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궁궐의 좌향을 남향으로 하느냐 동향으로 하느냐를 고민하고 있었다. 무학대사는 유자묘향(酉坐卯向), 즉 궁궐의 방향을 동쪽으로 해야 적장자가 잘 되고 부귀왕정하는 길한 상이 된다고 주장했으나 이성계는 중국도 일본도 남향을 하므로 따라서 남향을 해야한다는 정도전의 말을 따라 임좌병향(壬坐丙向)을 하였다.
그 결과였을까? 그로부터 500년 동안 조선시대의 적장자는 모두 요절거나 불행해지고, 장남중에는 뛰어난 인물이 나오지 않았다. 519년동안 이어진 조선왕조 27왕의 미스테리를 살펴본다.
Роıпт - 임좌병향과 관련하여 장남이 불운하고 차남-막내가 길함을 보아야 함.
장남 말년이 불운하거나 요절함 40% 차남-막내 뛰어난 업적을 남긴 왕이 많음 60%
Вопцs Роıпт - 선왕에게 찬탈이나 살육의 업이 있는 경우
뒤를 이은 왕에게 좋지 않은 일이 있음.
1. 태조 이성계
<업적>
공양왕의 양위를 받아 조선 창건.
<몰락>
재위 7년만에 1차 왕자의 난으로 방과에게 양위하여 상왕으로 물러남.
그로부터 2년 뒤 방원에게 양위하여 태상왕이 됨.
[장남] 환조로 추증된 이자춘의 장남. 50대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짧은 재위기간을 누리고 아들에게 빼앗김. 태상왕이 되고 이방원이 왕이 되자 서북지방으로 도주하여 군사를 일으켜 정부군과 싸움을 벌이지만 패배, 아들의 눈치를 보며 말년을 조용하게 삶.
[말년이 불운, 고려를 멸?쳔?업이 있음.]
2. 정종 이방과
<업적>
개경 천도. 하륜의 건의에 따라 관제 개혁.
<몰락>
즉위 2년만에 동생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됨.
[차남] 태조 이성계의 차남. 4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동생에게 살아남기 위해 정사에는 관심이 없는 듯 격구놀이를 즐겼다고 함. 그리고 결국 동생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으나 조선 초기까지는 왕대접도 해주지 않고 시호도 내려주지 않은 굴욕을 겪음.
[즉위 2년만에 상왕으로 물러남, 업이 있는 왕의 뒤를 이음.]
3. 태종 이방원
<업적>
사병을 혁파, 의정부·사간원 설치, 호패법 실시, 호포제 폐지, 신문고 설치.
의금부를 설치함으로써 왕실 직속 친위대로서의 기반 마련. 개경에서 한양으로 재천도.
<몰락>
삼남 이도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 죽을 때까지 병권을 관장하며 왕 이상의 지위를 누림.
[오남] 태조 이성계의 오남. 34세의 나이로 왕이에 올라 숫한 업적을 이룸. 신생국 조선의 기반을 다지고 말년에는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지만 그 후 대마도정벌을 직접 감행하는 등 여전히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누림.
[이복동생을 죽인 업이 있음.]
4. 세종 이도
<업적>
황희, 맹사성, 허조등의 청백리를 등용하고 집현전을 설치하여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꾀함.
태종의 숭유억불정책과는 달리 불교도 인정. 훈민정음 창제.
박연을 등용하여 음악을 장려하고 장영실을 등용하여 과학기술 발달을 장려함.
그 외의 숫한 업적과 상왕 이방원과의 합작인 대마도 정벌 등이 있음.
<몰락>
체질상 비만이었던 데다가 말년에는 몸상태가 좋지 않아 세자인 이향에게 정사를 맡김. 그리고 휴식을 취하면서 틈틈이 훈민정음을 창제함.
[삼남] 태종 이방원의 삼남. 2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훈민정음, 측우기 발명, 대마도 정벌 등 조선 역사상 첫째로 꼽을 만큼 뛰어난 업적을 남김. 아버지의 말을 한번도 어기지 않았을 만큼 효자였다고 하며 신하들과 토론을 하며 정무를 보기를 즐겼다고 함.
