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중세의 마녀사냥

글로리Si 작성일 07.12.11 22:15:40
댓글 5조회 2,531추천 2
서양 중세의 마녀사냥


1. 머 리 말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마녀는 여자의 모습을 한 악마의 총칭 이라는 사전적 의미가 있다.

오늘날 "마녀사냥(witch hunt)"이란 말은 희생양 찾기 즉, 어떤 상상의 음모를 폭로하고 일소화 하려는 목적으로 순진무구한 사람들을 몰아부쳐 파멸시키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서양 중세에 있어 소수 집단 - 이단자, 마녀, 유대인, 창녀, 동성애자, 문둥이등 - 에 속한 많은 사람들은 언제든지 이러한 집단 정신의 희생자들 이었다.

그 중에서 마녀는 최고의 희생자들이었다.


서양 중세의 시대적 상황과 마녀 사냥에 있어 그 기원과 전개, 그리고 처벌방법등에 대해 살펴 보도록 하겠다.



2. 중세의 시대적 상황



중세에 지속적으로 형성되어온 주제들이 있다.

당국과 일탈 세력간의 알력, 공동체와 개인주의간의 갈등, 물질주의와 정신주의 간의 대립, 그리고 성애주의와 금욕주의간의 긴장등이 바로 그것 들이다.

이 양 극단 사이에서 영속적인 왕복 운동을 하는 진자처럼 대립 세력들간의

갈등 상태가 밀물과 썰물처럼 밀려왔다 빠져나가고, 달처럼 찼다가 기울었다.

당시의 사회는 빈발하는 기근 및 질병과 더불어 왕왕 일어나는 인구 위기나 사회 혼란을 배경으로 광란과 편집증, 폭력과 열정이 갑자기 폭팔할 수 있는 그런 사회였다.

중세 사회는 위험한 소외 집단한데 도덕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감염될 우려가 있으므로, 유대인이며 문둥이며 창녀 등을 격리시키고 '치욕의 배지'로써 낙인을 찍었던 것이다.

문둥병의 원인을 성범죄로 돌리고, 대홍수와 흑사병 같은 재앙의 책임을 남색 탓으로 전가하고, 이단자며 남색가며 마녀를 처벌하기 위해 정화(淨化)의 불을 사용하는 등-이 모든 것은 규범으로부터 일탈하지 말라는 경고를 강하게 전해주는 것이었다.



3 . 중세 유럽에서 본 마법과 마녀



중세인들은 세금, 질병, 전쟁, 기근, 죽음, 지옥,등에 대한 공포의 세계에서 살았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것, 어둠의 세력의 힘, 이 세상에서 활동하는 사탄과 그의 하수인인 악마의 기능을 믿었던 사회이다.

중세 사회는 또한 기근, 역병, 폭풍우, 홍수, 흉작, 가축 폐사등과 같은 갑작스런 천재와 발기 불능, 불임, 사산, 유아 사망 등과 같은 빈발하는 가족 문제를 해명해주는 편리한 수단이었던 마법을 믿었던 사회이다.

분만시 유아가 사망하면 산파가 마법 혐의의 과녁이 되기 십상이었다.

까닭 모를 갑작으런 죽음은 흔히 마법 탓으로 돌려졌고 사랑을 부추기거나 약화 시키고 건강을 회복하거나 악화시키는 일에 마녀의 도움이 적극적으로 추구되었다.

마녀가 이용하는 필수 도구는 연고며 물약이며 미약이며 주문이며 부적과 밀납상 등이었다.

서유럽의 마법은 다른 모든 마법과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을 하나 갖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아니라 유럽에서 마녀는 사탄(마왕)의 시녀로 간주되었다는 점이다.

중세 말 경에는 마녀가 기독교를 비난하고 자진하여 사탄을 섬기면서 마왕과 협정을 맺는 한결 같은 모습이 꾸준히 발전하였다.

마녀는 마왕과의 성교로써 이 협정을 조인하였다.

마녀들은 식인 행위와 성적 향연을 벌이고 기독교 의례를 불경스럽고도 어설프게 모방한 정규적인 마녀들의 야연(夜宴)에서 서로를 만났다.

마녀는 동물 모습을 한 하인들을 거느리고 날아다니는 힘을 향유하며 때로는 변신하는 능력도 갖고 있다.

