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할 때 밥과 반찬에 붙는 파리 때문에 짜증을 낸 경험은 다들 있을 것이다. 파리가 환영받지 못하는 건 화장실처럼 그리 깨끗하지 않은 곳을 다니던 그 발로 음식에 붙음으로써 불쾌감을 주고, 때에 따라서는 나쁜 병균을 옮기기까지 하는 탓이다. 원광법사가 화랑의 계명으로 준 세속오계 중 하나는 살생유택, 즉 ‘살생을 함부로 하지 말고 가려서 하라’지만, 그 원광법사라 할지라도 파리에 대해선 그리 호의적이었을 것 같진 않다. 하지만 세상에는 정말 흉측한 파리가 많다. 사람의 피를 빠는 파리도 한둘이 아니지만, 흡혈에 그치지 않고 살인병균까지 옮기는 파리까지 있으니, 음식에 걸터앉아 단맛을 즐기는 게 고작인 우리나라 파리는 착해 보이기까지 한다. 심지어 두 앞발로 빌기까지 하지 않은가! 그에 반해 흉측한 파리의 대표격인 체체파리(tsetse fly)는 사람의 피를 빠는 와중에수면병을 전파함으로써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기까지 한다. 수면병은 과연 무엇이며, 수면병과 얼룩말 사이에는 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아보자.
네덜란드에 사는 30세 여성이 열이 펄펄 끓어서 병원에 왔다. 평소 건강했던 이 여인은 열흘 전 3박 4일의 일정으로 탄자니아에 신혼여행을 다녀왔다고 했다. 탄자니아는 동물의 왕국으로 유명한 곳, 실제로 이들 부부는 세렝게티(Serengeti)와 타랑기레(Tarangire)를 비롯한 탄자니아의 관광지들을 차례로 구경했단다. 그것도 뚜껑이 없는 지프를 타고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호랑이나 사자한테 습격을 받으면 어쩌나?” 걱정하겠지만, 그런 일은 극히 드물다. 그보다는 모기나 파리처럼 오픈카에 탄 사람들을 목표로 삼는 곤충들이 훨씬 무서운 법으로, 잘못하다간 말라리아에 걸려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 열이 40도까지 오른 걸 보면 말라리아도 의심할 만했지만, 여인은 다행히 여행기간 동안 말라리아 예방약을 먹었고, 혈액검사 결과도 음성이었다.
그런데 혈액검사에서 이상한 물체가 발견됐다. 흡사 갈치처럼 생긴 그 벌레의 이름은 수면병을 일으키는 감비아파동편모충(Trypanosoma brucei gambiense)이었다. 여인의 말을 들어보자. “사파리를 다니는 동안 파리한테 여러 번 물렸어요.” 전부는 아닐지라도 그 파리 중 일부는 체체파리였고, 체체파리 주둥이에 있던 파동편모충이 파리가 여인을 물 때 몸 안으로 들어와 버린 것. 이 단계에서 바로 치료하지 않으면 수면병원충이 혈액은 물론이고 심장과 신장 등 여러 장기를 침범해 심각한 증상이 유발될 수 있다. 네덜란드 여인도 그랬다. 게다가 수면병 치료약에 부작용까지 나타나는 바람에 여인은 중환자실을 오가야 했고, 완전히 낫기까지 6개월의 투병생활을 더 견뎌야 했다.
