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순이의 뉴욕 '思父曲' ☆
가수 인순이는 16년 전 아기를 가졌을 때
"혹시 아이가 나를 많이 닮으면 어쩌나,
수도 없이 되뇌었다"고 했다.
혼혈인으로 자라며 받은 상처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대중의 사랑 속에 무대를 휘젓는 그이지만
"학교 다닐 땐 남들 앞에 서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고 했다.
고민 끝에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외국인학교에 보내 덜 상처받게 하고 싶었다.
인순이는 돌아오자마자 이런 사연을 방송에서
숨김없이 알렸다.마음껏 욕해 달라"고 했다.
그의 원정출산에 돌을 던지는 사람은 없었다.
3년 전 연예인 학력위조 파문 때는 중졸 학력을
고졸로 속여왔다는 게 드러났다.
그는 "가난해서 고등학교에 못 갔다.
나 자신과 팬들에게 정직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때도 손가락질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지난 몇십년 우리 사회가 혼혈인을 어떻게
대해 왔는지 다들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인순이는 1957년 포천에서 태어났다.
주한미군이었던 아버지는 그가 뱃속에
있을 때 떠나 다시 오지 않았다.
열네살 때까지 가끔 편지를 주고받다
소식이 끊겼다.그런 그에게 작년에
'아버지'라는 노래가 들어왔다.
'한 걸음도 다가갈 수 없었던/내 마음을 알아 주기를
얼마나 바라고 바라왔는지/눈물이 말해준다.......
그는 이 노래를 부르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를 단 한 번 본 적도 없으면서
아버지 심정을 노래한다는 게 부담스러웠다.
노래를 부르다 울컥할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인순이는 1999년 뉴욕 카네기홀 공연을
앞두고 잔뜩 흥분해 신경성 장염과
위염으로 한 달을 고생했다.
아버지의 나라에 가서
그가 어머니 힘만으로 얼마나 잘 자랐는지
보여줄 기회라고 별렀다.지난주 다시 가진
카네기홀 공연에서 그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6.25 참전용사 100명을 모셔 놓고
"여러분은 모두 제 아버지"라고 인사했다.
그는 작년에 '군인의 딸' 자격으로 공군대학에
특강을 나가 마지막 한마디로 강의실을 뒤집어놓았다.
"외국에 파병 나가도 책임지지 못할
씨는 뿌리고 오지 마세요."
인순이니까 할 수 있는 얘기였다.
노래 '아버지'도 용기를 내 취입했다.
카네기홀 공연에서 "전쟁통에
나 같은 자식을 두고 떠난 뒤 평생
마음의 짐으로 안고 사는 참전용사들이
이제 짐을 내려놓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버지를 극복하고 용서와 화해를
건네는 그녀가 당당하고 아름답다.
- 좋은글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