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신촌으로 대학을 다니던 때, 설익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신입생들은 취기에 이기지 못해 길거리에 나뒹굴기 일쑤였다.
태생적으로 술을 잘 마시지 못해 취한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위화감을 느끼던 시기였다. 그 날도 맥주와 양주였는지 보드카였는지 데낄라였는지를 섞은 술을 파는 술집에서 일행들이 거나하게 취한 날이었다. 계산을 마치고 계단을 내려와 대로변으로 나오는 순간, 그와 마주쳤다.
그는 초라한 행색에 어울리지 않는 당당한 체구를 가진 남자였고, 넝마를 실은 리어카를 끌었다. 리어카를 끌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올 때마다 분명 후줄근한 옷차림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겠지만, 그의 멋지게 갈라진 삼각근이 보이는 듯 했다. 다만 늦은 시간이라 거리에 행인은 별로 없었다. 무엇인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눈을 돌리면 달려들 것만 같은 알 수 없는 공포심을 느껴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순간 그는 걸쭉한 목소리로 “형님, 형님 막걸리 한번 잡솨봐” 하며 내게 다가왔다. 이미 일행들이 취해 막걸리를 살 상황은 아니었다. 그의 행색을 보아 적선삼아 한 병을 사려는 마음을 가졌으나, 막걸리 한 병을 집까지 들고 가기 영 번거로운 생각이 들어 사지 않았다. 강매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을 하려던 찰나, 그는 좋은 하루 되라며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내 앞의 일행들에게 마찬가지로 형님, 형님 하며 다가갔다. 뒤에서 본 그는 앞에서 본 것보다 작아보였다. 그것이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이후 군에 입대하기까지 1년 반이란 기간동안 심심찮게 그를 마주쳤고, 간혹가다 넉살좋은 선배가 만원어치씩 막걸리를 산 기억을 제외하면 그에게서 막걸리를 샀던 기억은 없다. 군에 다녀와서 2년만에 본 그는 여전히 당당했고, 반가웠다. 알은 체 하고 싶었으나 막상 그에게서 막걸리를 산 기억도 없고, 인사를 나눈 기억도 없기에 혼자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스쳐지나간 기억뿐이다. 군에 다녀와서는 그를 마주친 기억이 거의 없다. 그는 그렇게 잊혀졌다. 대학을 가고, 대학원을 가고, 취업을 하여 회사를 다니던 어제까지 그의 존재는 잊혀졌다.
그런 그를 5년만에 다시 만났다. 망원동이었다. 해가 지고도 한참이 지난 시간, 뒤에서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뒤돌아보아 확인하고 싶은 마음과 눈을 마주치면 안 될 것 같은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다 뒤돌아보았다. 그였다. 여전히 당당했으나 체구는 조금 작아진 것 같았다. 목소리는 더욱 걸걸해 있었고 모자 사이로 말아 넣은 머리카락은 희었다. 그는 나에게 “사장님, 사장님 막걸리 한번 잡솨봐.”라며 다가왔다. 그렇게 나는 어느새 형님에서 사장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