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보는 유튜브] 중동은 왜 싸우는가?

로오데 작성일 21.12.28 15:4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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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갈등과 대립, 지금 중동을 이해하기 위한 21개의 역사적 장면

 

‘중동’이란 말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유전에서 치솟는 검은 불길, 모스크에 모여 무릎을 꿇고 예배를 드리는 무슬림들, 히잡을 두른 여성들… 그리고 전쟁, 테러, 시위, 우리가 뉴스에서 접하는 중동 관련 뉴스는 아마도 난민, 전쟁, 인권 유린, 테러 등과 관련된 어두운 소식들이 주를 이룰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이 중동을 ‘화약고’로 표현합니다. 도대체 왜 중동은 화약고가 된 걸까요? 왜 중동 사람들은 자꾸 피를 흘리며 싸우는 걸까요?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리고 대답을 풀어가는 키워드는 ‘정체성’입니다.

 

- 들어가는 글

 

 

 

Scene 01 무함마드, 신의 계시를 받다 

 

이슬람 국가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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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세의 한 중년 사내가 산속 동굴에서 날마다 깊은 명상에 빠져 있었다. 그곳은 메카(Mecca) 인근의 하라 산이었다. 이슬람력으로 라마단월 하순 어느날, 그는 걷잡을 수 없는 힘에 붙들려서는 어디로부턴가 들려오는 음성을 듣게 된다.

“읽어라!”

사내는 대답했다.

“저는 읽고 쓸 줄 모릅니다.”

그러자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읽어라. 창조주이신 네 알라(하나님, 신)의 이름으로 , 알라께서는 한 방울의 응혈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꾸란 -96:1-2)

 

 사내는 훗날 이 목소리이 주인공이 천사 가브리엘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처음 그 목소리에 사로잡혔을 때에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 채 덜덜 떨기만 했다. 그 사내의 이름은 무함마드 메카에서 무역상을 하면서 부유한 삶을 살던 그는 언제부터인가 히라 산에서 명상에 빠져 들었다. 그러다가 서기 610년 라마단월 하순 어느 날, 천사를 통해 알라의 계시를 받게 된 것이다. 천사의 목소리를 듣게 된 무함마드는 몸을 떨며 기어가다시피 해서 겨우 집에 도착했다.

 

 천사를 통한 신의 계시는 이후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알라는 무함마드를 신의 뜻을 대신 전하는 ‘예언자’로 발탁했다. 그리고 알라를 알지 못한 채 다른 신을 섬기는 인류에게 올바른 길을 전하고 그들이 알라에게만 예배하도록 이끄는 역할을 맡겼다. 

 

 훗날 이슬람에서는 무함마드가 천사의 음성을 듣고 <꾸란>의 첫 번째 구절을 전달받은 밤을 ‘권능의 밤(알라 알-카드르<Laylat al-Qadr>)’이라고 일컫는다. 또한 모든 무슬림들은 바로 그날을 기려 라마단월 한 달 동안 금식을 하면서 지낸다. 지금도 라마단(Ramadan)은 이슬람 문화권에서 가장 큰 행사로 여겨진다.

 

 무함마드는 자신이 전하는 종교를 ‘복종’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슬람(Islam)'으로 칭했고 자신을 따르는 공동체를 ’움마(Ummah)'라고 불렀다. 당시 아라비아 중세 무역의 중심지였던 메카에는 빈부격차가 심했는데, 일부 권력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광경이 흔한 모습이었다. 예언자 무함마드는 이에 맞서 무슬림들 간의 평등을 강조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부르짖었다. 무함마드의 가르침은 유목민들의 수평적인 부족 문화와 맞물려 메카 사회 전반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나아가 무함마드는 메카에 만연하던 다신교 전통을 강력히 비판했다.

 

 “오직 유일신이신 알라에게만 예배하라!”