[평생 눈병을 심하게 앓고 살았음, 또한 당뇨병, 허리통증, 관절염등의 성인병에도 시달림.]
5. 문종 이향
<업적>
동국별감, 고려사절요등이 출간. 병력 증대노력.
<몰락>
몸이 허약하여 2년 4개월만에 병사함.
[장남] 세종 이도의 장남. 3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지만 그 전에 20년간 세자로 있으면서 제왕교육을 받고 5년간 실무를 처리하면서 실무능력도 익힌 준비된 왕이었음. 그러나 몸이 약하여 요절함.
[요절함]
6. 단종 이홍위
<업적>
두드러진 업적이 없음.
<몰락>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여 노산군으로 강봉, 후에 서인으로 강등되고 1457년 영월에서 사약을 마시고 죽음.
[장남] 문종 이향의 장남.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지만 결국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요졸하고 만 비운의 인물.
[요절함]
7. 세조 이유
<업적>
의정부의 정책결정권 폐지, 호적·호패제 강화, 중앙군을 5위로 개편함.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과전법을 폐지하고 직전법을 실시하였으며 집현전을 폐지하였으나 많은 서적출간에 노력을 기울임. 경국대전 편찬을 지시함.
<몰락>
한명회, 신숙주등에게 대리 서무를 보게 하다가 결국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죽음을 맞이함.
[차남] 세종의 차남으로 세종, 문종, 단종을 거쳐 왕위를 찬탈하고 3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름. 그러나 괄목할 만한 치적을 남기며 조선조 왕권안정에 큰 기여를 함.
[왕위 찬탈의 업이 있음.]
8. 예종 이황
<업적>
두드러진 업적이 없음.
<몰락>
몸이 허약하여 요절함.
[차남] 세조 이유의 차남.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세조의 업이 있는 탓인지 몸이 허약해 재위 13개월만에 병사함.
[재위 13개월만에 병사, 업이 있는 왕의 뒤를 이음.]
9. 성종 이혈
<업적>
조선초기 문물제도를 완성시킴.
경국대전 완성하여 반포. 숭유억불정책 강화. 세조때 폐지된 집현전을 대신해 홍문관 설치.
훈구파와 대립관계에 있는 사림파도 과감히 등용.
<몰락>
말년에 유흥에 빠져 폐비 윤씨사건이 불거짐.
[차남] 덕종으로 추증된 이장의 차남.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이상적 유교정치실현해 힘을 기울임. 그 결과 조선초기의 문물제도를 완성시켰고 비로소 조선은 안정됨.
[폐비윤씨사사의 업이 있음.]
10. 연산군 이융
<업적>
두드러진 업적이 없음.
<몰락>
수많은 유혈극을 벌이고 성균관과 사간원 등 언론기관을 모두 폐쇄하고 미녀를 간음하기가 극에 달하자 중종반정을 맞아 폐위됨.
[장남] 성종 이혈의 장남. 19세의 나이로 왕이에 올라 3년간은 별탈 없이 보냈으나 무오사화·갑자사화를 일으켜 대신들을 대거 숙청하고 강화된 왕권으로 성균관에서 미녀를 겁탈하는 폐륜적인 행위를 저지르자 중종반정으로 폐위됨. '장남' 연산군을 기점으로 조선조의 국운은 쇠퇴하게 되고 사화와 전란이 잇따르게 됨.
[폐비윤씨사사의 충격으로 인해 수많은 인명 사살, 업이 있는 왕의 뒤를 이음.]
11. 중종 이역
<업적>
연산군시대 폐정을 개혁. 조광조등을 중용하여 왕도정치 시도. 소격서 폐지, 현량과 실시.
<몰락>
기묘사화 이후 간신들이 판을 치는 바람에 두드러진 치적이 없이 병사함.
