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 편지
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원고지처럼 하늘이 한 칸씩
비어가고 있습니다.
그 빈곳에 맑은 영혼의 잉크물로
편지를 써서
당신에게 보냅니다.
사랑함으로 오히려
아무런 말 못하고 돌려보낸 어제
다시 이르려 해도
그르칠까 차마 또 말 못한 오늘
가슴에 고인 말을
이 깊은 시간
한 칸씩 비어가는 하늘 백지에 적어
당신에게 전해 달라
나무에게 줍니다.
(이성선·시인, 1941-2001)
+ 가을
가을입니다
해질녘 먼 들 어스름이
내 눈 안에 들어섰습니다
윗녘 아랫녘 온 들녘이
모두 샛노랗게 눈물겹습니다
말로 글로 다 할 수 없는
내 가슴속의 눈물겨운 인정과
사랑의 정감들을
당신은 아시는지요
해 지는 풀섶에서 우는
풀벌레들 울음소리 따라
길이 살아나고
먼 들 끝에서 살아나는
불빛을 찾았습니다
내가 가고 해가 가고 꽃이 피는
작은 흙길에서
저녁 이슬들이 내 발등을 적시는
이 아름다운 가을 서정을
당신께 드립니다.
(김용택·시인, 1948-)
+ 가을의 향기
남쪽에선 과수원에 능금이 익는 냄새
서쪽에선 노을이 타는 내음……
산 위엔 마른 풀의 향기
들가엔 장미들이 시드는 향기……
당신에겐 떠나는 향기
내게는 눈물과 같은 술의 향기
모든 육체는 가고 말아도
풍성한 향기의 이름으로 남는
상(傷)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여
높고 깊은 하늘과 같은 것들이여……
(김현승·시인, 1913-19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