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5번 글에 대한 반론

H.Wolf 작성일 05.04.22 12: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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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207:+::+::+::+::+::+::+::+::+::+::+:이번에도 미스테리는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우선 더 이상 종교적인 부분에 입나불거리지 않겠다는 말을 어긴거에대해서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종교적분쟁보다는 사실을 알자고 하신 shimize님을 말에 따라 저도 퍼왔습니다.
이글을 보시면 왜 한쪽의 편향된 글이 논쟁의 꺼리가 되지 못하는지 아실껍니다.
다른님들께 다시한번 사죄드립니다.

이글은 야후 백과사전에서 퍼온글이구요.
내용이 너무 길어 부분 편집하였습니다.

윗부분 생략(로마가톨릭과 기독교의 과거사에 대한 부분입니다.)

한국에서 로마가톨릭교회는 보통 천주교로 알려져 있고, 프로테스탄티즘은 개신교 또는 기독교로 부르고 있는데,

--- 중간 생략 ---

일제강점하에서 가톨릭교와 프로테스탄트교는 신사참배의 강요와 선교사들의 추방, 조선교회의 약세화 등 일제의 탄압 속에서 역사참여와 민족 구원의 열망을 대변하였다.

가톨릭교는 비록 독립운동에 전교회적으로 참여하지는 못했으나 평신도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안중근(安重根)·서상돈(徐相敦)은 독실한 가톨릭신자였으며, 강화·광주 등지에서는 가톨릭교인이 만세시위의 주동적 역할을 하였고, 3·1운동으로 인하여 53명의 가톨릭신자가 투옥되었다.
1920년대에 들어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40년대에 이르러 외국인 교구장을 일본인 교구장으로 대치하고, 외국인 선교사들을 추방·구금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교구는 발전하여 19l1년에는 조선교구에서 대구교구가 분리되었고, 동시에 조선교구는 서울교구로 개칭되었다.
20년에는 원산교구가, 27년에는 평양교구가, 28년에는 연길교구, 37년에는 전주교구와 광주교구, 39년에는 춘천교구가 설정되었다.
그리고 전주교구가 한국인 성직자에게 맡겨짐으로써 처음으로 방인교구(邦人敎區)가 탄생하였으며, 이어 서울교구장직이 한국인 신부 노기남(盧基南)에게 넘겨짐으로써 처음으로 한국인 교구장·주교가 탄생하였다.

프로테스탄트교회도 일제의 탄압 아래서 전국적인 조직과 해외선교, 그리고 농촌·사회운동을 통해 민족교육의 장으로 되어 갔다.
장로교회는 12년 총회를 조직하여 처음으로 전국적인 조직을 이루었으며, 감리교회는 토착화 신학을 발전시켜 나갔다.
프로테스탄트교회는 이와 같은 저력으로 3·1운동에 임하여 독립의 기치를 내걸고 앞장섰다.
길선주(吉善宙)·유여대(劉如大)·오화영(吳華英) 등 16명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국내의 각지로 선언서의 배포 및 연락을 취하여 일제히 3·1운동에 참여하였다.
프로테스탄트교 주도하의 독립시위운동은 전국적으로 총 117회에 달하였다.
1925년부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와 대한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YWCA), 예수교연합공의회를 중심으로 농촌운동이 전개되었는데, 29년에는 전국 27개 도읍에 대규모 농촌강습소를 개설하여 농촌개량·농사기술·협동조합·법률문제·의식화교육 등을 이끌어 나갔다.
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절대 통제를 위해 신사참배 강요에 나서 교회의 굴복을 강요했다.
교회는 신사참배 거부의 자세를 굳혔는데, 이 문제로 신학교가 폐쇄되고 200여 교회가 문을 닫았으며 2000여 신도가 투옥되고 50여 교역자들이 순교하였다.
전쟁 말기가 되자 일본의 탄압은 더욱 가혹해져 교회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던 선교사들은 한국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38년 YMCA와 YWCA를 해산하여 일본 YMCA에 종속시켰고,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또한 해산되어 조선기독교연합회로 변질되었으며, 40년에는 침례교를, 43년에는 안식교와 성결교회를 폐쇄했다.
교회의 실질적 말살을 꾀하였던 일본은 남은 교회들마저 해체, 병합하여 조선교단을 만들어 일본교단에 종속시켰다.

이하 생략

필요한 부분만 편집했는데도 꽤 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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