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하다는 착각 『The Tyranny of Merit: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 '능력주의의 폭정: 과연 무엇이 공동선을 만드나?'
한 대기업 그룹의 장남이 자신의 성공스토리와 노하우를 담아 책으로 발간했다.
[성공하려면 미친듯이 노력해라]
아마 대부분 사람들은 제목을 듣자마자 반감이 생길 것이다.
"뭘 노력했다는거지? 이미 성공한 채로 태어난 거 아니야?", "나랑 똑같은 조건이었으면 그게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정말 그는 진심으로, 자신의 미친듯한 노력만으로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이런 태도는 어떤 식으로 사회에 영향을 미칠까?
내가 가진 재능과, 사회로부터 받은 대가는 과연 온전히 내 몫인가? 아니면 행운의 산물인가?
저자 마이클 센델은 정치, 철학, 종교, 사회 등 다양한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았다.
우리 사회는 공정한가?
하나의 예시를 들어보자. 대학 입시 절차는 공정한가??
거액의 돈을 들여 "뒷문"으로 들어가거나, 뇌물과 성적 조작, 스펙 품앗이을 통해 "옆문"으로 들어가는 문제가 있다.
이런 표면적인 문제를 제외하고, "정문"만 남기면 입시 절차가 공정해질까?
SAT같은 표준화된 시험에서도 시험생 집안의 소득과 점수가 비례관계를 나타낸다.
아이비리그 대학생 2/3 이상이 소득상위 20% 이상이다. 프린스턴과 예일은 미국 소득 하위 60% 학생보다 상위 1% 학생이 더 많다.
물론 탈락한 지원자들의 소득 비율도 보아야 정확하겠지만, 상위권 대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소득 수준에 엄청난 영향을 받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해 진보주의자들은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진보주의자들은 소수자 우대정책이 이러한 불공정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참된 능력주의는 출발선을 고르게 해야 실현될 수 있다고 말한다.
반대로 보수주의자들은, 소수자 우대정책은 능력주의를 역행하는 것이며, 또다른 역차별을 만들어 낼 뿐이라고 반발한다.
기회의 평등에 힘을 주면 결과가 불평등해지고, 결과의 평등에 힘을 주면 기회가 불평등해지는 아이러니한 상태이다.
어느 한 쪽이 맞고 틀리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어보인다.
학위 소지에 따라 소득격차가 벌어지면서, 대학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되었고, 어느 대학에 들어가느냐도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소득 격차가 벌어짐에 따라 인생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커지고, 적어도 내 자식이 평범하게는 살았으면 하는 바람에 부모는 자녀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저자는 여기엔 더 의미심장한 목적이 있다고 한다. 명문대 간판을 달도록 함으로써 "능력주의의 광채"를 두르려 한다는 것이다.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나 스스로의 재능과 노력으로 여기에 섰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만 이뤘다고 할 수 있을까?
부모와 교사의 노력, 타고난 재능과 자질, 우연히 얻은 재능을 계발하고 보상해줄 수 있는 사회에 태어난 행운은?
공정성을 넘어선 능력주의의 또다른 문제는, [성공한 사람들이 자신보다 덜 성공한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태도]에서 발생한다.
'나의 성공은 나의 능력에 따른 것이고, 나는 마땅이 이런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생각은 직업의 귀천없음을 무너뜨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엘리트 층이 교만하다는 인식을 쌓게 하였다.
이런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포퓰리즘적 분노가 인종적, 민족적, 성적 다양성 등을 토대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성공한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한 것인가? 아니면 통제 범위 밖의 요인들이 작용해 성공한 것인가?
우리가 스스로를 자수성가한 존재, 자기충족적 존재로 볼수록 우리의 성공에 대해 빚진 느낌이나 감사의 마음을 가질 까닭은 줄어든다.
우리가 자유로운 인간 행위자이며 성공도 실패도 할 수 있다고 보는 생각은 능력주의의 일면이다.
'성공한 사람은 그럴만해서 성공했다'는 신념이 중요 포인트다.
막스 베버는 이렇게 보았다. "운 좋은 사람은 운이 좋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경우가 드물다. 운이 좋다는 사실을 넘어 자신이 '그럴만하다'고,
나아가 남들에 비해 '그럴 자격이 있다'고 확신하기를 바란다. 또한 운이 나쁜 사람들도 자신의 당연한 업보일 뿐이라고 믿기를 바란다"
능력주의의 폭정은 이러한 충동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수준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힐러리는 선거운동 기간동안 "미국이 선하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
이는 능력주의 신념을 국가에 적용한 것이다.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가 미덕 덕분이라면, 부유하고 강력한 시민도 그렇지 않을까?
