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주의] 키타큐슈 일가 감금살인사건

쭈구렁탱이 작성일 11.12.20 13:4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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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
임산부, 노약자, 아직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은 청소년, 기타 비위가 약한 사람의 열람을 금지합니다.
이 게시물은 '무서운 얘기좀 번역해 달라'는 요청에 일본어 위키를 번역한 것으로,
열람 후 심각한 인간불신 등을 초래할 우려가 있습니다.
평소 이런 경고문을 장난삼아 써먹곤 합니다만,
이번엔 사정이 다릅니다.

괴담 카테고리에 넣을까 하다가 실화라서 사건/사고 카테고리에 넣습니다.
…유령같은거 보다 산 사람이 훨씬 무섭습니다.




키타큐슈 감금살인사건(北九州監禁殺人事件)이란, 2002년 3월 키타큐슈 오구라키타구에서 밝혀진 감금, 살인사건이다


↓주의를 위해 드래그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개요

사람의 약점을 잡아 감금해 금품을 뜯어내고, 고문과 학대에 의해 마인드컨트롤 아래에 두어, 서로의 불만을 맞부딪히게 해서 상호불신을 일으켜 거역하지 못하게 하며, 또한 피해자끼리 학대하게 함으로서 상호불신을 한 층 깊게 하여, 자신의 손은 더럽히지 않고 쓸모없어진 인간을 살해해 사체처리를 하게함.(재판에서는 6명의 살해와 1명의 상해치사) 전직 유치원 교사에게 아동을 살해하게 하거나, 경찰관에게 살해를 하게 하고, 더욱이 10세의 아동에게까지 친동생의 살해와 시신의 해체를 하게 한, 세계적으로도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잔학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너무나도 잔혹해 제1심에서 검찰측은 [귀축의 소행]이라며 용의자 남녀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비정상적인 잔학성,악질성에도 불구하고, 사건에 보도관제가 걸렸다고하여, 사건의 지명도는 높지 않다. 당초에는 지역 보도기관을 중심으로 보도되었으나, 내용이 너무나도 잔학하기에 도중에 보도기관이 자율규제하여, 전국의 보도기관에서의 집중보도로는 이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사건의 발각

2002년 3월 6일, 소녀A(당시17세)가 남자X와 여자Y의 2인조에 의해 감금상해를 당했다며, 조부의 집에 도움을 청하러 옴으로써 사건이 밝혀졌다. 다음날인 3월 7일, X와 Y가 체포되었다. X와 Y는 혐의와 이름을 포함해 완전묵비를 계속했고, 신분증은 위조된 것 뿐이었기 때문에, 당초엔 신원이 불분명했으나, Y가 소지하고 있던 사진집을 계기로 판명되었다.
당초엔 X와 Y 두 사람에 의한 A에의 상해와 감금사건으로 보여졌다. 그 후, A의 증언에 의해 X와 Y는 A의 부친 B(당시 34세)의 지인으로, 5~6년 전부터 넷이서 살게 되었으나, 함께 산지 약 1년 후에 B가 행방불명이 되어, 그 후론 3명이 생활했다고 한다.
후일, 다른 장소에서 A가 돌보던 4명의 아이들이 발견되었다. 4명중 쌍둥이 아이들에 대해, 여기에 맡겨져 있었던 것을 부모는 몰랐다. 다른 2명에 대해서는 DNA검사로 X와 Y의 자식으로 판명되었다.
며칠 후, A가「B는 X와 Y에게 살해당했다」고 증언함에 따라, 사건의 해명은 크게 움직였다. 더욱이 A는, Y의 가족 6명이 살해당해, 사체는 해체되어 바다 등에 뿌려졌다고 증언했다. 살해된 Y의 가족 6명의 내역은 농협 부이사장인 부친C(당시61세), 주부인 모친D(당시58세), 치과위생자인 여동생E(당시33세)、전직 경찰관으로 농협관련단체 직원인 여동생의 남편F(당시38세), 초등학생인 조카딸G(당시10세), 보육원아인 조카H(당시5세)였다.
경찰은 A의 증언을 토대로「살해현장으로 추정되는 장소의 배관」까지 잘라내어 DNA검사를 했으나, 시간이 지난대다가 7명의 사체가 이미 완전히 소멸된 탓에, 물적 증거가 아무 것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마지막에는 Y가 자백함으로써, 다시금 사건의 개요가 판명되었다.


