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억 중국인이 못한일을 해낸 한 한국인

면죄자 작성일 10.12.21 22:5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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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어머니께서 남기신말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 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맘 먹지 말고 죽으라. 

훌륭한 어머니의 가르침이 없으셨다면 우리나라의 영웅또한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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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1932년 자작극인 일본 승려 살해사건을 이유로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다.

일본군은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의 지휘하에 전쟁을 승리하였다.

일본군은 일본 국왕의 생일축일인 천장절(天長節)과 전쟁 승리 두 가지를 축하하는 기념식을 갖기로 하였다.

윤봉길은 이 기회를 택하여 기념식장에서 거사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김구를 비롯한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조소앙(趙素昻) 등

지도자들과 협의하여 거사를 구상하였다.



윤봉길은 야채상으로 가장하여 미리 기념식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고, 기념식장에서 투척할 수류탄도 제조하였다.

폭탄 제조 전문가인 김홍일(金弘一)의 도움을 받았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은 폭탄(저격용 물통 모양의 폭탄 1개, 자결용 도시락 모양의 폭탄 1개)을 감추고 식장에 입장하였다.

그리고 식이 한참 진행중일 때 식장으로 다가가 수류탄을 던졌다.

이 폭발로 시라카와 일본군 대장과 일본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貞次]는 즉사하였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중장과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케미쓰[重光癸] 등이 중상을 입었다.

식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일본으로 옮겨져 오사카[大阪] 위수형무소에 수감되었다(1932. 11. 20). 그리고 그해 12월 19일 총살형을 받고

24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다.

이 사건은 중국 등 세계에 알려졌고,

중국의 지도자 장제스(蔣介石)은 “4억 중국인이 해내지 못하는 위대한 일을 한국인 한 사람이 해냈다.”고 격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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