을까?
- 크리스마스도 가깝고 몇년째 솔론데, 혹시 영화에서처럼 이 지갑의 주인공과 사귀게 되는 거 아닐까?
- 못생긴 여자면 어떡하지?
- 냉정한 사회라고 변명하며 그냥 돈만 챙기고, 지갑만 돌려줄까?
- 경찰에 가서, 길에서 지갑 주웠는데.. 속에 내용물은 텅~ 비었더라 하면...
- 가만, 돈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잖아
- 아껴쓰고 절약하며 살아온지 오랜시간. 이건 신이 내게 용돈을 주신건지도 몰라!!
- 어떡하지? 지하철에서 내린 사람들이 버스를 향해 오고있어..!

얼마전에 본 원티드가 떠올랐을 정도로 몇초를 마치 몇십분처럼 쓰며 많은 생각이 스친다.
그리고.. 어느새 지갑을 손에 들고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젠 어떡하지?

- 내용물을 볼까? 아니야... 부자연스럽다.. 자기 지갑 내용물을 살피는 사람이 어디있겠어
- 험한세상, 지갑 주워주려다 절도죄로 걸려버리는건 아닐까? 아니지.. 난 경찰서에 가져다 줄거라구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눈은 어느새 지갑 주인이 주변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순간...나는 버스 안 cctv가 맞은편에 앉아있는 내쪽을 향하고 있는 모습을 뒤늦게 발견했다.


- 우왓-! 도둑질을 하다가 걸린것 같아..! 아무리 기계라지만 저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니!


황급히 자리를 옮겨 cctv가 나를 향하지 않는다는걸 확인하면서 혼란스러웠던 머릿속
마침내 깔끔하게 정리되어, 내일 바로 지갑을 돌려주기로 결론지었다.

내 좌뇌와 우뇌가 타협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어차피 누군가는 지갑을 주워서 주인 돌려줘야 한다.

2) 돈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흔들리지 않는다.
난 지갑속에 모든걸 어떻게 해서든 주인에게 돌려줄꺼야...

3) 험악한 세상... 다른 사람이 주우면 돈을 빼가고 모른척 할수도 있겠지..
그리고 지갑 잃어버린 친구를 봐서 잘 안다.. 돈은 둘째치고... 그 안에 각종카드랑
신분증 잃어버리면 정말 앞이 캄캄하다더라...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나는 지갑속을 열어 내용물을 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열자마자 여자증명사진이 보여져왔다!!

- 우왓- !

그것도 꽤나 미인 !!

- 이거.. 역시 여자분의 지갑이었나...!

카드가 빼곡히 들어가있고 현금은 7천원.

- 학생인가. 아니, 어쩌면 알뜰하게 사는 사람일지도 모르지.

사진은 그렇다쳐도 본인신분을 확인할 무언가가 없었다.

- 민증..민증이 어디 있어야 찾아주든 말든 할꺼아냐..

카드는 10개가까이 되는데 민증이 보이질 않았다.. 싶었는데 깊숙한곳에 숨겨진 것처럼 있는 민증이 보였다.

- 그렇지. 지갑이 있으면 보통은 민증이 있지.. 헉....근데 이건...........

문제발생.

남자였다. 그렇다. 그의 짝사랑 상대인지 애인인지는 알수 없지만 아무튼 그가 아끼는 이성사진
지갑에 넣어둔 것이었다. 그렇고보니 여자분의 사진은 증명사진 외에도 이미지샷 등 이쁜 모습이 몇개 더
들어있었다. 자신의 이런사진들을 지갑속에까지 넣어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흔치 않겠지.
낚인것이다. 허탈한 마음이 들면서..
하늘에서 이런 나를 신이 지켜보면서 쾌재를 부리며 웃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 으핫핫핫 제대로 월척이구나!!

하고 소리치며,

다가올 크리스마스가 갑자기 어두워지는군
아니 자세히 보면, 확실히 여자꺼라 하기엔 체크무늬의 꽤나 심플한 디자인이다.
ㅠㅠ... 아리따운 그녀와의 환상은 멀리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땅바닥에 떨어진 이 보잘것 없는 지갑 하나가
나의 가슴속을 그렇게 휘저어 놓았었구나...
엄청나게 분비되었을 내 아드레날린과, 뜀박질 했을 심장..좌뇌 우뇌들에게
순간순간 별의별 영상을 다 쏘아 보내게 만들었구나..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들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던져있는 지갑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나처럼 우연히 나 혼자 본경우가 아니었다면?
지갑을 주우려고 서로 눈치를 볼까? 결국 줍게될 사람이 있다면
그사람을 다른사람들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까?


나와 같은 경우였다면...? 어떤 이는 바로 주워서.. 마치 자기지갑이었던 것 마냥...
주머니 속에 넣을 거고, 또 어떤 사람은 나처럼 주워서.. 안에 내용물을 찬찬히 확인할 거고..
버스기사에게 줬을 수도 있을꺼같다.

.....

그리고, 또 안의 내용물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이쁜 여자 사진을 보았을때,
지갑 속 7천원을 보았을때.
어쩌면 돈이 많이 들어있을때.
그러다 남자 민증을 확인했을때..

자본주의 = 돈

그리고, 그것을 담는 지갑...
일반인들의 외출가장 중요한 두 가지, 지갑과 핸드폰...
나의 경우엔 mp3와 핸드폰이지만 아무튼..

이걸 보는 사람들 모습을 관찰하는 것 만으로도,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상상해 보세요...
길에서 떨어진 멀쩡한 지갑을 봤을때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긴장되고, 심장박동이 빨라지지는 않을까요? 아니시라면 한점의 동요없이 지나칠까요?


후.......

잠시 설레였던 마음을 접고 저는 내일 이 지갑을 돌려줄 예정이랍니다.
가만, 우리집 근처에 경찰서가 있었나? 주소가 우리동넨데..
민증에 적힌 아파트에 찾아가서 초인종을 눌러 돌려준다면 어떨까요?ㅎㅎ


개봉역 2번출구에서 06번 버스를 타셨던 나보다 한살어린 87년생 박성열군^^
다행히 같은동네사는 이 형이 지갑주워서 그대로 돌려줄라니까 기다려요~^_^
카타부라의 최근 게시물

좋은글터 인기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