마녀는 악을 수행하는 능력도 갖고 있다. 마녀는 악을 수행하는 능력을 받았다.

마녀는 기독교 세계의 토대를 붕괴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전 세계적인 악마적 음모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마왕의 사주를 받은 마법은 따라서 기독교의 포괄적인 역상이요 대안적 신앙이었다.

사탄과 그의 악마들은 하느님과 그의 천사들의 대적자들이었다.

그들은 선보다는 악을 찬양하고 영보다는 육을 권장하였다.

기독교가 독신 생활을 가장 칭송한 반면 사탄 숭배자들은 난잡한 성을 찬양하였다.

그들의 의례는 기독교 제의를 어설프게 모방하였는데 기독교 상징을 공공연히 욕되게 하고 빵과 포도주에 어린이 유골제를 섞어 성체 변화의 교의를 조롱하였다.

살인이며 식인이며 * 상간이며 유아 살해며 난잡한 성행의 등과 같은 그들의 습속은 기독교 교회가 가장 근심스런 눈초리로 주시했던 관습들이다.

아마도 가장 흥미 있는 것은 마녀가 주로 *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마녀가 마왕과 교접하는 행위는 기독교의 영세 의식에 해당한다.

무차별적인 성정향연은 그들의 의례에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이것은 성에 대한 기독교의 유서 깊은 우려를 직접으로 반영하며 또한 중세 문화의 한 구성 요소인 여성에 대한 의혹과 혐오감을 부각시켜주었다.



4. 마녀의 기원

마녀탄압의 가장 오래된 예는 기원년전 1200년의 이집트에서 있었고, 그리스에서는 데모스테네스의 시대(bc 4세기)에 한 사람의 마녀가 처형되엇고, 로마에서는 네로와 카라카라 황제에게 심하게 박해 받았고, 그리스도교에 개종한 직후의 콘스탄티누스 황제 ( ac 4세기)와 프랑크 왕구의 샤를르대제(ac 9세기)도 주술을 금지한 엄격한 법령을 선포하는 등, 마녀와 그 주술에 대해 탄압과 박해를 가한 예는 드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과 박해는 마녀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행하는 반사회적인 범 죄에 대한 것이었다.

마녀 선풍기 이전에는 마녀에 대해 매우 관용적이고 탄압도 극히 미온적이었을 뿐 아니라 마녀에 대해 온정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1300년을 경계로 하여 사태는 일변한다.

마녀에 대한 교회의 태도가 돌연 강경해진 것이다.

마녀 선풍은 13세기 무렵에 프랑스에서 불기 시작하여 결국 모든 그리스도교 국가, 즉 서유럽 전역을 황폐화시키고 17세기 말에 그 여 파가 신대륙 아메리카에 퍼진 후 급속하게 진정되었다.

수만, 수십만의 마녀가 교살당하고, 혹은 교살당한 후에 불태워지고, 또는 살아있는 채로 불태워져 죽었다.

1590년에 독일을 여행했던 여행자는 적고 있다.

제네바에서는 3개월 동안 5백명(1513년),트 레이브즈(독일)에서는 7천명이 물태워진 탓에 두 개의 마을이 전멸되고, 다른 두 개 마을에서는 여자 2명만이 살아 남았을 뿐이다.(1580년).

작센에서는 하루사이에 1백 33명(1589년), 알사스의 마을 상 아라만에서는 1년 동안 2백명 이상(1596년), 라부르에서는 4개월 동안 6백명(1609년), 스트라스부르크에서는 5천명(1615∼55년), 뷔르츠부르크에거는 8백명, 밤베르크에서는 1천 5백 명..이러한 마녀선풍의 특이한 점은 합리주의와 휴머니즘을 표방한 르네상스의 최전*에 휘몰아쳤다는 것,

이 선풍의 선두주자였 던 이들이 교황, 국왕, 귀족, 당대의 일류의 대학자, 재판관, 문화인이었다는 것, 마녀의 존재가 옛부터 존재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국가 그리고 공적 권위와 권력들이 전국적인 조직망을 둘러침으로써 행해졌다는 것, 1600년을 절정하는 하는 전후 3, 4세기 동안에 한정된다는 것 등이다.



5. 중세 각 국의 마녀사냥

1)프랑스의 마녀 사냥

마녀 사냥이 프랑스에서만 있었을까? 아니다.