http://static.naver.com/ncc/image/n_uio/bg_caption.gif");text-align:left;padding-bottom:1px;margin-top:5px;padding-left:6px;font-family:'굴림', gulim;color:rgb(114,114,114);">감비아파동편모충(Trypanosoma brucei)의 전자현미경 사진 <출처: (cc) Zephyris at Wikimedia.org>
이 여인이 사파리 투어를 갔다가 걸린 것처럼, 수면병은 아프리카, 그것도 사하라 남부 국가들에서만 유행한다. 이 병을 매개하는 체체파리가 그 지역에서만 서식하는 까닭이다. 그렇긴 해도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무서운 병인지라 세계보건기구는 일찌감치 이 병을 박멸하려고 노력해 왔는데, 여러 단체가 적극적으로 힘을 보탠 덕분에 환자 수가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2008년만 해도 수면병으로 죽은 이가 무려 4만8천명에 달했다. 이 병에 대해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http://static.naver.com/ncc/image/n_uio/bg_caption.gif");padding-bottom:1px;margin-top:5px;padding-left:6px;font-family:'굴림', gulim;color:rgb(114,114,114);">윈터보톰 싸인, 감비아파동편모충의 특징적 증상. <출처: CDC>
감비아파동편모충이 사람에게 들어오면 일단 혈액과 림프절에서 숫자를 불리는데, 이때 심한 열이 난다. 열과 더불어 이 시기 특징적인 증상이 있으니, 바로 목 뒤 림프절이 붓는 윈터보톰 싸인(Winterbottom’s sign)이다. 50세를 넘은 분들이라면 1977년 절찬리에 방영됐던 <뿌리> (알렉스 헤일리 원작)라는 미니시리즈를 기억할 것이다. 알렉스 헤일리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기 위해 12년간 아프리카 대륙을 헤맨 결과물이 바로 그 책인데, 그 1대 조상인 쿤타 킨테는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끌려와 노예 생활을 했다. TV에서 봤던 장면 하나. 쿤타 킨테가 노예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는 도중 총을 든 노예상인이 노예들을 한 줄로 쭉 세워 놓고 목을 어루만지고, 그러더니 몇몇 노예들을 총으로 쏴 죽인 다음 바다에 빠뜨려 버린다. 당시 4학년이었던 난 도대체 왜 그랬는지 알지 못했고, 아버지께 여쭤봤지만 “그냥 봐라”고 하신 걸로 보아 역시 모르시는 것 같아서, ‘노예들이 말을 안들어서 그랬겠지’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그 의문은 10년이 지난 후에야 풀렸다. 기생충학을 배우던 도중 교수님이 <뿌리> 얘기를 해주시면서 그게 윈터보톰 싸인을 보는 거였다고 말씀해 주신 것. 때로는 기생충학이 오래된 의문을 해결해 주기도 한다. 참고로 윈터보톰 (Thomas M. Winterbottom)은 18-19C 시에라리온에 4년간 살던 영국인으로, 당시 노예상인들이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노예를 데려갈 때 목 뒤 림프절을 만져보고 수면병 감염 여부를 판단한다는 것을 관찰해 이를 최초로 기술한 사람이다. 노예상인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지만 사실 그는 의사였는데, 내 생각과 달리 목뒤 림프절이 붓는 증상에 그의 이름을 붙인 건 후세 사람들이었단다.
혈액과 림프절에서 어느 정도 숫자가 늘어나면 파동편모충은 뇌로 들어가 뇌와 뇌수막에 염증을 일으킨다. 원래 뇌에는 뇌혈관장벽(Blood-Brain Barrier)이란 게 있어서 병균으로부터 보호되지만, 수면병은 그런 장벽쯤은 우습게 뚫어 버린다. 이때가 되면 뇌염의 기본 증상인 열과 두통은 물론이고 의식 자체를 잃어버리게 되는데, ‘수면병’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이 때문이다. 문제는 일반적인 수면과 달리 웬만큼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수면병에 쓰는 약이 뇌혈관장벽을 뚫지 못하므로 이 단계가 되면 약이 잘 듣지 않는다는 거다. 그러니 사파리투어에 갈 때 체체파리를 조심해야 하고, 혹시 물리는 경우 빠른 진단과 치료가 필수적이지만, 실제로 수면병에 대한 지식이 있는 여행자는 그리 많지 않다.
