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그는 가전제품을 사랑합니다

금산스님 작성일 13.04.09 23:50:12
댓글 2조회 2,606추천 4

웃대의 초록환타님 작품입니다.

 

오늘은 비가 내렸다. 비는 시원한 소리를 내면서 도심의 바닥으로 추락했다.
 
침대에 누워있던 사내아이가 빗소리를 듣고 일어나 앉았다. 책을 내려놓고 창문밖으로
 
손을 내밀어 보았다. 손바닥이 금새 젖어들었다.
 
해우가 스위치를 눌렀다.
 
순식간에 열려있던 집 안의 모든 창문이 덜컥, 잠겼다.
 
비가 내리면 이렇게 창문을 닫아주어야한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녹스는 것을 해우는 바라지 않았다. 최첨단기기라는 광고를 아무리 들어도- 물에 빠져도
 
상관없을 정도로 방수에 강하다고해도 그는 끄덕하지 않았다. 해우는 비가 올 때면 늘 창문을 잠갔다.
 
닫힌 집안이 어두컴컴해졌다. 싸한 느낌을 느낀 해우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아름아"
 
곧 똑똑 가벼운 노크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리자 그녀가 보인다. 해우는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말했다.
 
"방이 좀 추워. 온도를 좀 높여줘"
 
"알겠습니다. 몇 도 정도로 맞추어두면 될까요"
 
해우는 책을 접고 빤히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문을 열었던 자세 그대로 미동없이 서있었다.
 
"아름아, 인간들은 그런식으로 말하는게 익숙지 않아. 좀 춥다고 하면 온도를 조금만 올리면 되는거야"
 
곧 그녀의 대답이 돌아온다.
 
" '조금만'이 수학적으로 얼마인지 알수가 없어요. 온도를 최대한 올리면 될까요"
 
해우는 머리를 감싸안았다.
 
"최대한 올리면 너무 뜨겁다구! 으음... 그래, 좋아. 10도 가량만 올려. 그러면 될거야"
 
아름이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방문을 도로 닫았다.
 
잠시 기다리자 벽에 은은한 와인색 형광불이 들어왔다. 점차로 실내의 공기도 따듯하게 데펴졌다.
 
해우는 책상 앞에 달린 액자가 기울어진 것을 발견하고 다가가 똑바로 했다.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와 자신이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언제 찍혀진것이었더라. 골똘히 생각했다.
 
아마 자신이 여덟 살 때 놀러간 노량진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일 것이다.
 
한달 뒤 부모님은 부부동반 등산에서 돌아오시다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해우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가족사진이었다. 그들 세명이 나란히 찍혀있는 유일한 사진.
 
해우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잠깐동안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 때 책상위에 놓인 타이머 시계가
 
맞춰진 알람시각에 울리기 시작했다. 새벽 6시였다. 노크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아침식사를 하실거에요, 안하실거에요"
 
아름이는 억양없이 단조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궁금한 것을 물을때는 뒷부분의 악센트를 높이라는 말을
 
몇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아마 그녀는 그것을 절대 스스로 배우지 못할 것이다.
 
해우는 다음 자동패치 기간에 의문문의 억양악센트를 첨가해달라고 요청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매번 그녀의 억양을 수정하지 못했다. 9년동안 들어왔던 그 억양을 쉬이 지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응, 먹고 나갈래"
 
아침식사 메뉴를 묻는 와중에도 흐트러짐 없는 옷매무새와 단정한 포니테일 머리가 묘했다. 해우는 여지껏
 
한번도 지저분한 그녀를 볼 수 없었다. 그녀는 그럴 수 없으니까.
 
아름이는 지구종말이 내일이라는 사실을 고하는 것처럼 진지하고 사무적인 어조로 담담한 아침식사 메뉴를 전했다.
 
"소금뿌리지 않은 달걀프라이와 커피, 토스트 두 개"
 
해우는 풉 하고 웃었다. 아름이 의아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자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해우는 교복이 싫었다. 자연스레 학교도 싫었다.
 
하지만 교복이 싫고 학교가 싫어서 그것들이 싫은 건 아니었다.
 
8살때 부모님을 잃은 그 때부터 해우는 말을 잃었다. 부모님을 짓이긴 덤프트럭이 그가 가진 사교성까지 죽여버린것 같았다.
 