 

 

 

 

Scene 02 누가 예언자의 후계자인가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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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2년 고열로 쓰러진 예언자 무함마드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엄청난 카리스마로 거대한 움마(이슬람 공동체)를 이끌어간 지도자가 부재로 무슬림들은 당황했다. 무슬림들은 모범적인 삶을 살아간 무함마드가 알라의 선택을 받은 예언자이며 알라께서는 그에게 특별한 능력을 주어 인간들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하도록 했다고 믿었다. 현존하는 유일신 알라의 대리인이자 알라의 메시지를 완성한 최후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지닌 권위는 다른 사람이 대체 할 수 없는 탁월한 것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이를 둘러싸고 무함마드와 함께 초기 이슬람 세계를 확산시키던 무슬림들(이들을 ‘사하바’라고 한다)은 두가지 견해로 갈라졌다. 한쪽은 무함마드의 혈족이 후계를 이어야 한다는 주장(시아파), 또 다른 하나는 신에 대한 경건함을 지닌 그리고 무슬림들의 모범이 되는 사람 중 유능한 인물이라면 혈통과 상관없이 예언자의 후계자로 선출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수니파).

 전자를 따르는 이들은 예언자의 혈족이라면 보통 사람과는 달리 분명 뛰어난 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시 이런 관념은 자연스러웠다. 부족 중심 사회였던 아랍인들 입장에서 부족장의 후계자는 그의 혈족이 이어받는 일이 당연한 것이었다. 

 

 이슬람 공동체 원로들은 무함마드의 후계자를 선출하기 위한 모임을 가졌고 결국 아부 바크르가 초대 칼리파로 선출됐다.

칼리파로 선출된 아부 바크르는 아라비아 반도 정복을 완료했고 이슬람 세계의 팽창을 위한 정복활동을 지속해나갔다.

 

 634년 아부 바크르는 불과 27개월이라는 짧은 치세를 뒤로 한체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병이 악화될 무렵 아부 바르크는 우마르 이븐 알카타브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2대 칼리파 우마르는 사산조 페르시아를 물리쳐 이슬람 제국을 확장한 정복자였으며 제국의 기틀을 다진 법률가이자 입법자라는 대업을 남겼다.

 

 우마르는 페르시아 출신 노예에게 암살당해 생을 마감했다. 그가 칼리파에 오른지 10년만의 일이다. 우마르의 측근들은 우스만 이븐 아판을 3대 칼리파로 선출했다.

 우스만은 전임 칼리파 우마르가 임명했던 총독들을 해임한 후 그 자리에 자신의 가문 우마이야가의 인물들을 지방총독에 앉혔다. 폭정에 한거하여 반란이 일어나자 반란군과 면담 하던중 정문을 지키던 호위병 몰래 벽을 넘어 칼리파 우스만을 살해당한다. 

 

 어찌됐든 우스만이 죽은 후 드디어 알리가 4대 칼리파로 등극한다. 수니파 이슬람에서는 초대 칼리파 아부 바크르부터 4개 칼리파 알리까지 4명의 칼리파를 일컬어 ‘라쉬둔(Rashidum)이라고 한다. ‘올바른 길을 간 칼리파’라는 뜻이다. 수니 이슬람에서는 라쉬둔이 통치했던 시기를 후대가 본받아야 할 이슬람의 황금기로 묘사한다.

 

 알리가 칼리파에 오르기 위해 우스만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소문이 제국 곳곳에 들불처럼 번졌고 사하바 원로인 탈라하와 주바이르 등의 예언자의 젊은 아내였던 아이샤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아이샤와 알리는 무함마드의 친족으로 집안 식구였으나 서로 견제하는 입장이었다. 예언자의 총애를 받았던 아이샤는 무함마드가 죽은 이후에도 종종 자신의 권위를 칼리파 위에 두려고 했다. 예언자가 살아 있을 때에 남긴 언행을 누구보다 잘 기억하고 있었던 그녀는 <꾸란>의 편집과 해석에 대해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칼리파와 아이샤의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알리는 659년 카와리지 세력을 공격해 퀘멸시켰다. 그러나 이공격에서 살아남은 카와리지 중 한 명인 이븐 물잠이 661년 쿠파의 대모스크에서 알리를 암살했다. 이처럼 라쉬둔의 시대는 우마르 이후 3명의 칼리파가 모두 암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의 연속이었다.