사건관계자의 상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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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소녀A 및 여자Y의 증언에 따르면,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부녀 2명 감금사건
용의자인 남자X와 여자Y는 이불 판매업을 경영했으나, 싸구려 이불을 고가에 판매하는 사기적인 장사법과 손님을 위협해 억지로 이불을 사게 하는 폭력적인 장사법이 경찰에 알려져, 사기죄와 공갈죄로 경찰에 지명수배되었다.
그 때, X와 Y는 과거 가공의 신회사 설립을 제안한 부친 B와 그 딸 A가 있는 키타큐슈 시내에 잠복하게 된다. X는 B의 사소한 범죄사실을 알고 있어, 약점을 잡고 학대와 고문을 하게 된다. 1996년 2월, X와 Y는, 전기충격을 가하는 등의 고문을 거듭하고, 식사도 충분히 제공하지 않는 등 B를 학대하여 쇠약사시켰다(제1살인). X는 Y와 A에게 사체의 해체를 지시하여, B의 사체는 바다에 던져졌다.
X와 Y는 A에게 때때로 학대를 반복하며 감시하에 두었다.


일가 6명 감금사건
B 살해후 X는 돈을 벌게하기 위해 Y에게 오이타현 유후인쵸에 호스티스로 일하게 했으나, Y가 X에게 돌아오지 않게 되자, X는 Y가 B를 살해한 것을 구실삼아,Y의 부친 및 여동생 일가를 공갈하여, 사채업자 등으로부터 돈을 빌리게 하는 등 금품을 빼앗았다. 또한, X는 Y를 자신의 곁에 두기 위해 Y와 이따금 만나던 여동생 E를 통해X자신의 자살?장례식을 날조함으로써 Y를 불러들여 다시금 지배하에 두었다.
이윽고 Y의 부친 및 동생 일가가 돈을 빌리 수 없게 되자, X는 Y의 부친 및 동생 일가를 감금하고, 고문에 의해 자신들이 하는 말을 듣게 만들었고, 나아가 각각의 약점을 붙잡고 서로가 다투도록 의심에 빠지게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Y의 가족과 A는 X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1997년 12월, X는 Y를 시켜 그 부친인 C에게 전기를 흘리게 했고, C는 사망했다.(제2살인. 단, 재판에서는 상해치사로 인정)
X는 Y와 그 일가족에게 사체의 해체를 지시했다. 더욱이 거듭되는 감전에 의해 괴성을 지르게 된 Y의 모친 D의 살해를 Y와 그 여돈생 E, 그 남편 F에게 명해, 1998년 1월, Y등에게 몸을 짓누르게 한 채 F에게 교살하게했다(제3살인)
더욱이, 반복되는 감전에 의해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된 E에 대하여, X는「정신이 나갔다」며 시비를 걸어, F와 Y의 조카딸G(=E의 딸)에게 살해를 지시, 1998년 2월, Y등에게 몸을 짓누르게 한 채 F에게 교살토록했다(제4살인)
거듭되는 감전과 식사제한으로 F가 쇠약해지자, X는 욕실에 F를 가두어,1998년 4월, 쇠약사시켰다(제5살인)
1998년 5월, 어른들이 전원 사망하자, G는 X에게「이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동생 H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할게요」라며 자택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간청한다. 그에 대해 X는「사체를 토막냈으니까 경찰에 잡혀버릴거아냐. H가 아무 말도 안하면 좋겠지만, 그렇게는 안되지 않을까나. H는 불쌍하니까 엄마 E곁으로 보내줄래?」라며 둘러서 H를 죽일 것을 명했다. G는 H에게「엄마E에게 대려다 주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Y와 함께 H를 살해했다(제6살인). G는 어른들의 사정도 모른채 사건에 휘말려, 살해와 시신의 해체를 도와야 했다.
그 후 X는「쟤는 떠벌릴거 같으니까 처분하지 않으면 안된다」며 Y에게 살해를 제안, G에게 충분한 식사를 제공하지 않고, 감전을 반복, 다음달인 6월에는 Y와 A에게 G를 교살하게했다. 그 때, G는 조용히 드러누워, 목을 조르기 쉽게 고개를 들어올렸다고 한다.(제7살인)
이러한 순진한 아동까지 자신의 조부모와 양친의 살해 및 사체 해체에 참가시키고, 더욱이 누이에게 동생을 죽이게 하고, 남은 누이도 용서없이 죽인 것은 전대미문이다. 제1심 판결에서는 이 점에 대해,「간과할 수 없는 것은, 아동이 범행에 휩쓸리고 가슴아픈 희생이 된 것이다. 이것들은 범행의 잔인하고 냉혹한 측면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사체처리

시신은 톱과 믹서로 분해해, 냄비로 익혀 해체처리하게하여, 바다나 공중변소 등에 투기했다.그 때문에, 유골 등을 경찰은 거의 회수하지 못했고, 검찰측은 A 및 Y의 증언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X는 Y 등에게「정리해 두라」는 식으로 지시하여, 명확하게 살해를 명령하지 않았던 점에서 X를 살인죄로 처벌할 수 있을지가 재판에서 주목받았다.


