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민은 웨이터가 날라온 접시를 일행이 앉은 테이블의 오른쪽에 놓았다. 접시 위에는 아시안 스타일의 스파게티, 더 간단히 말해서 간장 소스로 만든 스파게티가 가볍게 김을 내고 있었다.
“이건 누가 시킨거야 ?” 박상호가 물었다.
“내가 시켰어. 왜 ?” 최소희가 대답했다. 최소희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난빵에 카레소스를 찍어먹다가 대답했다.
“아니, 뭐, 그냥…” 박상호는 이런 족보없는 음식을 시킨 것에 대해 뭔가 핀잔을 주려다가 참았다. ‘이쁘니까 참자.’
“사실 이거 니가 좋아할 것 같아서 시켰어.” 최소희는 씨익 웃으면서 이재원에게 말했다. 안경을 쓴 이재원은 어리둥절해했다. “어, 내가 이거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았어 ?”
최소희는 포크와 스푼으로 스파게티를 덜어 재원이의 접시에 놓아주며 말했다. “넌 뭐든지 간장이 들어간 걸 좋아하는 것 같드라. 전에 일본 라멘집에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미소라멘 시키는데 너 혼자 소유라멘 시키는 것도 기억나는 걸. 치킨도 간장 양념이 된 거 좋아하고.”
박상호는 인상을 조금 구겼지만 할 말은 따로 없었다. 김태민은 아까부터 상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는데, 서둘러 뭔가 화제를 돌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희야, 너 이번에 모이면 재미있는 이야기 해줄 것이 있다고 했었쟎아. 그 이야기나 좀 해봐라.”
최소희는 기다렸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짐짓 엄숙하게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손을 들어 포도주 잔을 잡고 한 모금을 마시고는 태민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사실 재미있다기보다는 어처구니가 없는 이야기야. 글쎄, 사실 난 좀 무서웠어.”
박상호는 몸을 앞으로 내밀며 팔꿈치를 식탁에 올렸다. “무슨 일인데 ? 난 도통 아무 소리를 못 들었는데 ?”
최소희는 말을 이었다. “내가 최근에 과외 알바 뛰고 있다는 이야기 했었나 ?”
박상호는 눈쌀을 찌푸렸다. “니가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알바질이냐 ? 왜, 하는 일이 잘 안돼 ?”
재원은 뭐라고 말을 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태민은 속으로 혀를 찼다. ‘상호 니가 소희에게 어필이 안되는 이유가 있는거야, 이 멍청아.’
최소희는 상호를 아예 무시하고 재원을 쳐다보며 말했다. “나 이제 곧 전세 만료일이 되는데, 요즘 전세값이 많이 올랐쟎니.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현재 하는 번역일 가지고는 아무리 모아도 전세값 못올려 주겠더라고. 그래서 다시 알바’질’을 시작했어.” 소희는 일부러 ‘질’자에 힘을 주어 말했다.
재원은 포크로 소희가 덜어준 스파게티를 뱅뱅 꼬면서 물었다. “일주일에 몇번 가는 건데 ? 너 지금 하는 번역 일도 시간이 럴럴한 편은 아니라며 ?” 그의 목소리에는 소희에 대한 배려가 묻어났다. 그의 목소리는 맑으면서도 깊어서, 다들 대학시절에 성우를 해보라는 권유를 하곤 했었다. 마침 상호가 주문했던 훈제 연어 요리를 가져온 웨이터도 재원의 목소리에 약간 놀랐다는 듯이 그의 얼굴을 힐끗 쳐다볼 정도였다.
소희는 웨이터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며 고맙다고 말하고는, 다시 재원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 뭐, 괜찮아. 일주일에 4시간하고 한 달에 50만원이면 결코 작은 돈이 아니지. 지금 이 나이에 삼각함수와 확률을 다시 공부한다는 건 확실히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말이야.”
상호는 코웃음을 쳤다. “아니, 한 달에 50만원씩 모아봐야 얼마나 된다고 ? 이제 곧 전세 만료일이라며 ?” 상호는 ‘모아봐야’ 라는 단어를 말하는 순간 이미 자신이 말 실수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나오기 시작한 말을 도중에 걷어들이기도 늦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로 알고 있었다. ‘젠장.’
상호에게 세상은 불공평했다. 재원이 같은 가난뱅이가 한 달에 50만원씩이라고 말하는 것과 자신 같은 부잣집 아들이 한 달에 50만원씩이라고 말하는 것은 달랐다. 여기서 돈을 한턱 쏜다고 한 사람이 자기인 경우에는 특히 더 조심해야 했었다.
