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공포영화 즐기다.. 영화 렛미인

호돌돌돌 작성일 10.12.13 11:5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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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어떠신가요?

주말에 너무 추워서 집에 뒹굴거리는데

영화가 갑자기 보고싶더라구요~

그래서 여기저기 영화리뷰를 찾던중

여기 블로그에서 영화 렛미인을 잼있게 소개하고 있더라구요!!

http://blog.naver.com/classictaste/117594998

공포스릴 인데 혼자 보려니 왠지 무섭기도하고~언렁 봐야겠어요~

글가져왔어요 안보신분들은 한번 읽어보세요~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는 식으로 단순화시켜 버리는 이분법적 사고.

우리는 그런 흑백논리를 어릴 적부터 숱한 드라마나 영화 같은 대중매체를 통해

간접적 혹은 직접적으로 주입 받으며 자라왔습니다.

나쁜 놈과 착한 놈을 친절하게도 구분 지어주는 이런 권선징악적 스토리는

너무도 쉽고 명쾌해서 의심을 할 여지도 없었죠.

때문에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중립적인 것을 인정하지 아니하려는 편중된 사고방식,

 즉 ‘흑백논리’에 빠지기 쉬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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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렛미인’의 포스터(왼쪽)와 만화 ‘빌리배트’의 표지(오른쪽)

 

 

세상엔 선과 악, 두 가지만 존재하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최근 절찬리 상영중인 영화 ‘렛미인’이나

국내에서 2권까지 출간된 우라사와 나오키의 신작 ‘빌리배트‘ 모두

바로 이런 흑백논리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으로 생각됩니다.

이는 작품의 시대 배경만 살펴봐도 잘 알 수 있는데요,

 

먼저 12살 뱀파이어 소녀와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는 외톨이 소년의 잔혹한 러브 스토리를 그린 영화

 ‘렛미인’은 레이건 대통령이 집권하던 시절인 1983년 미국 멕시코주 로스 알라모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레이건 대통령은 ‘악의 제국’에 대해 강조했다고 하는데요,

영화 ‘렛미인’과 연결 지어 생각해 본다면, 레이건 대통령은 악마라는 존재는

우리들의 밖에 있는 존재, 즉 소비에트 연방이 바로 악마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국인들은 선한 쪽이라고 표현한 것이죠.

그럼 잠시 영화의 예고편을 보실까요?

 

 

또 만화 ‘몬스터’, ‘20세기 소년’의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품 ‘빌리배트’는

<빌리 배트>라는 만화를 그리는 일본계 미국인 만화가 케빈 야마가타가 자신이 무의식 중에

 도작을 한 것이 아닌가 싶어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일본으로 향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 만화입니다.

 

종전 직후인 1949년이 배경인 이 만화는 당시 무조건 소련을 ‘적’으로 간주하던

미국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통해 ‘흑과 백’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에 대한 주제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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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과 밖을 구분 짓는 영화 ‘렛미인’의 한 장면.

“들어가도 돼?”라는 질문은 이 영화의 주제를 상징한다

 

 

“이건 다 소련 놈 때문이다!”


또 시대적 배경과 하나로 묶이는 영화의 스토리 또한 이분법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영화 속 인물 간의 관계나 상황, 상징들은 모두 이분법적인 대칭 구도로 놓여 있죠.

그것도 항상 붙어서 공존하는 동시에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식으로 말입니다.

 

예를 들어 또래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주인공 소년 오웬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 이외의 존재, 즉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들이 악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뱀파이어 소녀 애비가 타인의 공간을 침범할 때 묻는

“들어가도 돼?”라는 질문 또한 철저히 안과 밖을 구분 짓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밖에도 시간적 속성으로 구분되는 낮과 밤(빛 때문에 낮에는 살 수 없고,

어둠 속 밤에만 활동할 수 있는 뱀파이어 소녀),

물질의 속성으로 구분되는 물과 불(영화의 클라이막스인 수영장 장면.

