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알지 못하면 역사도 알 수 없다!”
<토크멘터리 전쟁사>
고대사를 뒤흔든 열한 가지 거대한 전쟁,
전투와 전투 사이, 전쟁이 바꾼 것은 전략과 전술만이 아니다!
무기와 방어구로 읽는 또 하나의 전쟁사!
포에니 전쟁
로마, 부자 식민도시 카르타고와 100년 넘게 싸워서 지중해의 패권을 잡다
그날 전날 파울루스가 한 말을 생각했다.
‘절대 그들의 계략에 말려들어선 안 되오. 항상 신중하게 움직이시오. 한니발은 뱀 같은 작자입니다.’
한니발? 뭐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압도적인 병력이 있는 지금, 소심한 파울루스의 걱정은 찌질한 소리로 들렸다. 하루씩 번갈아가며 지휘를 맡는 것부터 짜증이 났는데 시어머니 잔소리까지 들으니 그는 심기가 영 좋지 않았다. 다행히 그가 지휘를 맡은 날 카르타고군이 싸움을 걸었다. 얼마나 다행인가. 그는 이번 기회에 원로원에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고 싶었다. 제1선의 보병 전열은 이미 카르타고군과 접촉한 것 같다. 저만치서 전령이 달려온다.
“바로 각하! 아군의 보병 대열이 적의 대열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뭐야? 이제 막 시작했는데 벌써 적을 밀어붙이고 있다고? 한니발이란 자가 명장이라더니, 역시 기나긴 원정길에는 장사가 없나 보다. 이렇게 맥없이 주저앉는 걸 보면 아마도 카르타고군은 싸우기도 전에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음이 분명했다. 그는 여기서 서둘러 끝장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전 군단! 전진하라!”
그의 명령에 대기하고 있던 보병군단 전체가 질서정연하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부하 하나가 말한다.
“각하, 아직 제1선의 상황을 잘 모릅니다. 한꺼번에 보병 전체를 투입하는 것은 좀……”
“Dog소리 마! 지금 우리 애들이 밀고 들어가는 거 안 보여? 너도 파울 루스과냐?”
테렌티우스 바로의 핀잔을 들은 부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로마 보병군단은 질서정연하게 제1선의 보병 대열에 합류했다. 이미 로마 보병은 거대한 직사각형이 되어 카르타고군을 밀어내고 있었다. 누가 봐도 로마군의 승리가 확실했다. 로마군은 카르타고군을 손쉽게 격파할 수 있을까? 아니, 도대체 왜 카르타고군은 스페인에서부터 로마까지 이 먼 원정의 길을, 그것도 로마를 향해 가는 것일까?
로마, 카르타고의 지중해 무역권에 군침을 흘리다
포에니 전쟁은 이탈리아반도에서 뻗어나가려던 로마와 페니키아의 돈많은 식민도시 카르타고가 지중해 패권을 둘러싸고 무려 세 번이나 크게 붙었던 전쟁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세 차례에 걸친 대결은 모두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로마는 어떻게 카르타고를 이겼을까?
‘포에니’란 식민도시 카르타고를 세운 페니키아인을 가르키는 라틴어였다. 말하자면 로마가 카르타고를 부르는 이름이 ‘포에니’였던 것이다. 페니키아는 고대에 대단한 문명을 꽃피운 나라였는데, 알파벳의 원형도 페니키아 문자다. 페니키아는 현재의 이스라엘, 레바논, 시리아 해안 지역에 자리했던 지중해 해상 무역강국이었다. 사실 고대문명의 끝판왕은 이집트였다. 그런데 페니키아는 이집트 문명뿐만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포함한 전 지중해 문명을 흡수해 그리스와 로마로 전파해주는 역할을 했다. 문자 이외에도 종교, 역사, 사상 등 전 분야에 걸쳐 방대한 문명을 전파해주었다. 페니키아의 이런 역할에 대해 19세기 독일의 고전학자 테어도어 몸젠은 다음과 같은 멋있는 말을 했다.
“페니키아는 문명의 씨앗을 뿌린 농부가 아니라 문명의 낟알을 물어다준 새다.”
무역으로 떼돈을 벌어들인 페니키아는 돈이 안되거나 힘든 일은 스스로 안 하고 무조건 돈으로 해결하는 나쁜 습관을 가지게 된다. 식민지 개척의 목적도 농업과 상업, 그리고 시장 확보였다. 이는 페니키아인들이 세운 카르타고의 영토를 보면 극명히 알 수 있다. 위의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베리아반도 남부 끝자락에서부터 리비아 동부 키레나이카를 포함한 북아프리카 북부 해안선 전체가 카르타고의 영토였다. 즉 항구도시들이 연결된 선을 따라 긴 띠처럼 국가를 세운 것이다. 부족한 식량은 무역이나 노예를 동원해 농사를 지어 해결했다. 뭐든지 돈으로 해결했다.
BC 7세기 초, 페니키아의 본거지였던 현재의 레바논 지역이 아시리아에 점령당하자 페니키아인들은 오늘날 튀니지 북부인 카르타고로 중심지를 옮겼다. 이때부터 시스템이란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한 페니키아인들은 국가의 모양새를 갖추려 노력했는데, 군대만큼은 단시간 내에 구성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해낸 것은 용병에 구성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해낸 것은 용병으로 군대를 대체하는 것이다. 군대 역시 ‘얼마면 돼?’ 정책, 즉 돈으로 해결한 것이었다. 아무튼 카르타고는 지중해 요소요소에 거점도시들을 세우고 무역을 거의 독점했다.