최소희는 실실 웃었다. “그래서 말이야, 결국 전세를 월세로 돌리게 되었걸랑요. 예 ?”
태민이가 다시 나섰다. 짐짓 의젓하게, 나이프로 자기 포도주잔을 댕댕 가볍게 두드렸다. “자자, 또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진다. 소희야, 그 이야기.”
최소희는 다시 포도주를 한잔 찔끔 마셨다. 털털한 성격의 그녀도 슬슬 열이 받는 눈치였다. 그녀는 냅킨으로 입술을 닦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그래도 학교 다닐 때 끈이 아직 살아있었거든. 그래서 꽤 잘사는 집에 자리를 얻었어. 중학교 3학년짜리 여자애였는데, 뭐 부잣집 애치고는 ‘싸가지’도 있는 편이었지.”
태민이는 점점 어두워지는 상호 표정을 보면서 자기도 초조해졌다. “그랬는데 ?”
소희는 말을 이었다.
“일이 생긴 건 올해 여름에 그 애가 미국에 여름 어학연수 다녀오고 나서였어. 뭐 난 월급도 그대로 나오면서 3주간 덩달아 방학이었으니까 얼마나 좋았겠어 ? 그런데 말이야, 3주 후에 아이가 돌아와서 첫번째 수업을 갔더니, 애가 변했더라고.”
재원이 물었다. “왜 ? 애가 유령이라도 보인대 ?”
소희가 흠칫했다. “어, 너 어떻게 알았어 ?”
연어조각에 레몬즙을 뿌리던 태민의 손이 딱 멈췄다. 일순간 식탁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소희는 다시 그 시원스런 웃음을 씨익 지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왜, 섬찟해 ?”
재원이 웃으면서 말했다. “야야, 좀 무섭다. 진짜야 ?”
소희는 말을 이었다.
“3주 만에 다시 본 그 애는… 글쎄, 뭐라고 해야 하나 ? 암튼 뭔가가 변했어. 음… 그 눈빛. 그 눈빛은 아이의 눈빛이 아니었어.”
태민이 말을 도왔다. 태민은 이들이 대학생 시절 한동아리 친구였을 때부터 어느 누구와도 잘 어울렸고, 같이 있으면 항상 도움이 되는 친구였다. “뭐야 그럼. 어른 눈빛이라는 이야기쟎아. 어른 눈빛이라는 것이 따로 있나 ?”
소희는 잠깐 생각했다. “맞아. 어른 눈빛이라고 할 수 있어. 그것도 남자. 그리고 약간 제 정신이 아닌 듯한. 그래, 그렇게 말할 수 있겠군. 정말 그 아이 눈을 보는 순간 뭔가 철렁하는 느낌이 왔어.”
재원이 재촉했다. “계속 해봐.”
“그렇다고 애한테 당장 ‘너 눈빛이 왜 그래’ 하고 물을 수는 없는 거 아니겠어 ? 일단 수업을 시작했지. 근데 당연하다고 할까 ? 아이가 수업에 집중을 안 하는 거야. 결국 내가 못 참고 물었지. 너 대체 왜 그러냐고.”
상호가 물었다. “그랬더니 ?”
“그랬더니 대답은 하지 않고 엉뚱한 질문을 하는거야. ‘선생님, 그거 아세요 ? 선생님이 무서운 사람이라는 거 ?’. 그래서 내가 ‘뭐 ? 그게 무슨 소리니 ?’ 하고 물었지. 그랬더니 그 애가 하는 말이, ‘그 사람이 선생님이 무섭대요. 선생님 들어오니까, 무섭다면서 나갔어요.’ 하는 거야.
태민은 어리둥절했다. “뭐래는 거야 ? 그 사람이 유령이야 ?”
소희는 핀잔을 주었다.
“그냥 들어봐. 나도 같은 말을 했었어. ‘무슨 소리니 ? 그 사람이라니 ?’
그 아이가 그러더군. '미국에서 수영하다가 만난 귀신이요.'
난 그때까지만 해도, 애가 수업하기가 싫어서 장난을 치는 것인가 했어.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그게 아닌거야. 얘네 집이 좀 잘사는 편이라고 했쟎아 ? 미국에 어학연수를 갔다가, 거기 풀장에서 수영도 하곤 했는데, 한번은 애가 발에 쥐가 났었나봐. 물에 빠졌지. 결국 거기 라이프 가드가 애를 건져내서 인공호흡도 시키고 해서 살려냈는데, 그때부터 애한테 귀신이 붙은 모양이더라고."
박상호가 입을 딱 벌렸다. "세상에."
이재원이 물었다. "그래, 귀신은 전에 사람이었대 ?"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