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1989년에 옴진리교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던 변호사 사카모토 츠츠미와 그 일가족을 살해한 사건.
1980년대 그 악명높은 옴진리교에 젊은이들이 하나씩 빠져들기 시작해 소재는 커녕 생사도 불분명해지자 그 가족들의 가슴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이때 나타난 사람이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해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사카모토 츠츠미(坂本堤)였다. 사카모토 츠츠미는 예전에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일명 통일교. 바로 문선명의 그 통일교이다!) 사건을 맡은 경험으로 옴진리교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옴진리교는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사카모토는 각종 인터뷰에 출연하며 옴진리교를 깠고, 옴진리교는 대응책이랍시고 사카모토의 사무소에 항의전화를 보내자는 운동을 하고 삐라를 뿌렸지만 당연히 사카모토의 입장만 더 두텁게 해 줄 뿐이었다.
10월 31일, 옴진리교의 간부 하야카와와 변호사 아오야마 요시노부는 사카모토의 법률사무소를 방문해 그와 교섭하려 했으나, 사카모토는 옴진리교 측의 논리적 허점을 전부 반박하고 옴진리교 교단 전체에 고소크리를 먹이겠다고 강수를 두었다. 말 그대로 관광 당한 옴진리교는 어쩔 줄을 몰랐고, 교주 아사하라 쇼코는 사카모토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심하고 있었다. 논의 끝에 결국 사카모토를 살해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11월 3일, 사토로 하시모토, 의사였던 나카가와, 옴진리교 수석 과학자 히데오 무라이는 요코하마역에서 사카모토가 귀가할 때 납치해 염화칼륨을 주사해 죽이려 했지만 그 날은 하필이면 또 사무소의 휴일이었다... 그들은 새벽까지 기다려서는 결국 11월 4일 사카모토의 집에 침입하게 된다. 11월 4일 새벽, 그들은 사카모토와 그의 아내를 교살, 한살배기 아들을 입을 막아 질식사시키고, 외딴 산중에 시체를 묻어버렸다.
사카모토가 실종되자 이 사건을 명백히 조사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났다. 동료들과 사카모토의 어머니는 옴진리교에 의한 살해 가능성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민중의 지팡이라는 사명감 같은 건 다 갖다 버린 일본 경찰은 이런 주장을 무시하고, 형식적인 조사만 행한 뒤 시체가 발견되지 않자 수색을 끝내 버리고는 시체가 발견될 때까지 단 한 번도 재수색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현장에서 옴진리교 간부만 착용하는 뱃지가 발견되었는데 경찰은 이를 무시했고, 옴진리교도 이 사실이 보도되자 갑자기 이 뱃지를 대량 생산하고는, 그것은 옴진리교의 신도 모두가 다는 뱃지이며, 우리가 엄청난 수의 뱃지를 만들어 퍼트렸는데 그 중 하나가 어쩌다 사카모토의 집에 있던 거라고 웃기지도 않는 발뺌을 했다...
결국 1995년 9월 사카모토 일가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실행범들은 전원 사형에 처해졌다.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과 함께 옴진리교의 악행을 얘기할 때 절대 빠지지 않는 엄청난 사건이며, 애초에 1995년 3월의 사린가스 살포 사건은 메구로공증인사무소 사무장 납치 감금 치사 사건, 사카모토 살인 사건 등으로 경찰의 의혹이 옴진리교로 집중되자, 테러를 일으키면 수사망을 회피할 수 있을거라 생각해 벌인 일이다.
(관련 병크로 TBS 비디오사건이 존재.)
일각에서는 사건 수사가 제대로 된 게 맞는지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사건 직전에 사카모토 변호사의 집 아래층에 살던 사람이 우연히 새벽에 깨어나 "사카모토쨩"이라고 말하는 여성의 목소리와 욕실에서 물소리가 나는것을 들었는데 정작 사건이 일어났다고 확실시되던 시간에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진술했다는 점,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사카모토 변호사의 집 대문이 열려있었다는 점, 나중에 확인해보니 집에서 밥공기 3개가 사라진 것 등의 의혹이 남았다.
이때문에 사카모토 변호사의 아버지는 경찰의 발표보다 더 이른 시간에 살해된 게 아닐까라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고 옴진리교 교인 외에 다른 숨겨진 협력자가 있는데 경찰이 밝혀내지 못한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명확하지는 않다.
여담이지만 사카모토 변호사의 법률 사무소에는 좌파적 성향의 변호사들이 많았고 이들은 일본 공산당과 함께 사형폐지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사카모토 츠츠미도 사형제 폐지론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이후 사카모토의 동료 변호사였던 타키모토 타로 변호사는 사형제를 찬성하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타키모토 타로도 옴진리교에 맞섰다가 테러를 당한 경험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