[차남] 성종 이혈의 차남. 연산군의 폐정이 극에 달하자 반정을 일으킨 대신들에 의해 19세의 나이로 왕에 추대됨. 처음에는 어진정치를 펴는데 상당히 의욕적이었으나 기묘사화를 기점으로 타락함.
12. 인종 이호
<업적>
기묘사화때 폐지된 현량과 부활, 조광조등의 신원 회복.
<몰락>
병약하여 재위 1년도 못되어 병사함.
[장남] 중종 이역의 장남. 30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재위시에는 세종시대에 버금할 만한 어진정치를 폈다고 하지만 병약하여 포부를 채 펼치지 못한채 병사함.
[요절함]
13. 명종 이환
<업적>
비변사를 설치하고 수륙군을 관찰사의 지휘아래 공동출전하게 하는 등 국방정책을 수립.
여러가지 간행사업을 전개하고 권문세가의 불법토지를 몰수하여 재분배하고 치안·국방·문화창달·경제개혁에 걸쳐 수많은 업적을 남김.
<몰락>
문정왕후의 치세에 진눌려 지내다가 사후 짧은 친정을 가지게 되나 곧 병사함.
[차남] 중종 이역의 차남.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으로 항상 기를 펴고 지내지 못함. 문정왕후가 죽자 3년간의 짧은 치세를 누리고 죽음.
14. 선조 이균
<업적>
이황과 이이를 등용하여 국정쇄신 노력. 여러 서적 간행하여 유학 장려.
<몰락>
동서분당의 당파싸움에 휘말려 치정의 방향을 잡지 못하다 임진왜란을 맞게 되고 복구사업을 전개할 틈도 없이 다시 당쟁에 휘말리다가 죽음을 맞음.
[삼남] 덕흥대원군 이초의 삼남. 명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사상 유래없이 방계혈통으로써 1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름. 41년의 긴 재위기간동안 태반을 당쟁과 미증유의 전란에 시달리다가 죽음.
[전쟁영웅을 모두 죽이거나 은둔하게 만든 업이 있음.]
15. 광해군 이혼
<업적>
많은 서적을 편찬, 전후 복구사업에 치중하고 호패제를 재실시함.
명과 후금사이에서 실리를 추구한 양면외교를 보여 전란의 위기를 극복함.
<몰락>
임해군, 영창대군, 능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서인시키는 등의 유교적 허점을 보이자 능양군이 이규, 최명길등과 함께 반정을 일으켜 폐위되어 강화도, 제주도에 유배되어 그 곳에서 죽음.
[차남] 선조 이균의 차남. 대북파의 지지를 받아 34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처음에는 현군의 자질을 보였으나 유교적 윤리문제로 인조반정을 맞아 폐위되어 유배됨.
[현군이었으나 폐위, 업이 있는 왕의 뒤를 이음.]
16. 인조 이종
<업적>
양전을 시행하여 토지제도를 시정하고 총융청·수어청을 설치하여 군제를 정비함.
이이가 주장한 대동법을 받아들여 실시하고 민간무역을 허용함.
<몰락>
친명배금정책으로 정묘·병자호란을 맞아 패하여 항복, 군신의 의를 맺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에 볼모로 보냄.
[장남] 원종으로 추증된 정원군 이부의 장남. 반정이 성공하여 2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나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철회하고 친명배금정책을 펴다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굴욕을 겪음.
[말년이 불운.]
17. 효종 이호
<업적>
김상헌, 송시열을 중용하여 북벌계획을 수립.
군제개편, 군사훈련 강화, 대동법을 실시하였고 상평통보를 발행하는 경제시책에 업적을 남김.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을 시켜 서양식 무기 주조, 나선정벌.
<몰락>
청의 국세가 더욱 일어나 기회를 잡지 못하다가 병사함.
[차남] 인조 이종의 차남.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와 같이 청에 볼모로 불려가나 소현세자와는 달리 청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가 3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름. 비밀리에 북벌을 계획하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
18. 현종 이연
<업적>
호남의 산군에도 대동법을 실시하고 경기도에 양전을 실시함.
훈련별대를 창설하고 동성통혼을 금지시킴.