물론, 마녀들을 처형한 국가들의 순위를 따지자면 프랑스는 분명히 상위권에 들겠지만, 상당히 많은 유럽 국가들 역시 2세기가 넘도록 사람들이 사탄과 계약을 맺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기는해도, 마녀 재판이 어디서나 똑같은 규모로 진행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독일과 스코틀랜드는 전과에서 단연 선두를 달렸다.


2)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에서 백마법의 예언자들과 신봉자들을 겨냥한 칙령을 공포하면서 축제까지 벌인 것은 바로 그 아름다운 메리 스튜어트였다.

그 결과, 4천 4백 명의 마녀들이 화형을 당하였다.

고문 자체가 무자비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나 횟수에도 아무 제한이 없었다.


3)독일

라인 강 연안의 독일에서는 특히 마녀들을 잔인하게 탄압하였다.

바바리아 지방의 밤베르그는 1627년에 세워져 열두 가지 종류의 고문을 자행했던 <마녀 전용> 감옥뿐만 아니라, 빠른 화형 집행 속도와, 결국에는 한 줌 재로 변한 마녀들의 숫자 (23년만에 1천 8백 명) 로도 유명하였다.


4)잉글랜드


잉글랜드에서는 처형당한 마녀들의 숫자가 약 천여 명으로 추산되는데, 이것은 다른 곳보다, 심지어는 비교적 마녀 사냥이 일찍 막을 내린 스페인보다도 상당히 적은 숫자이다.

마녀가 지신의 무죄를 직접 증명해야 했던 다른 국가에서와는 달리 잉글랜드에서는 고발을 한 사람이 마녀의 유죄를 증명해 보여야만 하였다.


아마도 이 같은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것인 듯, 마법을 행하는 데 쓰였다는 혐의가 가는 동물들을 산 채로 불테웠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마녀들에게 직접적으로 고통을 안겨주고 화상도 입힐 수 있다는 계산을 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는 힌 가지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즉, 밀고 행위를 한 아이들의 숫자가 그것이다.


5)폴란드


폴란드는 뒤늦게 18세기 초부터 마녀들을 사냥하기 시작하였다.


6)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는 화형대를 거의 세우지 않았다.


7)아일랜드

아일랜드는 화형대를 열 개도 채 안 세운 나라이다.


8)스페인

스페인의 마녀 재판은 그 잔인성으로는 유명하지만, 실제로 사냥당한 마녀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오직 바스크 지방만이 피해를, 그것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9)이탈리아

종교 예식과 관련된 마술이 널리 퍼져 있던 이탈리아에서는 종교 재판이 매우 관대하게 이루어졌다.

오직 북부 지방에 사는 사람들만이 불안해 하였고, 반면 마술이 일상 생활의 일부를 이루고 있던 남부 지방에서는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프랑스의 경우, 모든 지방이 똑같이 피해를 입었던 것은 아니다.

북부와 서부 지방에서는 알??산맥과 부르고뉴까지 큰 피해를 입었고, 남부에서는 바스크 지방과 베아른 지방이 마녀 사냥을 완전히 모면했고, 노르망디에서는 마녀 사냥이 겨우 몇 가지 일화로나 남을 수준에서 끝나 버렸다.

오늘날에는 마술로 유명한 바로 이 두 지역이 말이다.




6 . 마녀에 대한 처벌과 재판


1)체포와 수사


마녀는 먼저 풍문에 의해 적발되었다.

누구누구가 마녀라고 하는 소문이 나고 이들을 체포하고 이웃의 부합하는 진술에 기초하여 고문에 의해 마녀로 둔갑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미 마녀로서 소추 받은 자 가 심문과정에 자신이 아는 마녀를 지명하는 경우 체포된다.

그 뿐 아니라 마녀의 자식도 마녀로 간 주 되었다.

그 자식들은 때로는 고문에 의해 마녀로 조작되거나, 어떤 때에는 고문도 없이 그냥 화형 당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희생자들 가운데는 시비를 가릴 줄 모르는 유아들이 발견되는 것은 대체로 그 들의 모친이 마녀였기 때문이다.

피의자가 수사과정에서 밤중에 집에 있지 않았거나 행선지를 대지 못하는 경우 '마녀회의'에 참석한 근거가 되었다.