우레크(Karin Urech) 박사는 “여행자들은 진짜로 자는 걸까?”라는 논문에서 “세계보건기구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현지인들의 감염은 크게 줄고 있는 반면, 여행자들이 걸리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고 개탄하면서 “여행자들은 현지 주민에 비해 잠복기가 짧고 병의 진행이 빠르며, 윈터보톰 싸인같은 특징적인 증상이 나타나지 않아 진단이 늦어지는 경우가 많으니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한 바 있다. 특징적 증상이 없는 건 여행자들이 현지인과 달리 수면병에 대한 면역을 갖고 있지 않아서일 텐데, 우레크의 분석에 따르면 외국에서 수면병에 걸려온 57명 중 무려 86%가 놀이공원과 사파리를 갔다가 걸린 경우였다 (나머지는 해외 군복무 5%, 사업 3.5% 등).
http://static.naver.com/ncc/image/n_uio/bg_caption.gif");text-align:left;padding-bottom:1px;margin-top:5px;padding-left:6px;font-family:'굴림', gulim;color:rgb(114,114,114);">감비아파동편모충의 생활사
그런데 의문이 있다. 모기에게 물리지 않는 것도 어려운데, 기회를 노리다 잽싸게 흡혈하는 체체파리를 대체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호랑이나 사자를 보고 싶은데 사파리를 안갈 수도 없고 말이다. 뚜껑이 있는 지프를 타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결정적인 방법이 하나 있다. 바로 줄무늬 옷을 입는 것. 우리가 흔히 얼룩말이라고 부르는 zebra는 한국말 이름이 잘못 붙여진 대표적인 동물로, 몸에 얼룩 대신 줄이 그어져 있으니 ‘줄말’로 불리는 게 맞다. 얼룩소와 비교해 보면 확연히 그 차이를 알 수 있는데, 이 줄은 대체 왜 생겼을까? 학자들은 여러 의견을 내놓았다. 첫째, 위장. 줄 때문에 숲에 들어가면 잘 안보인다. 둘째, 온도조절. 검은 줄 부분은 온도가 빨리 오르고 하얀 부분은 온도가 늦게 오른다. 셋째, 얼룩말은 떼를 지어 다니는 동물인데 줄이 있으면 같은 얼룩말끼리 쉽게 식별이 가능하다. 어느 것 하나 그럴 듯한 게 없다. 특히 첫째와 셋째는 상호 모순이지 않은가?
여기에 종지부를 찍어 준 학설이 바로 호바스 (Horvath, G)라는 학자. 그는 얼룩말의 줄이 수면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진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세로로 된 줄무늬가 편광현상을 일으켜 파리가 사물을 식별하는 데 지장을 준단다. 즉 얼룩말은 원래 수면병에 취약한 동물이었는데 줄무늬를 만듦으로써 체체파리에 물리지 않게 됐다는 것. 진짜로 그런지 알아보기 위해 연구팀은 표면을 끈끈이로 만든 가짜 말 모형을 준비했다. 흰 말, 검은 말, 갈색 말, 그리고 얼룩말. 그들은 미리 잡아온 말파리를 거기다 풀었고, 일정 시간이 지난 후 각각의 말 모형에 붙은 파리 숫자를 셌다. 검정말에는 562마리가, 갈색말에는 334마리가, 흰말에는 22마리가 붙었다. 그럼 얼룩말에는? 놀랍게도 얼룩말에 붙은 파리는 겨우 8마리였다. 체체파리를 가지고 한 실험은 아니지만, 얼룩말의 줄이 파리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는 게 최초로 증명됐다. 진화과정에서 줄이 있는 얼룩말이 더 많이 선택되도록 압력을 받은 결과라는 건데, 이 실험에 대해 한 언론은 얼룩말의 줄이 “세계에서 가장 영리한 파리 격퇴제”라고 격찬했다. 그러니 정 사파리를 가야겠다면 줄무늬가 있는 옷을 입는 게 좋겠다. 그냥 줄무늬가 아니라 세로 줄무늬 옷을.
