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구야담(靑丘野談)에 기록된 이야기로 조선조 연산군때 영월읍 흥월리에 잣나무백이라는 마을에 신영언이라는 양반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집은 살림이 부유하여 여느 양반들 처럼 첩까지 두고 지냈습니다.. 그러던중 첩이 경읍이라는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그 아들은 준수하게 생겼을 뿐 아니라 기골이 장대하고 기운이 쎈 장사였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조선시대는 서자에 대한 차별대우가 심했고 경읍은 점차 차별대우에 대한 불만을 품기 시작했고 불만은 점점 집안 사람들에 대한 원망으로 치닫았습니다..
그는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까지 차별을 당하자 그 한이 더욱 커져서 말썽을 부렸습니다..
워낙 기운에 쎄 하인 한두명으로 말리기는 어려웠고, 점차 그 집안과 마을에서도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집안의 가장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온 집안이 장사 준비로 골몰했습니다..
경읍은 유일하게 의지하던 부친이 작고하였으니 허탈한 마을을 가눌수가 없었고 아버지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갔으나 가족들에게 의해 쫒겨 났습니다..
조상 제사 때에도 서자는 제청에 들지 못하고 뜰 아래에서 절을 해야만 했야만 했기 때문이죠..
이에 그의 분노는 점점 가중되었고, 아침부터 대취하여 마을을 돌아다니며 행패를 부렸습니다..
오일후 신씨의 시신을 매장하기 위해 지관이 명당이라고 점지한 땅에 봉분을 짓기 위하여 땅을 파고 있었습니다.. 이때 만취한 경읍이 나타나 관을 내놓으라며 행패를 부리기 시작 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아버지의 시체가 땅속에 들어가는 것을 복격하고 나니 심사가 더욱 격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죠.
이 광경을 본 문중 사람들은 참다 못하여 술취한 그를 흙구덩이에 밀어 넣고, 술이 담긴 큰독을 들어 그에게 뒤집어 씌우고는 흙이며 돌을 마구 던졌습니다. 본래 미움을 받던 그인지라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군중심리가 작용하여 모두 돌을 던지고 흙 메우는데 참가하였죠.
이렇게 하여 경읍은 생매장을 당했고 그 근처에 아버지의 시신을 묻었습니다..
신씨가는 경읍의 처자식을 마을에서 쫒겨내고 그의 죽음은 문제삼지 않고 쉬쉬 하면서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얼마후 그 마을에서는 가축과 사람들이 질환에 걸리는등 이상한 재앙이 발생하였습니다.
밤마다 비명 소리가 들리고 죽은 경읍이 피를 뚝뚝 흘리는 모습을 보고 혼절해 죽는 사람들도 생겨 났습니다..
가족들이 용하다는 점장이를 찾아가 물어보니 무당은 생매장 당한 원귀의 작희(作戱-난동을 부린다는 뜻으로 주로 귀신이 일으키는 현상을 일컫는데 쓰인 말)라고 하였습니다..
신씨 가족들은 경읍의 가족을 찾아서 자초지정을 얘기하고 경읍의 한을 풀어 달라고 했습니다.. 경읍의 아들이 푸닥거리를 하자 신씨 집안의 변괴는 사라 졌습니다..
그런데 10년도 안되서 신 씨의 본집은 망해버렸고, 후대에 와서 경읍의 자손이 번창 했는데, 명당에 서자가 생매장한 그 흙구덩이가 원래 신씨의 묘자리 였던 명당자리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