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을 보지도, 소리도 듣지 못했던 헬렌 켈러가 만약 사흘의 시간 동안 눈을 뜨고 귀가 열렸다면 무엇을 가장 하고 싶었을까?
(산해. 2005)은 헬렌 켈러가 대학 2학년 때 쓰기 시작한 ‘내가 살아온 이야기`와 그녀 나이 53세에 쓴 에세이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을 엮은 에세이집이다.
태어난 지 19개월 만에 열병으로 시력과 청력을 잃고 일곱 살 때 평생의 은사인 가정교사 앤 설리번을 만나, 장애를 딛고 하버드 부속 래드클리프 대학을 졸업한 헬렌 켈러는 남다른 감수성으로 심금을 울리는 명문장들을 남기기도 했다.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제목으로 적은 소망들은 새삼 우리에게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깊은 감사와 반성을 하게 만든다.
첫째 날 보고 싶은 것은 ‘친절과 겸손과 우정으로 내 삶을 가치 있게 해준 사람들`을 꼽았다.
“첫째 날은 아주 바쁠 것 같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친구들을 모두 불러 모아 그들의 얼굴을 오래오래 들여다보며 그들 내면에 깃든 아름다움의 외적인 증거를 가슴에 새길 겁니다. 그토록 바쁜 첫째 날에 내 작고 아담한 집도 돌아보고 싶습니다. 내가 밟고 있는 양탄자의 따뜻한 색깔, 벽에 걸린 그림들, 집안을 아기자기하게 꾸미고 있을 친밀감 넘치는 장식물들도 보고 싶네요. 내 눈은 내가 읽은 점자책들 위에 경건하게 머물 것입니다. 그것들은 눈이 보이는 사람들이 읽는 인쇄된 책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겁니다. 기나긴 밤과도 같았던 내 인생에서 누군가 읽어준 책과 내가 읽은 책은 인간의 삶과 영혼의 깊고 어두운 길을 밝혀주는 빛나는 등대였기 때문입니다”(본문 중)
겸손함이 자연스레 드러나는 첫번째 소망이다. 삶을 개척해 나가는 데 가장 큰 존재자였던 설리번 선생님을 가장 먼저 뵙고 싶다고도 말한다.
둘째 날 보고 싶은 것은 `밤이 낮으로 바뀌는 기적’이다.
“태양이 잠든 대지를 깨우는 장엄한 빛의 장관은 얼마나 경외로울까요. 나는 이날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세상의 과거와 현재를 바라보는 일에 바치고 싶습니다. 인간의 진화 과정이라는 시대의 만화경을 들여다보고 싶은 바람이랄까요. 그 많은 것을 어떻게 하루 만에 보느냐? 박물관을 찾을 생각입니다. 예술을 통해 인간을 영혼을 탐색하는 일에 둘째 날을 바치고 싶습니다. 손으로 만져보고 알던 것들을 나는 이제 눈으로 봅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새로운 기쁨을 발견하고 싶은 마음에 들떠 또다시 새벽을 맞이할 것입니다. 나는 앞을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겐 매일매일 밝아오는 새벽이 영원히 반복되는 아름다움의 계시일 거라고 확신합니다“(본문 중)
우리가 매일 보는 낮과 밤의 변화를 보는 것이 소망이라고 말하는 간절함이 가슴 깊이 와 닿는다. 낮에 박물관과 미술관을 갔다면 헬렌켈러가 저녁에 보고 싶은 것은 연극과 영화다.
사흘째인 마지막 날은 현실세계에서 사람들이 일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은 날이다.
“이날은 내가 볼 수 있는 셋째 날이자 마지막 날이군요. 비록 상상으로 만들어낸 기적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후회나 아쉬움 따위로 낭비할 시간이 내겐 없답니다. 봐야 할 것이 너무나 많거든요. 첫날은 친구들과 가까운 동물들에게 바쳤습니다. 둘째 날은 인간과 자연의 역사를 공부하느라고 보냈습니다. 오늘은 현실세계에서 사람들이 일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구경하며 보낼까 합니다. 그러자면 뉴욕만큼 활동이 왕성하고 수많은 상황이 연일 벌어지는 곳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뉴욕을 행선지로 정하겠습니다”(본문 중)
뉴욕의 곳곳을 둘러보며 그 안에서 분주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열망에서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이 느껴진다.
헬렌켈러는 "내가 장님이기 때문에, 앞이 잘 보이는 사람들에게 시각을 잘 활용하는 방법을 알려줄수 있다"고 말했다. 방법은 바로 내일 장님이 될 사람처럼 귀하게 모든 감각기관을 사용하는 것이다. 내일 귀가 안 들리게 될 사람처럼 음악을 듣는 다면 그 소리는 어제의 음악소리와 완전히 다른 소리로 느껴질 것이다.
‘인간승리’가 무엇인지 보여준 헬렌 켈러의 삶은 비관과 낙심이 들어올 틈새가 없던 의지의 삶이었다. 너무나 순수했지만 결코 나약하지 않았던 그녀의 영혼이 투영된 에세이 두편이 쉽게 잊혀지지 않는 감동을 준다. [파이뉴스 정미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