그런 카르타고를 곱지 않은 눈초리로 바라보는 이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로마였다. 당시 로마는 그리스와 같은 농업국가였지만 그리스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들은 무역도 병행했으며 무엇보다도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탈리아반도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후, 로마는 항상 카르타고가 꽉 잡고 있던 지중해 무역에 군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가의 시스템에 눈뜨기 시작한 카르타고는 이제 국가를 넘어 제국을 꿈꾸기 시작했다. 로마는 더 이상 카르타고가 융성해지고 강해지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계속해서 영역을 확장하며 점차 제국의 길로 들어서는 로마에게 카르타고의 부는 너무나도 부러운 것이었다. 질투심을 불태우던 로마는 조만간 카르타고와의 한판 승부를 피할 수 없음을 예감했고, 전쟁을 통해 카르타고의 부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때마침 그때 로마로서는 좋은 빌미가 생겼다. 당시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일부, 사르대냐, 코르시카 등 지중해 핵심 요지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야심만만해진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에서 더욱 영토를 확장하려 했다. 로마는 이를 견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전쟁을 통해 시칠리아에서 카르타고를 쫓아내고 지중해까지 덤으로 장악하고자 했다. 하지만 두 나라 군대는 차이가 너무도 뚜렷했다. 지상전의 최강자가 로마라면 해상전의 최강자는 카르타고였다. 마치 그리스시대의 스파르타와 아테니 같은 형국이었다. 물론, 로마와 카르타고가 그리스 도시국가들보다 몸집이 몇 곱절 크기는 했지만.
로마와 카르타고의 무기
처음에 로마군의 시스템은 그리스군과 판박이였다. 로마도 태생은 그리스와 비슷한 도시국가였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자기 돈으로 칼과 방패와 갑옷을 살수 있는 능력이 되는 사람들만 군대에 가는 시스템도 똑같았다. 그러다가 야만족이라고 업신여기던 지금의 프랑스 남부 켈트족의 침입으로 약 7개월간 도심을 점령당하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야만족에게 그런 치욕을 두번 당하고 싶지는 않았던 로마는 군제개혁을 통해 군사혁신을 꾀했다. 군사혁신의 핵심 내용은 무엇보다도 훈련의 강화였다. 로마 군대의 훌련법은 다음과 같았다.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면 완전 ‘지옥훈련’ 아닌가. 무슨 특전사도 아니고 만약 오늘날 군대가 이런 훈련 프로그램을 짠다면 아무도 군대에 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로마군의 훈련 내용은 완전히 개인의 전투력 향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캘트족에게 당한 이유를 분석한 결과였다.
로마군은 하스타티, 벨리테스, 트리아리, 프린키페스로 불리는 4개의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스타티는 젊은 병사들로 이루어진 경보병으로 전선의 맨 앞줄에 위차하여 적의 체력을 소모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쉽게 말해 칼받이, 요즘으로 치면 ‘총알받이’ 격이었다. 벨리테스 역시 매우 가볍게 무장하였지만, 하스타티와는 성격이 조금 다른 부대이다. 이들은 여러 개의 투창을 들고 다니며 전투가 시작되면 최전방에서 창을 던지는 임무를 맡았다. 즉, 다가오는 적에게 피해를 줘서 예봉을 꺾는 역할이었다. 대부분이 라틴 동맹국 (La Lega Latina, BC 7세기 무렵 ~BC 338년에 고대 로마 인근 라티움 지방에 있던 30여 마을과 부족들이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이웃 지역에 대항해 서로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해 만든 연합체)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는 특징이 있었다.
트리아리는 나이가 많은 고참병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들은 최후방에 위치하며 여러 가지 전술적 움직임에 동원되거나 불리한 전선에 투입되는 등의 보조적인 역할을 했다. 얼핏 보면 강력한 예비부대 같지만, 그보다는 ‘땜빵부대’란 말이 더 어울린다.
마지막으로 프린키페스는 로마군의 핵심이자 주력을 이루는 병력으로, 이들은 젊고 전투 경험이 풍부한 30대에서 40대 초반의 시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결정적인 공격으로 전투를 마무리짓는 역할을 했다.
초기에 로마군은 그리스식 갑옷을 입었지만 곧 ‘로리카 하마타’라는 쇠마늘(갈고리) 갑옷으로 갈아입게 되었다. 로리카 하마타는 1세기가 될 때까지 로마군의 표준 갑옷이 된다. 하지만 이 갑옷은 칼에 베이는 것을 막는 효과가 있지만 찔리는 것까지는 막아주지 못했다. 로마군의 ‘갈레아’투구는 둥근 형태에 그리스식과 마찬가지로 버컬러(뺨 가리개)가 있었고, 뒤쪽에는 작은 목 보호대가 달려 있었다. 당시 최선진국 군대답게 방어에 상당히 신경을 쓴 모습이다.
로마군의 방패는 ‘스쿠툼’이라고 불렸는데, 초기에는 그리스의 방패 호플론보다 조금 큰 정도의 타원형이었다. 로마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장방형의 스쿠툼은 중기 이후 로마 제국의 전성시대에 등장한 방패다. 스쿠툼은 나무판을 여러 겹 붙인 후 가죽과 철판으로 마무리하여 적의 창이나 활, 칼 등에 대한 방어력이 높았다. 하지만 나무와 가죽, 철팜이라는 재료의 한계상, 도끼와 같은 타격 병기에는 취약한 편이었고 길쭉한 직사각형이라 집단이 대형을 이루는 방식에는 유리했지만 개인이 사용하기에는 너무 크고 무거우며 거추장스러웠다. 실제 로마시대 이후로 방패의 크기는 점점 작아지고 아직은 냉병기가 주류였던 15세기쯤에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토크멘터리 전쟁사에 패널 샤를 이세환 기자가 쓴 [밀리터리 세계사]1편입니다.
2편 열심히 작업중이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현대전 전문이시라 그런지 고대사쪽은 쪼금 아쉬운점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