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지나면 강산이 변하고 사람이 변한다고들한다.
내가 먹던 어릴적의 과자 가격도 올랐다.
처음에 샀을땐 300원 이던 과자가 500원 800원 어느덧 1000원이 되었다.
늘 그것을 보며 생각했다.
난 늘 한자리에 있는거같고 내손에 쥐어지는 돈은 늘 같은데
왜 어째서 주변의 모든것들은 점점 변하는지.
"초심을 잃지말자"
"늘 한결 같은 사람이 되자" 라고들 말하지만 쉽지 않다.
늘 회사에 다닐땐 힘든 생활을 했다.
어찌 쉽게 돈을 벌수 있겠냐는 생각에 늘 묵묵히 참고 다녔다.
주말도 없이 다닐때도 많았다.
그럼에도 쉬는날이 생길때면 늘 슈퍼에 들려 과자와 커피를 사와서
밤늦게 티비를 보며 먹곤 했다. 다음날 늦게까지 잘수있다는 안도감과 편안함을 지닌채...
그때마다 늘 사던 과자가 있다.
처음엔 기다란 봉지에 들어있었지만 지금은 기다란 박스안에 두개의봉지로 나눠 들어있는
"빠다코코넛"
달달하면서도 맛있다.
그리고 내 사춘기시절 우리집의 보물이자 부모님과 함께였던 낡은 전축위에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늘 똑같은 전축위에 올려져있곤했다.
처음엔 몰랐다.
그저 과자가 있다는 것 만으로도 좋았던 시절이라 그저 아무생각 없이 먹기만했다.
혹시 이거말고 또 없을까? 어디 숨겨놨나? 왜 늘 똑같은 과자만있지? 라는 생각만했다.
그땐 어렸다. 화가나면 마음에서 머리를 거치지 않고 입으로 내뱉기만 했던 시절이였고,
반항만 하고 싶었고, 용돈도 많이 받고 싶었던 시절이였다.
넉넉하지 않는 형편에 늘 용돈을 받고싶어서 준비물 사야된다는 말로 엄마에게 받았던 돈.
그게 나의 용돈이였다.
그렇게 늘 낡은전축위에 놓여진 "빠다코코넛" 이라는 과자를 먹기 시작하다
어느덧 머리속에서 지워졌을때쯤 문득 생각이 났다.
대략 내가 고등학교 2학년 3학년때가 되었던 시절이다.
그때 왜 항상 전축위에 올려놨었을까..
이유는 단 하나다. 근데 단하나의 말 혹은 어떠한 단어로 표현하기엔 너무 부족하다.
엄마의 미안함 이랄까. 용서라고 할까.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까..
그어떠한 단어로 표현짓고 말로 내뱉기엔 나에겐 부족하다..
내가 초등하굑 5학년이던 시절... 늘 친구들의 용돈이 부러웠다.
하루 천원 이천원씩 받던 친구들이 부럽긴했다.
나의 하루용돈은 300원이나 500원 혹은 없었다.
그래서 늘 용돈으로 받은 동전을 들고 문구점앞에가서 100원짜리 넣고 메달게임을했다.
운좋게 3 이나 5, 7, 20 이라는 숫자에 걸리면 그에 맞는 메달이 나왔고,
그문구점에서 돈처럼 쓸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더많은걸 사먹거나 혹은 하루 허탕을 치거나했다.
그러다보니 누구나 그렇듯 나도모르게 손이 주머니속으로 슬쩍슬쩍 들어가곤했다.
친구와 호기심에 해본 도둑질에 내가 먹고싶었던 천원짜리 초콜렛 , 과자 , 껌 , 수많은 사탕들이 꽁짜로들어오니
잘못된 짓 이 아닌 당연한 짓 이라고 생각하곤했다.
그렇게 배부를때쯤 여느날과같이 슈퍼에 들어섰다.
친구와 들어섰을때 그날따라 그 슈퍼의 분위기는 달랐고, 주머니속을 꽉꽉 채워 나가던 나와 친구를 불러세웠다.
그리고 그날 어머니를 델고 슈퍼로 오라는 주인아저씨의 말을 들었다.
나는 슈퍼를나와 집으로 가지 않고 친구와 한창 계단에 앉아 울었다.
"집에 들어가지말까 어떡할까 사실대로 말할까 이러다 정말 쫓겨나는거 아닐까 도망칠까 어떡할까.."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고 눈물이 더이상 흘러내리지 않을때쯤 집에 들어갔다.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엄마에게 손바닥으로 맞았다.
다시는 안그러겠다고 한번만 봐달라며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엄마는 필요없다고 나가라고 하셨다.
추운겨울날 팬티만 입고 집앞에 서있었다.
그날은 타지역에서 일하시는 아빠가 집에 오시는 날이였다.
몇시간뒤 엄마는 누나를 통해 집에 들어오라고 하셨다.
그리고 한시간뒤쯤 아버지가 오셨다.
아버지와 함께 집에서 목욕을 했다. 아버지는 내 종아리에 멍이든걸 보고 무슨일 있냐고 물었지만
나는 친구와 싸웠다고 둘러댔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안되는 핑계였다.
그리고 다같이 저녁을 먹는데 목이 메여와 밥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혹시나 엄마가 아빠한테 말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날 엄마는 아무말 없이 저녁식사를 하셨고
그후로 집에 전화가 올때마다 왠지 모르게 무서웠다.
혹시 그 슈퍼집 주인아저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해고, 그동네를 지나갈때마다 심장이 미친듯 뛰기시작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중학교에 입학했고 어느덧 시간이 2년정도 흘렀다.