<몰락>
예송논쟁으로 두차례의 환국을 겪으면서 남인과 서인의 당쟁을 가속화시켜 국력이 쇠퇴해짐.
[장남] 효종 이호의 장남. 20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나 자의대비의 복상문제와 관련하여 재위당시 정권이 두차례나 뒤바뀌는 환국을 겪으면서 정치가 혼탁해짐. 이로 인한 폐단이 생겨 국력또한 쇠퇴해졌으며 흉년과 기근또한 겹침.
[말년이 불운.]
19. 숙종 이순
<업적>
대동법을 함경도·평안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 실시하여 실효를 거둠.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계속된 토지사업을 추진하여 완결을 봄.
압록강 주변의 무창, 자성의 2진을 개척하여 영토회복운동을 전개함.
함경감사 이선부로 하여금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간도를 포함하는 청과의 국경선을 확정지음.
금위영을 추가 설치하여 5영체제를 완결함.
상평통보를 본격적으로 주조하여 통용하도록 함.
<몰락>
사회적으로는 안정을 이루었으나 정계는 더없이 당쟁으로 치열한 상황이었음.
[장남] 현종 이연의 장남. 14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며 정치에 관심이 많았음. 전후 복구사업이 이 때 끝을 보았으며 전란이 없어 사회적으로는 안정을 이루었으나 정계에서는 당파싸움이 최고조에 이름.
[장남치고는 예외. 하나 있다면 당파싸움의 절정기.]
20. 경종 이균
<업적>
뚜렷한 업적이 없음.
<몰락>
생모 장희빈에 의해 생산능력을 상실하고, 4년동안 병석에서 절정에 이른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대립을 지켜보며 죽음을 맞음.
[장남] 숙종 이순의 장남. 3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지만 후사가 없어 연잉군(영조)를 세제로 삼음. 장희빈이 사사되기 직전 경종의 하초를 못쓰게 만들어 생산능력을 상실하고 줄곧 병환에 시달리다가 재위 4년 2개월만에 병사함. 그러나 4년의 시간은 최고조에 이른 당파싸움이 절정에 이른 시기였음.
[요절함]
21. 영조 이금
<업적>
균역법을 시행하고 이조전랑 통청법을 혁파함.
노론·소론 가운데 탕평책을 따르는 온건파만 등용하다가 점차 능력위주의 인재를 등용하며 붕당정치에서 비로소 왕권을 확립함.
비인간적인 사형제도인 압슬형, 낙형, 자자형을 폐지·금지함.
<수교집록> <속대전> <속오례의>등을 편찬하여 법치체계를 재정비함.
노비신공 혁파, 청개천 준설, 신문고 부활.
※ 영조의 3대 치적 : 탕평·균역·준천
<몰락>
붕당의 조짐이 보이자 장헌세자를 뒤주속에 가두어 죽이는 유교적 허점을 보임.
[차남] 숙종 이순의 차남. 3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역대왕 가운데 오랫동안 재위(52년)하였음. 비로소 당파싸움을 조절하고 여러가지 혁신정치를 펴 조선의 중흥을 맞이하였으며 탕평책을 시행한 것 외에도 균역법을 시행하거나 청개천을 준설한 것을 포함하여 그의 3대 정책으로 말함.
[친자식을 죽인 업이 있음.]
22. 정조 이산
<업적>
도망노비 추쇄하는 관직 혁파, 측우기, 점풍간 설치.
중소상인이 성장하자 신해통공의 조치로 상업활동의 기회를 균등히 함.
역대 법전들을 모아 <대전통편>을 펴내 법치의 기반을 다짐.
대과는 규장각을 통해 왕이 직접 관장하여 과거제도를 개선함.
<몰락>
재휘 18년째에 발병한 절후(癤候), 즉 부스럼이 피부를 파고드는 정도가 심해져 49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음.