용의자 남녀

용의자 남자X - 1961년 4월 28일생. 키타큐슈 오구라키타구 출신. 양친은 다다미 가게. 7세 때 부친이 가업인 이불판매업을 이어받기 위해 야나기가와시로 전입. 고교졸업 수년 후에 부친의 가게를 이어받아 유한회사화한 후 주식회사로 만듬. 사명 월드. 1992년에 사기죄로 지명수배되기까지 사기장사를 거듭함. 1992년에 전처와 이혼. 병적인 거짓말쟁이로 자의식이 강하며 주목받고 싶어함. 화술이 뛰어나고 여러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엘리트연 하는 경향이 있음. 예의바르고 싹싹하나, 시기심?질투심이 강함.(어펙션레스 캐릭터의 경향)정상이 아닐 정도로 집념이 강하고 가학적. 신경질이며 겁많은 면도 있으나 허세를 부림.
용의자 여자Y - 1962년 2월 25일생. 쿠메다시 출신. 단대를 나와 유치원교사가 됨. 1980년 동창생인 X의 제의로 1982년경부터 교제가 깊어짐. 그 후 X와 함께 사기죄로 지명수배됨. 순종적이고 몰개성적.

그 외의 피해자

이 사건들은 피해신고가 접수되지 않았거나, 혐의 불충분이거나 하여 형사소송이 되지 않았다.월드(X가 경영하던 회사)의 전 종업원 남성 - 사기죄로 지명수배되어 도망중이던 X와 동행. 금전 조달을 했으나 학대를 이기지 못하고 도주.
X의 동창생 여성 - 결혼을 미끼로 1180만엔을 빼앗김. 1994년 3월에 오이타현 벳부만에 투신해 자살(타살설 있음)1993년 9월에 당시 1세였던 여성의 자녀도 부자연스러운 사고사를 당했음.
B(소녀A의 부친)의 친구의 전처 - B를 통해 X와 알게 됨. X는 쿄토대 출신 카와이쥬쿠 강사로 위장해 결혼을 약속, 이 여성은 3살의 차녀를 데리고 동거를 시작함. 5개월간 감금되었으나  1997년 3월에 아파트 2층에서 뛰어내려 도주. 그 후엔 정신과에 장기입원. 차녀는 X에 의해 전남편의 자택 부근에 버려짐.


재판
2005년 9월 28일, 후쿠오가 지방재판소 오구라지부에서 제1심 판결이 내려졌다. 법원은 X의 지배하에 놓여 서로를 싫어하던 Y와 A의 증언이 거의 일치하고, Y는 자신에게 있어서 불리한 내용도 기꺼이 증언하고 있는 점, 한편 무죄를 주장하는 X의 증언에는 일관성이 없는 점을 들어 X와 Y가 B, C, D, E, F, H, G의 계7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인정했다.
단, C에 관해서는「소생시키려했다」는 점에서 살의는 인정되지 않는다며「상해치사」로 삼고, 그 이외를「살인」이라 인정했다.
재판장은, 용의자인 X와 Y를「터무니없는 인명무시의 태도에 전율을 느낀다」「잔혹, 비도덕으로 피도 눈물도 느낄 수 없다」「악질스러움이 돌출되어, 범죄사상 드물게 보는 흉악사건」이라고 강하게 비난하며, 사형 판결을 내렸다.
X는 곧바로 항소했다. Y도 항소했다. 2007년 9월 26일, X의 사형판결이 유지되었으나, Y에 대해서는 F가 전직 경찰관임에도 해체작업이나 살해 등에 가담한 것에서 X에 의한 감전 등의 학대가 피해자의 인격에 영향을 미친 점을 고려해. X에게 폭력지배를 받았으며 순종적이었다고 지적하며, 수사단계에서의 자백이나 공판에서의 반성의 태도도 고려되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X는 이에 불복하여 즉시 상고, Y에 대해서는「형량부당」이라하여 검찰측이 상고했다.

민사소송

그 후, 사건 도중 6년간에 걸쳐 감금당해온 A는, 후쿠시마현 공안위원회를 상대로 2006년 2월에 '범죄피해자등 급부금 지급법'에 근거해 급부금을 신청했다. 그러나 동 위원회는 신청 시점에서 B가 살해당한지 10년이 경과되어 있다며, 2007년 3월에 신청을 기각하고 불지급으로 결정. 이에 불복한 A는 후쿠시마 지방재판소에 지급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2010년 7월 8일에 동 지반재판소는 「B에게는 기한 내에 신청하지 못할 특별한 사정이 있었음에도, 기계적으로 신청기한을 끼워맞추는 것은, 피해자 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제도의 취지나 정의의 관념에 현저하게 반한다」며, 동 위원회의 결정을 취소하는 판결을 언도했다.
출처:키타큐슈 일가 감금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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