 

 알리가 죽자 그의 아들 하산 이븐 알리가 추종자들에 의해 칼리파로 추대됐다. 이제 하산과 무아위야, 두 명의 칼리파가 경쟁하게 됐다. 무아위야는 이집트와 아라비아 반도를 자신의 수중에 넣고 세력을 점점 더 확장해나갔다. 반면 하산을 비롯해 알리를 지지한 사람들은 이라크를 근거지로 한 지방세력에 지나지 않았다. 무아위야는 하산에게 많은 돈을 주며 양위할 것을 요구 했다. 힘으로 무아위야를 당해 낼 수 없었던 하산은 결국 퇴위를 선언하고 무아위야를 칼리파로 인정했다.

 살해된 알리가 속해 있던 하심 가눔을 포함해 알리를 따르던 사람들은 이슬람 세계의 주도권을 우마이야가문에 내주고 말았다. 

 

 이후 알리를 지지했던 무리들을 ‘시아트 알리(알리의 무리)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이슬람의 소수파인 ‘시아파’의 유래가 됐다. 이들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가계에서 후계자가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예언자의 혈통이 아닌 능력에 따라 후계자를 지지했던 이들을 일컬어 ‘수니파’라고 부른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 ‘순나(sunnah)를 따르는 자들이란 의미이다. 무아위야 이후 혈통보다 능력을 우선시하는 수니파가 이슬람의 다수파가 됏다. 

 

 수니파의 지도자가 칼리파라면, 시아파의 지도자는 ‘이맘’이다. 수니파에게 ‘이맘’은 이슬람 신학자인 울라마들 중에서 예배를 이끌 자격이 있는 이들에게 붙이는 존칭인 반면 시아파에서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종교 지도자를 의미한다.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사위 알리를 초대 이맘으로 추앙했다. 그리고 알리의 장남 하산이 2대 이맘, 카르발라에서 죽은 후세인이 3대 이맘으로 추대됐다.

 

 이슬람 세계는 두명의 칼리파, 즉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 칼리파와 카이로의 파티마 왕조 칼리파가 경쟁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1174년경 수니파 술탄 살라딘에 의해 파티마 왕조는 멸망하게 되고 시아파의 정치적 위세가 약화됐지만 16세기 페르시아 지역에 사파비왕조가 다시 등장하면서 시아파가 수니파의 아성을 위협하는 존재로 떠올랐다. 

 

 소수세력인 시아파의 경우 탄압을 피해 지하로 숨어들어 발전했기에 다양한 형태로 변형됐다. 12이맘파와 이스마일파 외에도 여러 갈래의 시아파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신비주의 또는 기존 민간신앙과 결합하는 등 한결 더 유연한 형태를 보인다. 이 때문에 훗날 와하비즘과 같은 수니파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에서는 시아파를 이단으로 여겨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했다.

 

Scene 03 술탄 메흐메드 2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다

 

튀르크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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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흐메드 2세는 오늘날까지 터키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술탄이다. 그의 별명은 ‘파티히(정복자)다. 무려 1100년 동안 유럽의 심장 역할을 하며 오리엔트 세력과 맞서 기독교 문명을 수호해온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비잔틴 제국을 정복해서 얻은 별명이다. 그는 자신의 제국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곳만 정복한다면 동서무역로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어 나라가 부유해질 테고, 유럽으로 진격하기 위한 발판이 마련되어 대대적인 영토 확장의 기회가 생겨날 것이 분명했다.”

 

 

책 저자, MBC라디오 피디 박정욱 작가가 직접나와 씨리즈로 책과 중동이야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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