[장남] 장조로 추존된 이선의 장남.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르며 조부(영조)의 탕평책을 이어받아 국가를 안정시키는데 큰 기여를 함. 중소상인이 발전할 수 있도록 제도적 뒷받침을 해 주고 천주교 박해가 심하지 않고 실학도 중용함에 따라 새로운 사상이 발전할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되었으나 재위 5년만에 요절하면서 포부를 채 펼치지 못함.
[재위 5년만에 요절, 업이 있는 왕의 뒤를 이음.]
23. 순조 이공
<업적>
암행어사 파견, 하급 친위 관료 육성으로 국정을 파악하고 국왕의 권력 강화 노력.
<몰락>
유래없는 기근, 홍경래의 난과 소수 명문가문이 정권을 잡으면서 이른바 세도정치가 자리잡음으로써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시키고 일선에서 물러남.
[차남] 정조 이산의 차남.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음. 그 후 친정이 시작되고 선왕의 여러 정책들을 모범으로 국정을 주도하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정권은 다시 일부 명문가문에게로 넘어감.
24. 헌종 이환
<업적>
각 도에 제언을 수축.
<몰락>
천주교 신자를 학살하고 삼정의 문란과 국정의 혼란으로 민생고가 가중됨.
[장남] 익종으로 추증된 이대의 장남.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함. 이에 외척세력인 안동김씨와 풍양조씨가 세력을 다투고, 그에 비례하여 민생은 더욱 어려워짐.
[말년이 불운.]
25. 철종 이변
<업적>
두드러진 업적이 없음.
<몰락>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절정에 달하여 삼정의 문란또한 극에 달함. 전국에 민란이 끊이지 않고 천주교와 동학이 세로운 세력으로 성장함.
[삼남] 전계대원군 이광의 삼남.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름. 대왕대비 김씨의 수렴청정으로 안동김씨의 세력이 득세하고 전국팔도에서 민란이 일어남. 그러나 철종은 여색에 빠져 정치를 뒤로 미루다가 결국 병사함.
[즉위 초부터 말년까지 정사를 돌* 않은 유일한 왕. 민생을 돌* 않은 업이 있음.]
26. 고종 이형
<업적>
척신 세도정치의 배제, 붕당문벌의 폐해 타파, 당파 초월한 인재등용, 의정부 부활과 비변사 폐지.
경도수비 강화, 양반으로부터 신포징수, 경복궁 중수, 갑오개혁 단행.
연호를 광무로 하는 대한제국을 건국하여 황제즉위식을 가짐.
<몰락>
고종은 제위 내내 러시아, 일본, 청 등의 열강들 사이에서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으며 그러던 차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병자호란 이래 국가존망의 위기를 맞음.
[차남]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차남. 철종이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자 조대비와 흥선대원군의 이해관계를 일치시켜 고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함. 그 후 10년간 대원군의 집정시대를 겪고 친정을 선포하지만 다시 민씨의 세도정치를 겪음. 그 후 열강들의 세력다툼 속에서 황제국을 선포하고 대한제국을 건국하지만 일본과 을사늑약을 체결함으로써 국가존망의 위기를 맞음.
[국가 존망의 위기를 맞음. 업이 있는 왕의 뒤를 이음.]
27. 순종 이척
<업적>
두드러진 업적이 없음.
<몰락>
1910년 국권이 피탈되어 조선왕조는 27대 519년만에 망하고 일본의 지배 아래에 들어감.
[차남] 고종 이형의 차남. 헤이그 특사파견의 책임을 지고 고종이 물러나자, 양위를 받아 34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름. 경제가 침탈되고 정치를 통감부의 기능 속으로 흡수시키다가 결국 국권을 빼앗아 합병조약을 체결함.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였던가? 정말 조선역사를 되돌아보면 업이 있는 자는 후손에게 그 업이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정말 숙종을 제외한 장남 치고는 제명에 살거나 말년이 좋았던 왕이 없었다. 더구나 그 숙종역시 당파싸움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대였으니 결코 좋은 시대라고는 볼 수 없었다.
무학대사가 그토록 주창했던 유자묘향(酉坐卯向). 그것을 했으면 정말 조선의 역사는 달라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