초등학교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벗어보지 못한 외톨이라는 수식어가 마치 낙인처럼 그에게 감겼다.
 
등에 매인 책가방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스쿨제트기가 부드럽게 공중에서 급강하 하면서 그의 앞에 가볍게 내려 앉았다.
 
네모난 강철부분이 접히면서 번쩍번쩍한 계단이 드러나고 해우는 굳은 얼굴로 스쿨홈에 올랐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힘겹게 오르자, 여기저기서 반색하는 얼굴들이 보였다.
 
"여! 우리 이해우군아니야!"
 
병태가 장난스럽게 외치자 저마다의 친구들과 수다를 떨던 모든 아이들이 순간 조용해졌다. 그리고 나와 병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다리가 쓰러질 것처럼 달달 떨렸다.
 
"우리 해우, 왜 이제 왔쪙. 보구 싶었짜낭"
 
실실거리는 병태 꼬붕들이 양 옆으로 다가와 어깨동무를 했다. 해우는 끌려가듯 그들이 앉는 맨 뒷자리로 가게 되었다.
 
"난 하루라도 너 안보면 죽을 것 같다니까... 주말을 뭐하고 지냈냐?"
 
병태는 커다란 손을 해우의 얼굴에 척 얹었다. 해우는 벌벌 떨면서 말한마디 하지 못했다.
 
스쿨홈에 타고있는 모든 아이들이 반쯤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반쯤은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그 꼴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의 시선이 몰리자 병태란 놈은 목소리를 깔며 커다랗게 무게를 잡았다.
 
"야이 씨, ... 오늘은 몇마디나 하는지 함 볼까? 3분안에 말 안하면 저번처럼 바닥 핣을 줄 알어라. 3분마다 한 마디씩이다."
 
해우는 이를 꽉 물었다. 죽어도 말하기 싫었다. 죽어도.
 
그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오로지 세 사람 뿐이다. 그중 둘은 진작에 죽어버렸고, 한명은 엄밀히 말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와 말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그의 집 거실에 있을 터였다.
 
해우는 이 살벌한 상황에 그녀가 생각나자 묘하게 안정이 되는 것을 느꼈다.
 
여가라던가 취미가 없는 그녀는 오직 그가 돌아올때까지 거실 구석 창문에서 멍하니 햇빛만 쬐고 있을 것이었다.
 
해우가 살며시 미소짓자 병태의 인상이 확 찡그려졌다.
 
"웃어? 씨.발. 웃었어?"
 
병태는 양 손에 침을 툇툇 뱉더니 해우의 뺨을 후려갈겼다. 해우는 순식간에 스쿨홈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홈에 타고있는 남자아이들이 요란하게 환호성을 냈고, 여자아이들은 한심하다고, 또는 유치하다고 입을 모아 경멸을 내뱉었다.
 
병태는 과장되게 길길 날뛰었다. 엎어진 해우를 잘근잘근 밟겠다며 걸어가는 찰나, 그의 꼬붕 중 하나가 그를 말렸다.
 
"야, 야... 참아. 휴일 끝나고 월요일부터 맞으면 쟤 인생도 너무 불쌍하잖아?"
 
"뭐? 이거 안놔?"
 
"에이... 그러지 말구. 오늘 우리집으로 새로 하이넴 배달 되는데... 그거나 보러가자. 사진도 있어"
 
"하이넴? 최신모델루? 씨.발, 그거 좃도 비싼거 아냐"
 
"키키키, 울 꼰대가 좀 하잖냐. 근데 내껀 아니고 울 형꺼야. 씨.팔"
 
"넌 하나 있잖아 새끼야! 울 집엔 할머니 모델밖에 없어 개.새꺄~"
 
병태는 꼬봉과 이야기를 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꼬봉녀석이 핸드폰으로 사진을 보여준다며 꺼내들자
 
패거리 모두가 그 녀석 주변으로 우루루 몰려들었다. 아이들 사이에서 요란하게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병태가 잽싸게 핸드폰을 뺏어들고 눈 앞에 가져다댔다.
 
"우, 우와! 죽인다!"
 
