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악녀 바토리의 이야기

땅크나가신다 작성일 13.01.27 17:2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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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살인마와 악녀 하면 빠지지 않는 이름이 있다. 엘리자베스 바토리, 헝가리어로 에르제베트 바토리 라고 불리는 여성이다.

헝가리 왕국 출신의 귀족으로, 역사상 가장 악명높은 연쇄살인마로 알려져 있으며 기네스북에서도 연쇄살인마 1위에 기록을 가진

사람이다. 훗날 루마니아의 제페드 플래시 백작과 함께 흡혈귀의 모태가 된 여성이기도 하다. 그럼 간단하게 이 여성과 그녀의 이야기를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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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장배경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왕가인 합스부르크 왕가와 비견될 정도로 강력했던 트란실바니아의 유복한 바토리 가의 여성이였어. 폴란드 출신의

이슈트반 바토리의 질녀고 당시 트란실바니아 공과 헝가리의 재상은 그녀와 사촌지간 이였지. 


당시 유럽은 막대한 재산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근친혼이 성행했는데 그결과 기형아나 정신이상자들이 많았지. 그녀의 친척 중에서도

숙모는 동성애자, 숙부는 악마숭배자에 다른 형제들은 섹스중독자 들이였다고 해. 기록에 따르면 그녀 또한 괴팍하고 불같은 성미를

지녔으며 색을 밝혀 14살때 하인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기록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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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결혼생활


1575년, 15살이 되던해 그녀는 5살 연상인 헝가리의 페렌츠 나더스디 백작과 결혼을 하게되. 그녀는 신분상 남편보다 더 높았기에 훗날

바토리 성씨를 유지할수 있었어. 나더스디는 유능한 장군 중 하나였는데 당시 강력해진 오스만 투르크의 침략을 여러번 격퇴하기도 했고

매우 잔인한 공포전술로 악명 높았다는군.


두 사람 사이에는 2남 3녀의 아이가 있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남편이 오스만군의 침략을 방어하느라 자주 자리를 비우자 여러 사람들과

성욕을 풀기위해 잠자리를 가져서 과연 저 백작의 아이가 맞는지도 의심 스러웠다고 해.


1602년, 그녀의 남편은 오스만군의 공격에 전사하고 말아. 미망인이 된 그녀는 자신의 소유지인 슬로바키아 지방의 체이테 성으로 이주했고

그 이후 병적으로 미모에 집착했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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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피의 악녀


당시 체이테성에 거주하고 있던 루터교 목사는 성의 이상징조에 대해 당국에 보고했다. 그것은 젊은 처녀들이 하나 둘 행방불명되는 일이

매일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바토리 가문의 권력에 당국은 제대로 수사를 하지 못했고 점차 행방불명 되는 처녀들의 수는 증가했다.


그러던 어느날, 천한 농부와 노예들의 딸 뿐만 아니라 성근처에 살던 귀족들의 딸들까지 행방불명이 되어 당국에 지속적인 수사를

요청하자 헝가리 당국은 수사를 준비했다. 1610년, 한 소녀가 자신이 감금되 있다가 극적으로 탈출했다고 말하며 이 행방불명 수사는

박차를 가하게 되.


그해 12월, 성안이 수상하다고 생각한 조사팀은 성의 지하에서 다수의 시체와 다양한 고문기구, 그리고 소수의 생존해있던 처녀들을

발견했다고 당국에 보고한 뒤 그녀를 용의자로 체포했다. 조사팀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젊은 처녀들을 납치해 고문하는것을 매우

즐겼으며 그녀들을 고문한 뒤 피를 받아 목욕을 하여 피부미용에 사용했다는 증언이다. 그들은 증거로 붉은 핏물과 고문도구들을

제출했다.


그녀의 이러한 악행에 모든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다른 여성들에 비해 상당히 동안이라는 점에서

이런 당국의 조사에 어느정도 수긍하는 모습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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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귀족 처녀들의 피가 더욱 효능이 좋다는 이유로 체이테성에 귀족여학교를 세웠고 학생들까지 납치했다고 한다.

조사에 따르면 그녀가 희생시킨 처녀들의 수는 1600여명이였고 1600년부터 1610년까지 총 612명의 여성을 살해했다는 일기또한

증거자료로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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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다량의 피를 효과적으로 짜내기 위해 여러가지 고문기구들을 사용했다고 전해지며 그 중 가장 유명한 고문기구는 훗날 유럽에서도 널리

애용되었던 아이언 메이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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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녀의 말년


1611년 1월, 그녀의 구명을 바라는 일족과 신하들의 탄원서를 보고 헝가리 왕은 감격하여 목숨만은 구제해 주었다. 대신 그녀를 따르던

하수인들은 모두 목이 잘린 후 화형에 처해졌으며 그녀에게는 체이테성에서 종신금고형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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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탑꼭대기에 갇혀서 지냈다. 창문은 모두 폐쇄되어 빛 한점 들어오지 않았으며 약간의 음식과 물을 내어줄

작은 구멍 한개만 남겨놓았다. 현재 체이테성의 옥상에는 4개의 교수대가 아직 잘 보존되 있다고 하니 이것은 탑꼭대기에 죄수가 있다 라는것을

알리는 효과를 냈다고 한다.


감금 4년째인 1614년, 음식을 밀어넣는 구멍을 통해 감시병이 그녀가 사망한 것을 확인했다. 그녀의 나이 54세 였다. 생전에 소유했던 영지는

후손들에게 이어지는 것이 순리였지만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당국에 영지와 재산이 모두 몰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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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녀의 진실


현대에 들어서 그녀의 재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녀는 살인마가 아닌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희생자 라는 것이였다.

그녀가 희생자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바토리가는 명성 만큼이나 많은 재산을 지니고 있었는데 오스만과의 전쟁으로 자금이 

필요했던 헝가리의 성주들과 왕은 그녀에게 천문학적인 금액의 돈을 빌렸다.


페렌츠 백작이 죽자, 페렌츠가의 친척들이 미망인이 된 그녀의 재산과 영지를 노렸고 헝가리왕 또한 사촌이지만 그녀에게 갚을

빚이 천문학적이였기에 이것 또한 큰 골치였다. 그러나 그녀는 전쟁 중에서도 세금을 걷거나 전장에 물자를 지원하는 등 남자 못지않은

수완을 지닌 여성이였기에 함부로 달려들수가 없었다.


결국 페렌츠가는 합심하여 패한 전쟁들을 그녀의 보급품 비리와 날조에 있다고 음모를 꾸며 점차 그녀의 영지와 재산을 잠식해갔다.

자손들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영지와 재산들을 페렌츠가에 분배해주며 자신들의 안위를 보장해주는 것을 조건으로 달았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었는지 페렌츠가는 헝가리 왕과 합심하여 그녀에게 처녀의 피를 즐기던 마녀로 당국에 전했고

갖은 수를 동원해 그녀를 음해했다. 결국 헝가리 왕 또한 기회를 잡고 조사팀을 파견하였고 그녀를 유폐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평가의 증거는 바로 공식 기록과 재판기록에 그녀의 악행에 대한 이야기는 없이 단지 마녀로 단정지었다는 점이다.

또한 그녀를 변호해줄 하녀들과 가신들을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페렌츠가가 모두 살인마로 단정지어 사형을 시켰다는 기록 또한

그녀가 악녀가 아니였을거라는 증언에 힘을 보태준다.


하지만 그녀가 악녀였는지 혹은 아니였는지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며 증거 또한 불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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