많은 진보파와 자유주의자들은 운의 우연성을 강조한다.
성공과 실패는 인성과 미덕만이 아니라 운과 상황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고 지적한다.
'선량하니까 위대하다'는 섭리론에 내포된 능력주의는 다양한 논쟁들에 그대로 반영되어 미국 내에 퍼지게 된다.
오늘날 자신의 정책이나 정치적 동맹자를 변호하며 "역사의 옳은 편에 서 있다"고 하고, 그 비판자들에 대해서는 "역사의 잘못된 편에 서 있다"라고 규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승리주의적 표현은 대체로 민주당 대통령이 즐겨 썼다. (빌 클린턴 25번, 오바마 32번)
오바마는 취임 연설에서 독재자들과 폭군들에 대해 엄한 경고를 날렸다.
"부패와 기만, 반대파에 대한 억압으로 권력을 유지해 온 사람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역사의 잘못된 쪽에 있음을"
역사가 되기도 전에 역사를 들먹이는 일은 역시나 문제가 있다.
첫째, 일이 저렇게 사담 후세인을 몰아내었지만 민주주의가 자리 잡지는 않았다. 잠깐의 봄은 새로운 독재와 탄압의 겨울로 바뀌어버렸다.
둘째, 역사가 예측한 대로 흘러갈지라도 그것이 곧 도덕적 정당화의 기반이 될 수는 없다. 결국 옐친이 아닌 푸틴이 역사의 옳은 편에 서 있었다고 할 수 있음이 드러났다.
적어도 그가 독재로 권력을 계속 유지했다는 점을 보자면 말이다.
시간이 가면서 오바마의 섭리론은 변화를 위한 예언자적 외침이라기보다, 미국 예외주의를 부추기는 재확언에 가까워졌다.
"미국이 예외적인 까닭이 뭐냐 하면, 결국 옳은 길로 간다는 겁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도덕 세계의 궤적은 길지만 반드시 정의를 향해 휘어진다고 말한 그대로입니다.
그러므로 미국은 특별합니다. 그래서 미국이 특별해집니다."
저자는 능력주의의 이상은 계층의 이동성에 있지, 평등에 있지 않음을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동시에, 능력주의가 완전히 구현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면서, 이는 이뤄질 수 없는 조건이고 이뤄진다 하더라도 완전히 공정한 것도 아니라 말한다.
너무 당연한 소리같다.
서로가 서로에게 빚지고 있음을 느끼고 공동체로써 유대감을 형성해야 하고,
일의 존엄성을 회복함으로써 능력의 시대가 풀어버린 사회적 연대의 끈을 다시 매도록 해야 한다는 심심한 말로 글이 마무리된다.
능력주의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능력있는 사람을 채용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무거운 짐을 옮기는 일엔 힘이 쌘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 능력의 대가를 오로지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교만이 능력주의의 횡포로 이어지고 있다.
승자와 패자 사이의 간극은 더욱 멀어지고, 패자의 불만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능력주의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런 흐름에 많은 사람들이 동요하고 있으며 포퓰리즘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과연 인간이 모든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을까?
이 말이 맞다면 나는 의지가 약한건가? 어쩌면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모두들 성공을 위해 노력한다고 하지만, 대부분은 '성공을 위한 노력'과 '현재에 안주하는 안락함' 사이의 적당한 타협점을 가지고 있다.
결국 그 타협점에 맞춰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모든 능력과 환경은 주어지는 것이니 그저 흐르는 물처럼 겸손히 길을 따라 가야하는 것일까?
내 가정형편이 너무나 어렵고 열악했다면, 혹은 어느 전쟁터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면, 지금의 삶조차 이뤄낼 수 있었을까?
혹시, 지금 내가 가진 의지조차도 환경적인 요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그것도 아니면, 반반인가?
사물로 존재하는 삼각형을 계속해서 확대하다 보면, 언젠가 그것은 더이상 삼각형이 아닌 울퉁불퉁한 다각형이 되어 있다.
삼각형은 실제로 존재할 수 없는 이상적인 개념이지만, 우리는 이런 이론적 개념을 파고들고 활용하며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다.
이처럼, 절대적인 객관성은 실존할 순 없으나 우리가 발전하기 위해 추구해야 할 기준이 된다.
능력주의도 마찬가지다. 현재의 능력주의가 가진 한계에 집착하여 기준 자체를 없애기보다, 이상적인 능력주의를 위한 노력과 연구를 끊임없이 시도해야 한다.
개인의 능력을 측정하기 위한 더 나은 패러다임이 생기기 전까지 능력주의는 마땅히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준을 확대하고 확대하여 디테일한 오류를 찾아 고치는 것이 우리 사회가 발전하는 방향이 아닐까 생각해보며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