"그,그렇지? 죽이지? 랭크 A 하이넴이다 짜아식아. 잔기깍기, 청소, 요리... 애완동물 밥주는 것 까지 다된다 크크"
 
"새꺄, 지금 그게 문제냐! 좃도 이쁜데? 원래 A 랭크는 다 이러냐?"
 
"몰라, 이번에 형이 대학간 기념으로 꼰대가 사주는 거라서. 무지비싸, 대충 8천 한다는데?"
 
꼬봉녀석의 핸드폰을 바라보던 병태의 눈초리가 야릇해졌다.
 
"야... 이거, 그것도 되는거냐?"
 
꼬봉 녀석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병태놈에게 섣불리 하이넴이 배달되었다고 떠벌린걸 후회하는 듯했다.
 
관심을 끌기위해 한 짓 치고는 대가가 클 거다. 해우는 조용히 생각했다.
 
꼬봉이 떠듬떠듬 말했다.
 
"모, 몰라... 우리 형꺼래도 그러네? 이제 막 대학생 된 아들한테... 설마 위로 기능까지 첨부된 걸 주려고? 아닐껄"
 
'위로기능'이란, 고급 하이넴이 가지고 있는 섹.스 기능을 고상하게 부르는 말이었다.
 
역겨웠다. 해우는 집에있는 그의 아름이를 생각했다. 그리고 힘껏 도리질쳤다.
 
병태는 꼬봉의 말에도 불구하고 핸드폰의 사진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꼬봉은 점점더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이윽고 병태가 입을 열었다.
 
"야, 오늘. 너희 집에 놀러간다. 나 혼자서"
 
"어, 어? 그치만.. 오늘은 좀..."
 
"왜 새끼야. 아까는 놀러 오라매"
 
"아니 그게 그러니까..."
 
"그럼, 오늘 나 놀러간다. 니네 부모님 맞벌이라 바쁘시잖아. 니네 형도 대학교 다니느라 늦게오고"
 
꼬봉은 병태가 자신의 집을 제집드나들듯 왔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뇌리가 하얗게 비었다.
 
"그래, 그럼 오늘 가는거다"
 
병태는 핸드폰을 돌려주면서 꼬봉의 눈빛을 한번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꼬봉은 찍소리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해우는 혹시라도 병태가 자신에게 다시 해꼬지를 할까 목을 최대한 움츠렸다.
 
다행이 놈은 꼬붕네 집에 새로온 하이넴과 자신의 구형 하이넴을 비교하고 욕설을 내뱉으며 통학시간 내내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인 1하이넴이 통용된 건 정식적으로 2147년도였다. 하지만 해우는 훨씬 더 빨리 하이넴을 보았다.
 
법원 판결 당시였다. 가뜩이나 줄어든 출산률로 인해 고아원과 탁아소같은 보육기관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양가 부모가 모두 죽었고, 부모가 둘 다 고아 출신이라 일가친척이 없습니다."
 
"흠... 그럼 어떻게 하는게 좋을 것 같소?"
 
"그게, 이러면 어떻습니까?"
 
경찰장은 판사에게 다가가 귀엣말을 했다. 판사는 흥미로워하며 경찰장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법적으로 내가 가장 최초의 선례였다.
 
그 후로, 부모를 잃고 의탁할 곳이 없는 고아들에게는 최고 랭크의 하이넴과 매달 정부에서 120만원 가량을 지급하기로 했다.
 
물론 20살까지만.
 
해우는 여덟살이었다. 법정을 나오면서 징징 우는 그에게 경찰장이 왠 여자를 데리고 왔다.
 
새카만 생머리가 허리께에서 출렁였다. 여자의 크고 검은 눈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경찰장이 말했다.
 
"인사하거라, 앞으로 네가 돌보아야할 아이다"
 
해우는 겁에 질린채 경찰장의 뒤로 숨어들었다. 분명 그녀는 아주 예뻤다. 하지만 해우는 그녀의 무표정이 두려웠다.
 
그녀의 작은 입술이 열렸다.
 
"안녕"
 
해우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녀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리고 수줍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안녕"
 
해우는 어리둥절했다. 경찰장이 피식웃으며 아가씨에게 말했다.
 
"이름이나 말하지 그래?"
 