고문을 가하는데도 비명을 지르거나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경우 마녀의 징표가 되었다.

체포되면서 지나치게 놀라는 모습이 마녀의 징표로 여겨지는가 하면 지나치게 차분한
것도 마녀의 습 성으로 간주되었다.

결국 마녀로 한 번 의심을 받게 되면 마녀로 만들어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셈이다.


2) 규문주의 소송절차


당시에는 이태리 법학과 캐논법을 통하여 유럽 여러 나라가 이른바 규문주의(糾問主義) 소송절차를 채 택 하고 있었다.

이 소송절차에는 고문이 합법화되어 있었다.

마녀는 바로 이 고문의 소산이었으며 이 것을 정당화시키고 있는 규문주의 소송절차의 당연한 결과였다.

15-6세기 로마법이 유럽 전역에 전 파 되기 전까지는 이른바 게르만법계에 속하는 이른바 형식적 증거법주의가 증거법상의 원칙이 되어 있었다.

이에 따르면 요증(要證)사실의 진실 여부는 이론상 또는 경험상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주장방법 자체에 의해 결정되었다.

진실은 주장자 자신의 선서, 또는 이웃의 선서, 때로는 결투에 의해 제기되고 인정되었다.

피고인 자신도 마녀가 아니하는 선서, 이웃의 선서에 의해 형벌을 면할 수가 있었지만, 마녀인지 여부는 수족을 묶고 수중에 던져 보아 가라앉으면 결백한 것이 입증되곤 하였다.

그러나 그 결백이 입증되었을 때에는 이미 산 사람이 아니었다.

15-16세기경 로마법이 전래되면서 이른바 논리증거주의가 채용되었다.

요증 사실의 진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경험상 논리상 진실인 것을 확신시키기에 충분한 증거자료의 존재를 필요로 하였다.

1532년 제정되어 18세기말까지 독일 보통법이었던 카톨리나 형법의 증거원칙에 의하면 유죄의 증거로서 피고인의 자백 외에 2인의 증인의 증언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이에 위하더라도 법률에 정하는 정도의 정 황증거가 있는 경우에는 고문에 의한 자백이 허용되어 이것이 마녀의 양산에 별다른 통제가 될 수 없었다.


3) 고문


위와 같이 고문은 거의 모든 마녀재판의 필수적인 한 요소로 등장한다.

마녀는 결국 고문의 소산이었다.

물론 희귀한 사례가 없지는 않았다.

어떤 소녀는 자신이 마녀임을 아버지에게 자백하고 아버지가 딸을 신고하여 마녀재판에 등장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건에서 마녀들은 자신이 마녀라는 사실을 부인하였다.

그럴 경우 위에서 본 마녀의 징표들을 들이밀며 마녀라는 사실을 시인할 것을 강요한다.

그 강요의 수단이 바로 고문이었던 것이다.

이 당시 행해진 고문은 그야말로 "인간의 지혜를 모두 동원하여 만든 것으로써 필설로 설명하기 어려운 정도"였다.

건강한 남자조차 견디기 어려운 정도의 고문이 연약한 여성에게 가해질 때 심문관이 요구하는 내용의 진술을 자인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터이다.


4) 형량과 집행


기독교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을 당시에는 신에 대한 반역이나 모독은 그 어떠한 범죄보다 중죄였다.

신의 적인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행위란 있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마법의 유형에 따라 달리 취급하였지만 나중에는 마녀라는 것 자체만으로 火刑, 斬首, 絞首(화형, 참수, 교수) 등의 엄벌을 받았다.

독일, 영국, 프랑스, 스위스, 핀란드, 스페인 등지에서 일어난 마녀재판을 1만 건 이상 분석한 로버트 무쳄블래드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마녀로 기소된 사람가운데 거의 반이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



7 . 마녀로 화형 당한 잔다르크



마녀로 처형된 인물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마 잔다르크일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의 이른바 백년전쟁(1399~1453) 에서 시종 불리했던 프랑스를 구한 애국소녀 잔 다르크가 영국군의 포로가 되자, 영국세력하에 있던 파리대학 신학부는 그를 마녀라는 죄목으로 재판에 회부했다.

여자인 잔 다르크가 남장을 하고 전투의 선봉에 선 사실이 바로 마녀라는 증거로 채택되었다.