물로 가득한 수영장과 대조적으로 바깥은 불에 타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공존(같은 시간 안에 존재하는 애비와 함께 사는 의문의 남자는

묘하게도 오웬의 운명과 겹쳐진다)등

영화에는 온갖 이분법적인 상황과 관계들로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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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의 박쥐는 검은 놈인가, 흰 놈인가?”라는

직접적인 질문을 던지는 만화 ‘빌리배트’ 속 한 장면

 

만화 ‘빌리배트’에는 좀 더 직접적으로 주제가 등장하는데요,

만화에 등장하는 박쥐를 ‘흰 박쥐’와 ‘검은 박쥐’로 구분시켜 놓는 점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자기가 새긴 박쥐는 착한 박쥐지만 다른 사람이 새긴 박쥐는 나쁜 놈”이라는

극중 대사는 그 중에서도 대표적이지요.

뿐만 아니라 만화가인 주인공 케빈이 자신의 만화 속 결말

(벌여놓은 설정 끝에 결국 여자까지 소련의 스파이였다는 결말)을 두고

출판사 직원과 옥신각신하는 장면에서 출판사 직원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즘은 ‘이건 다 소련 놈들 때문이다’하고 끝내면 되는 세상이라고!”

 

또 극의 열쇠를 쥐고 있는 만화가 선생님은 주인공에게

“자네의 박쥐는 검은 놈인가? 흰 놈인가?”라는 직접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하죠.

 아직 1권밖에 읽지 못한지라 만화의 궁극적인 주제를 판단하기는 어렵겠으나

이야기 곳곳에서 등장하는 흑백논리에 관한 질문은 결국

이 만화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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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뱀파이어 소녀 ‘애비’와 아이도 어른도 아닌 소년 ‘오웬’

 

 

이분법적인 대립 속 중립을 지키는 주인공


만화 속 주인공을 일본사람이지만 국적은 미국으로 설정해

그에게 “흑이냐 백이냐”는 선택하게 만드는 장치를 통해

이분법적 사고를 하도록 강요하는 점 또한 눈 여겨 볼 만한 대목입니다.

 

영화 ‘렛미인’ 역시 여자도 남자도 아닌 뱀파이어 소녀 ‘애비’와

아이도 어른도 아닌 불완전한 존재인 12살 소년 ‘오웬’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역설적으로 영화의 주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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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에서 가해자로 그 위치가 전복되는 주인공 소년 ‘오웬’

 

캐릭터 설정뿐만 아니라 영화 속에서 애비와 오웬은

흑백논리가 만들어내는 많은 모순적인 상황들과 끊임없이 부딪히고 있는데요,

가령 급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오웬은 영화 중반

하키 스틱으로 가해자였던 급우에게 폭력을 가하면서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그 위치가 전복 됩니다.

 또 살기 위해 인간의 피를 먹어야 하는 뱀파이어 소녀 애비는

 한 편으로 피를 얻기 위해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 처하는 식이지요.

 

이 같이 이분법적인 상황들과 충돌하는 캐릭터를 통해

영화는 흑백논리와 편견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건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짜라고 믿었던 사실은 사실 잘못된 편견’일 수도 있다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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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빌리배트’ 속 <빌리배트>의 첫 장면. 사람들을 이분법적인 사고로 정리하고 있다

 

 

흡연욕구가 생겨나는 영화 ‘렛미인’의 진짜 공포는?


여러분은 진짜라고 믿는 굳건한 어떤 것이 있습니까?

혹시 그 믿음이 틀린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는지요?

둘러보면 세상은 온통 정답 혹은 오답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만화 ‘빌리배트’의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도시에 사는 자들은 언제나 두 부류로 나뉜다.

운이 좋은 자와 운이 나쁜 자, 돈 많은 자와 가난한 자,

그리고 승자와 패자...” 라는 대사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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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흑백논리에서 벗어나려는 영화 ‘렛미인’이 던지는 메시지는 강렬했습니다.

‘뱀파이어’지만 피보다 ‘사랑’이 더 필요했던 소녀 애비의

슬프고 잔혹한 러브스토리를 보고 나니 다비도프 담배가 몹시 당기더군요.

 

 따뜻하지만 마음 한 편으로 씁쓸했던 기분이 느껴졌던 건

아마도 영화의 엔딩이 언젠가 어른이 될(과거 애비와 함께했던 남자의 운명처럼)

오웬의 불행한 미래를 예고하며 끝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화의 ‘진짜 공포'는 뱀파이어라는 소재가 아니라

자각하지 못하고 있던 우리 안의 ‘이분법적 사고’가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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