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츠네=징기스칸??

Eroica 작성일 08.02.08 23:5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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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츠네    = 징기스칸  ??

 

 

재밌는 이야기가 있어서 올립니다.

일본의 역사학자 히구치 키요유키란 분이 쓰신 요시츠네 징기스칸 전설의

참, 거짓을 번역하여 올립니다.


 


<요시츠네는 정말로 징기스칸인가>


요시츠네에 대한 민중의 꿈이 가장 큰 스케일로 발전된 것이 요시츠네 = 징기스칸이라는 설이다. 도읍에서 추방당한 요시츠네는 후지와라 히데히라에게 의지하러 오슈(지금의 이와테 현) 히라이즈미로 도망친다. 히라이즈미는 그가 소년시절을 보낸 땅이기도 했다. 그곳의 영주 히데히라는 요시츠네의 은인이며 강력한 지배영주였다. 그의 히라이즈미 도착은 문치2년(1186년)이라고 한다. 여기서 잠깐, 요시츠네는 평온히 살았지만 문치3년 10월, 히데히라의 죽음과 함께 그도 궁지에 몰리게 된다. 히데히라의 큰아들인 야스히라는 가마쿠라의 요리토모의 협박을 받고 이를 거절한다면 요리토모의 생각에 반한 역적이다고 생각하여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야스히라는 요리토모의 양해를 구한 후 요시츠네를 고로모 강가의 한 숙소에서 공격해 죽였다.

그런데 기묘한 것이 메이지 시대가 되자 일부 역사학자들이 고로모 강에서 죽임당한 사람은 가짜이며 진짜는 북해도를 거쳐 중국으로 건너가 <원>을 세운 태조, 징기스칸이 되었다는 설을 주장했다.

 

그 이유는 다음의 3가지로 정의했다.


1. <대원사> 속에 <징기스칸전>에 의하면 요시츠네가 죽은 해에서 7년정도 사이가

   징기스칸의 역사속 행방이 묘연한 해인 7년과 같다는 점이다.

   이것은 요시츠네가 죽지않고 약 7년정도  중국으로 건너가 유목민을 평정하여

   원을 세운 기간이라 여기는 것이다.


2. <원(元)>이라는 국호가 미나모토(源)가문의 원과 같은 음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요시츠네가 자신의 가명을 국호로 나타낸 것이다.


3. <원> 황실의 문장은 미나모토 집안과 같은 문양이다. 확실히 원의 군대는 백기를

    군기로 쓰고있다.


잘 생각해보면 넌센스같은 이유지만 이 설은 에도시대부터 있었으며 메이지시대가 되자 꽤 강력한 설로 일반에게 퍼지게 되었다. 확실히 뭐라 말할수 없는 통쾌함은 있지만 이 요시츠네=징기스칸 설은 치명적인 결함이 하나 있다. 그것은 두 사람의 체격이 아주 다르다는 점이다.

징기스칸은 칠척여의 거한이지만 요시츠네는 오척의 갸냘픈 사내였다. 미나모토 요시츠네가 전하는 것처럼 미남자가 아니고 추한 땅딸보였다는 것은 역사에도 잘 기록되어진 사실이다. 사실 요시츠네라는 남자는 오척의 작은 남자로 산돼지같은 이빨에 폐결핵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왜 그렇냐면 여기에 역사적 사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카스카 신사와 요시미즈 신사에 봉납되있는 갑옷이 증거다. 경갑이라는 것이 주문제작이라는 것을 보면 그의 몸을 잘 알수있다. 두 갑옷을 보고 유추하면 요시츠네의 신장을 알수 있다. 그리고 요시미즈 신사의 하치마키(복대)를 보면 등 부분에 굽은 면이 보이는데 이것은 그가 전굴형 몸으로 고양이 등같이 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가마쿠라 막부의 수배전단을 보면 <뻐드렁니에 얼굴이 핏기가 없고 창백하다>라고 되어있다. 그 당시 유행했던 폐결핵의 영향(결핵보균자는 얼굴이 창백하다)이 아닐까라고 유추할 수 있다.

이런 인물이 무거운 갑옷과 투구를 쓰고 전설적인 <팔척넘기 - 주: 배 8척을 뛰어넘은 일>라는 어려운 연기를 과연 해낼 수 있었을까 하고 의문이 생기지 않는가?

헤이안시대의 군선은 폭 약 2.5미터인데 이를 8척으로 횡렬로 세우면 20미터를 넘는 수치가 나온다. 이러한 먼 거리를 70kg가 넘는 갑옷을 입고 완전무장한 채로 배8척을 뛰어넘어갔다는 슈퍼맨같은 기적같은 일을 해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만에 요시츠네가 징기스칸같은 체력을 겸비했더라도 이는 불가능하다. 팔척넘기란 원래 군사용어로 떠돌던 말로 그리 과장된 면이 없지않아 신빙성이 떨어진다. 요시츠네=징기스칸이라는 설도 서민들의 꿈이 키워낸 전설의 해석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요시츠네 전설의 기본이 된 <의경기>에 보이듯 이것은 전에 기술한 후일 무로마치 시대에 생겨난 작품이다. 같은 군담기인 <헤이케 모노가타리>나 <겐페이 성쇄기>처럼 일반에게 널리 퍼진, 주로 동일본 쪽으로 확산된 이야기이다. 그 시작은 장님의 비파법사(비파를 들고 다니며 노래와 이야기를 하며 돈을 벌던 일종의 음유시인)가 동일본 일대를 돌며 요시츠네의 이야기를 노래하며 유행시켰다. 그 결과, 요시츠네 사후에도 오슈지방에 걸쳐 널리퍼진 요시츠네의 전설은 결국 그를 모시는 신사를 세우기까지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드디어 바다를 건너간 것이다.

북해도에서 발굴된 본토의 유물로 가장 오래된 것은 헤이안 초기의 것으로 가마쿠라 시대의 것이 많다. 그 사실의 의미는 가마쿠라 시대에 일본의 인구가 급증하여 본토에서 넘치는 인구가 북해도로 다수 이주한 사실이다. 이 이주민들이 듣고 느낀 요시츠네 이야기가 북해도에도 널리 퍼져 그것이 어느 순간에 요시츠네가 북해도를 건너갔다는 것이 된 것이다.

이 정도로 요시츠네는 서민에게 사랑받은 그들의 꿈을 충만시킨 인물이었다. 일본인에게 있어 영웅은 아름답고 비극적이며 정의의 아군으로 되지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요시츠네 그 자체야 말로 일본인이 묘사한 영웅의 이상형이 아닌가?      

 

ㅋㅋㅋ 좀웃기네요 제가보기엔 억지같은데 ㅋㅋㅋ 과연 이게 사실일까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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