그러다 우연치않게 아빠엄마와 토요일 점심식사를 하는데
TV에 담을 타넘으면서 도둑질하는 소년의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아무생각도 없이 밥을 먹곤했다. 여느때와 같은 맛이였다.
그때쯤 아빠가 한마디하셨다.
"어린나이에 도둑질이라니 안타깝네" 그말을 하는순간 멍했다.
그때 엄마가 한마디 내뱉으셨다.
"너도 두번다시 저런짓하지말라고"
그제서야 아빠가 무슨소리냐고 물었고
엄마는 있었던 그대로 모든이야기를 아버지꼐 말하셨다.
나는 속으로 정말 이제 죽었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말씀 안하셨다.
"그럴수도 있다" "이제는 그러지말라"라는 충고만 하셨을뿐..
그리고 그다음부터 내가 학교에 갔다올때면 늘 낡은 전축위에 빠다코코넛 하나가 올려져있곤했다.
그전축은 엄마아빠와 함께했던 전축이다.
집에 불이났었지만 그전축은 늘 우리집과 함께했었다.
그땐 그저 달달한 과자맛에 아무생각 없었다.
하지만 꽤 시간이 지나고 나도 이제 어른인거 같다고 착각하던 시절.
내머리를 스쳐지나가는 총알과 같이 생각이 들었다.
"넉넉하게 주지 못하는 용돈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녀석이 남의 물건에 손을댔구나.."
아빠와엄마는 얼마나 나에게 미안했을까
그런생각을 하니 정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 멈추고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울었다.
왜뒤늦게 알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곤했다.
지금은 서로 다른 삶을 살고 계시지만 그때만큼은 정말 세상에서 가장행복한 집이 우리집인거 같았다.
어머니가 아프셔서 병원에 계실때도 아버지는 가장의 노릇을 다하셨다.
집에서 손수 짬뽕 짜장면 까지 해주시고 유명한 브랜드 치킨은 못사주시더라고 시장에 가시면
집에오실때 시장닭을 사오시곤했다.
처음엔 그 시장닭 냄새가 너무 싫었다. 카레냄새나고 시장냄새나는 갈색종이에 남겨있던 시장닭..
늘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 아버지가 무서웠고 엄마랑 싸우던 모습도 싫었지만
다음날이면 사이좋게 두손 꼭 잡으시고 시장에 다녀오시면서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날 학교 담벼락
맞은편에 서서 500원을 쥐어주시던 그모습이 잊혀지질 않는다.
mc스나이퍼의 "인생"이라는 노래를 들어보면 마지막 가사에 이런말이 있습니다.
"이제는 좀 마누라랑 살갑게 살려하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쑤시고
자식놈들 찾지 않는 썰렁한 이 내맘도
손주녀석 재롱 보니 다 풀리고
용돈을 주는 재미에 하루 이틀 살다보니
관속에서 누우라고 손짓하고
아버지와 내 어머니도 이렇게 살았구나
생각하니 하염없이 눈물 흐르고..."
아마 이글을 쓰는 저뿐만 아니라 누구나 가슴속에 죄송하고 미안한마음이 있을 것 입니다.
지금은 다른이유로 부모님이 같이 사시진 않지만, 저또한 제가 죽을때쯤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나겠죠.
같이 살순없을까 라는 생각도 들곤하지만 부모님의 마지막 두분의 인생이라 생각하고 그냥 묵묵히 있습니다.
그런데 이젠 모르겠습니다.
언제 부모님께 사랑한다는 말을 했는지도..
그리고 편지가 아닌 말로써 사랑한다고 말한적이 있는지도요..
훈련소에서 어머니의 편지를 처음받았을때 다들 취침시간인데 몰래 화장실에 가서 읽고
변기위에 앉아 하염없이 한참을 울었습니다.
목이메여 아무말도 나오지 않고 그냥 울기만했습니다.
별내용도 아니였습니다.
아픈데 없냐 잘지내냐 추운데 고생하고 힘내라는 그냥 안부의 편지였지만
정말 앞이 안보일만큼 울었습니다.
그때 다짐했죠.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드리겠다고.
하지만 전역을 하고 직장에 다니고 나이가 점점 찰수록 이런생각이 드네요.
제가 행복하게 해드리는게 아니라
오히려 저를 행복하게 해주고 있는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요..
쓰다보니 길어졌네요. 어디서 퍼온 글이 아니라 저에게 초등학교시절 있었던 일입니다.
위에 있는 가사속의 말처럼 죽음이 다가왔다는걸 마지막이라는 걸 알고 눈물을 흘리는게아니라..
나의 부모님도 이렇게 사셨을까 하는 생각에 눈물이 흐를것 같습니다.
오늘도 말뿐일지 모르겠지만
앞으론 정말 더 잘해드려야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에 1위로 어머니 라는 단어가 뽑혔지만 10위안에도 70위 안에도
아버지라는 단어는 없었다고 하네요.
어머니란 늘 우리에게 울면 가장 먼저 나오는 엄마 엄마 라는 단어지만
아버지는 왠지모르게 어렵고 무뚝뚝하신거 같고 엄격하시게 다가 오지만
두분다 부모라는거엔 변함이 없습니다.
가족이기전에 누군가의 부모이고
부모이기전에 한때는 누군가의 남자이고 누군가의 여자 였을 것이고
누군가의 아들이자 누군가의 딸 이였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부모님들께 늘 좋은일 가득하고 건강하시길 바라고
행운이 아닌 행복이 늘 먼저였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