한편 마녀사냥에는 중세의 뿌리깊은 성차별의식이 저변에 깔려있다.

1562년부터 1684년까지 독일 남서부에서 일어난 1258건의 마녀 처형 사건 중 82%가 여자였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마녀로 지목된 여자들은 대개 눈에 잘 띄는 남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너무 못생겼거나 너무 예쁘거나, 성품이 못되었거나 신체적 결함이 있거나, 병을 잘 고친다든지 하는 남다른 재주가 있거나, 혹은 남편없이 혼자 사는 과부거나, 어떤 의미로든 사회적 일탈자였고, 가난한 하층계급의 여성이었다.

8 . 결 론



우리는 마왕을 숭배하는 마녀가 존재했다는 견해를 거부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마법이 이교의 다산 숭배에 뿌리르 둔 당시의 조직적인 이단의 한 형태였다는 학자들의 주장도 거부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지하 마녀 종파가 고대에서부터 17세기가지 존재했다는 것도 거부할 수 있다.

우리는 밤의 마녀들과 유익한 여자 정령들에 대한 민담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이것들은 마왕 숭배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우리는 마녀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으나 그것은 고립된 여자로서이지 종파에 속한 마왕 숭배자로서는 아니다.

불만을 품은 이웃들이 특정한 여자들을 흔히 마법 혐의가 있다고 고발을 했다.

예컨데 노파, 외따로 사는 여자, 평판이 나쁜 여자, 신경질적인 여자, * 여자, 심술궂은 여자, 음탕한 여자,민간 요법을 쓰는 돌팔이 노파나 산파등과 같은 여자들을 말이다.

이런 여자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지방에서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 중 일부 노파는 자신들이 날아다니거나 마술적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은 남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사회 부적응자들이거나 국외자들에 지나지 않았다.

마왕을 숭배하는 상궤를 벗어나 있는 일탈자들이 일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왕 숭배적 음모는 고대의 민속 신앙과 고급 마술과 농촌 마법을 융합하고 *의 역할을 강조하였으며 기독교 세계의 파멸이라는 목표를 설정해 놓은 가톨릭 지식인과 신학자와 법률학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결국 중세 말 사탄을 숭배하는 마녀들은 최후의 희생양이요 꾸며진 소수파요 악의 복합적 이미지였다.

이 이미지는 기독교 교리에 동의하지 않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적용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고문과 테러를 이용해 하나의 현실이 되어버린 기성품과 같은 것이었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미지와 관념 속에 뿌리 박은 마녀의 위험성에 대한 지속적 선전은 민중의 의식 속에 이식되어 성숙한 다음, 16~17세기 마녀사냥에서 끔찍한 결실을 맺었다.

이때 뭇 동네 사람들은 사탄의 하수인들을 사냥하여 추방하는 것을 인정하고 격려했던 것이다.


9. 맺 음 말

마녀 사냥에 대한 여러 자료를 접하고 나서 당시 사회의 기득권 즉, 기존의 중세 유럽사회로 이어진 사회 질서와 전통적 가치관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이와는 다른 생각을 품은 이는 이단자요 그중 여자는 마녀로 희생이 되어야만 했었다고 생각한다.


마녀사냥이 일어난 시기의 유럽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과도기에 해당한다.

르네상스 시대라 부르는 바로 그때 마녀사냥 선풍이 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시기는 중세 봉건제도와 그를 떠받치는 기독교 세계관이 무너지는 시기인 것이다.


마녀는 무너지는 중세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봉건귀족과 성직자들이 찾아낸 대리 희생물이었던 것이다.

마녀는 사회적 혼란의 책임을 돌리고 사람들의 관심을 딴데로 집중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정치적 종교적 작품인 것이다.


마녀사냥의 역사적 사건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과거나 현재 미래에 있어 기득권의 세력과 그들의 가치관에 의해 그 사회는 희생양을 찾게 되고 혼란한 시기에는 사회혼란의 이유를 덮어 씌울 수 있는 역사적 사건도 존재했고 존재하리라 생각해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출처 : 네이버 지식in (http://kin.n*er.com/detail/detail.php?d1id=11&dir_id=110107&eid=1ru7f1rctpzb5wcc68gdg4xkj1oul7+t)
글로리Si의 최근 게시물

무서운글터 인기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