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익산시(益山市) 석왕동(石旺洞)에 있는 백제 말기의 굴식돌방무덤
[橫穴式石室墳〕 2기 왕릉이 동서로 있어 쌍릉이라 부르지만 200m 가까이 떨어져 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87호로 지정되었다.
마한(馬韓)의 무강왕(武康王)과 그 왕비의 능이라고도 하고, 주변에 미륵사가 있어서
백제 무왕(武王)과 선화비(善花妃)의 능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1. 백제 武王
무왕이 과부의 아들로 태어나, 익산쌍릉 근처의 마룡지에서 마를 캐어 팔며 가난하게 살았으나
왕이 된 것으로 보아 그가 몰락한 왕족임에 틀림없다. 무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단서는
백제 성왕(523-554)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왕권강화와 백제 중흥을 위해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538)한 성왕은 당시의 지배 세력을 재편하고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등 일련의 개혁을 추진했다.
부여로 옮긴 후 성왕은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을 되찾고 딸을 신라에 시집
보내는 등 동맹체제를 강화하려하지만 바로 진흥왕의 배반으로 신라에게 패하고 만다.
그리고 그는 귀족들 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라정벌에 나섰다가 관산성(옥천)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큰길옆 동쪽에 자리잡은 대왕묘
성왕의 죽음으로 백제 왕권은 급속히 약화되고 귀족들이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잡는다. 그리고
관산성 전투를 주도했던 성왕의 아들이 왕위에 오른 후 귀족들에게 심하게 추궁을 받았다」는
기록이일본서기에 남아 있다. 이 아들이 바로 위덕왕(재위 554-598)으로 재위기간 내내 귀족들의
기세에 눌리다가 그가 죽은 후 혜왕(재위 598-599), 법왕(재위599-600)이 그 뒤를 잇지만 둘 다
2년만에 단명했고 왕권은 더욱 약해졌다. 법왕이 죽은 후 실권을 쥔 귀족들에 의해 무왕이
추대되는데...
귀족들의 권력유지와 국정운영을 위해 추대된 이가 바로 익산에 살던 몰락 왕족 서동이었다.
이러한 연유에서 무왕과 선화공주의 결혼을 노래하는 서동요는 탄생한 것이며,
서동요속에는 당시 백제와 신라의 팽팽한 줄다리기를 늧추려는 정략적인 화해가
담겨 있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는 비단 서동요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전설에서도
옅볼 수 있다. 거창 월성계곡에는 백제왕자 서동이 신라의 선화공주를 꾀어서 백제의 도읍
부여로 돌아가던 길에 쉬어 갔다는 전설이 있고, 함양군 안의면의 원학동 계곡에도
서동이 선화공주를 데리고 지나갔다는 갈기숲의 전설이 남아 있다.
2. 선화공주
신라의 진평왕(579-632)은 세 딸을 두었다. 첫째가 선덕여왕(632-647)이 된 덕만공주이고
둘째는 진평왕의 사촌인 용춘에게 시집가서 태종 무열왕(654-661)이 된 김춘추를 낳은 천명
공주요, 셋째딸이 바로 선화공주로서 백제의 무왕과 결혼한 것이다.
실제로 589년부터 601년(무왕2년)까지 양국간에는 한번의 교전도 없고, 삼국유사나
동국여지승람4)에 의하면 「미륵사 창건시 진평왕은 많은 기술자를 보내 사찰건축을
돕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백제 신라간에 혼인을 통한 제3차 동맹이 맺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