http://static.naver.com/ncc/image/n_uio/bg_caption.gif");text-align:left;padding-bottom:1px;margin-top:5px;padding-left:6px;font-family:'굴림', gulim;color:rgb(114,114,114);">얼룩말의 줄과 파리에 관련된 실험을 하는 장면 <출처: Dr. G?bor HORV?TH>
학자들이 제기한 또 하나의 의문은 감비아파동편모충이 혈액에서 버틸 수 있는 비결이었다. 알다시피 혈액 안에는 1 mm3마다 5천-1만개의 백혈구가 있고, 새로운 병원체가 들어오면 불과 2-3일만에 항체가 만들어져 병원체를 공격한다. 그런데 감비아파동편모충은 혈액 내에서 여유 있게 헤엄치고 다니면서 숫자까지 불리니, 신기할 수밖에. 비결은 파동편모충이 기생충계의 패션모델이라는 거였다. 2-3일마다 항체가 만들어지지만, 그 항체는 어디까지나 파동편모충의 표면단백질에 대한 것. 만일 그 표면단백질을 2-3일마다 갈아입는다면, 그리고 표면단백질의 종류가 무지 다양하다면 항체가 아무리 많이 만들어져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감비아파동편모충이 바로 그랬다. 이 기생충은 VSG(variant surface glycoprotein)이라 불리는, 표면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를 잔뜩 갖고 있어서 이것들이 교대로 작동하면서 2-3일마다 표면을 싹 바꾼다. “범인은 빨간 옷을 입었다”라고 해서 빨간 옷 입은 사람만 조사하는데 알고 보니 파란 옷으로 갈아입고 유유히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신출귀몰한 범인과 비슷하다고 할까? 옷이 많다 못해 아예 옷 공장을 몸안에 차려버린 감비아파동편모충이야말로 진정한 패션모델이다.
http://static.naver.com/ncc/image/n_uio/bg_caption.gif");text-align:left;padding-bottom:1px;margin-top:5px;padding-left:6px;font-family:'굴림', gulim;color:rgb(114,114,114);">감비아파동편모충 혈액 속에서 유유히 헤엄친다 <출처: CDC>
책에는 뇌증상이 나타나기 전에는 펜타미딘(pentamidine)을, 나타난 후에는 슈라민(suramin)을 정맥주사하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안 듣는 경우도 많고 부작용도 심해 요즘엔 에플로니틴(eflornithie)을 쓰기도 하는데, 2006년 수면병의 치료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됐다. 감비아파동편모충의 증식에 꼭 필요한, 하지만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효소가 발견된 것. 그러니 이 효소를 억제하는 약제를 만들어 내면 사람에게 별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수면병만 치료할 수 있다. 이 실험결과는 Cell이라는 유명 학술지에 실린 바 있는데, 놀랍게도 이 논문의 제1 저자가 미국 존스홉킨스 의대에서 연구한 한국인 이수희 박사다. 이 발견으로 인해 어려워 보이던 수면병 백신까지도 기대할 수 있단다. 뛰어난 연구를 하신 이수희 박사와 동료들께 파이팅을 전한다.
참고문헌1. Fatty Acid Synthesis by Elongases in Trypanosomes. Soo Hee Lee, Jennifer L. Stephens, Kimberly S. Paul, and Paul T. Englund. Cell 126, 691?699, 2006
2. Tryps after adventurous trips F.A.P. Claessen1*, G.J. Blaauw, M.J.D.L. van der Vorst1, C.W. Ang, M.A. van Agtmael Netherland J Medicine 2010 , vol . 6 8 , n o 3; 144-145
3. Sleeping Sickness in Travelers - Do They Really Sleep? Karin Urech, Andreas Neumayr, Johannes Blum. Plos Neglected Tropical Diseases November 2011 Volume 5 Issue 11 e1358.
4. An update on antigenic variation in African trypanosomes. Luc Vanhamme, Etienne Pays, Richard McCulloch and J.David Barry. TRENDS in Parasitology Vol.17 No.7 July 2001
5. How the zebra got its stripes. Egri, ?., Blah?, M., Kriska, G., Farkas, R.,Gyurkovszky, M., Akesson, S. and Horv?th, G. J. Exp. Biol. 215, 736-7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