곧 그녀가 차렷자세를 취했다. 경찰식으로 거수경례를 한 그녀가 낭랑하게 대답했다.
 
"최. 아. 름. 입니다."
 

 

 


"다녀왔어"
 
"다녀오셨어요"
 
아름이가 앞치마를 두른 채 부엌에서 걸어 나왔다. 그가 통학하기 30분 전에 맞추어 식사준비를 했다.
 
"오늘은 뭐야?"
 
"순두부찌개"
 
해우는 다시 피식 웃었다. 십여년째 들어도 억양없는 아름이의 목소리로 들리는 음식 이름은 우스웠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다 되었습니다"
 
두부를 써는 그녀의 가지런한 흰 손을 보고 있을 때였다, 찬장에 비스듬이 걸쳐진 유리조각이 도마위로 떨어져 박살났다.
 
커다란 조각 하나가 그녀의 손 위에 박혔다. 흰 피부위로 빨간 피가 솟구쳤다.
 
"뭐, 뭐야! 괘, 괜찮아? 괜찮은거야?"
 
"괜찮습니다"
 
억양없는 아름이의 말투에 해우는 화가났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피가 이렇게 나는데! 기다려!"
 
해우는 핸드폰 슬라이드를 팍 열어재끼고 서둘러 다이얼을 눌러 전화했다.
 
"거기, 하이넴 수리 센터 맞지요?"
 
"예, 그렇습니다."
 
"제 하이넴이 베였어요, 피가 철철 흐릅니다."
 
"잠시만요. ... 우선 댁의 하이넴의 모델 개요를 말씀해주시겠습니까?"
 
해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기억이 나지 않자 소리쳐 물었다.
 
"아름아! 네 모델 개요가 뭐였지?" 해우는 아름이 말하는 번호를 그대로 상담원에게 말했다.
 
"R 급이고요, 아이를 맡아 기르는 것에 특화되어 있지만, 모든 기능이 첨가된 모델이에요 예..

제작된지는 대충 9년가량 되었구요. 아! 외형은 인간 여성의 19살 정도에요."
 
"아.. 알급이요? 죄송하지만... 특수 수리 센터에 연결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높은 모델 타입은 저희 쪽에서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요. 잠시만요
 
아, 그런데 소유주 분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17살입니다."
 
"세상에... 어머, 실례했습니다. 잠시만요"
 
해우는 그런 반응에 익숙해져있었다. 17살이 R급 하이넴을 가졌다면 두가지였다.
 
부모가 엄청난 부자거나, 혹은 고아이거나. 해우는 후자인 경우였다.
 
신호음이 다시 울리고, 이번에는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해우는 다시 설명을 반복했다.
 
"음... 손 피부가 찢어졌다구요? 걱정마십시오. R급은 현재 존재하는 하이넴중에 최고급 계층입니다.
 
R급 하이넴의 피부는 자가치유기능도 있어 왠만한 상처는 스스로 치유되거든요.
 
인조심장이나 갈비뼈 내부의 에너지 동력원만 고장나지 않으면 거의 멀쩡합니다. 머리만 각별히 조심하세요.
 
머리엔 메인 메모리가 있으니까요."
 
"휴..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메인 메모리라구요?"
 
"아 예. 9년되셨다고 하셨지요? 그럼 그 메인메모리에 9년간의 기억이 고스란히 축적되어 있는 것이지요.
 
많은 분들이 하이넴을 교체할 때 그 메인메모리를 그대로 사용하시죠.
 
아무래도 정을 느끼는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요."
 
"그렇군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해우는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다친 손을 멍하니 바라보며 미동없이 서 있었다. 빨갛게 드러난 베인 부분을 보며
 
해우는 붕대를 가져다 어설프게 묶었다.
 
"한동안 이렇게 하고 있어. 요리도 하지마. 내가 할 테니까"
 
"요리를 하지 말라구요"
 
"그래! 하지마. 이 손으로 뭘 하겠다고... 나으면 다시 하고. 오늘은 내가 할게"
 
해우는 아름이의 다친 반대손을 끌어당겨 소파에 앉혔다.
 
그녀는 또다시 의아스러운 얼굴로 입에 말을 굴려보았다.
 
"요리를 하지 말라..."
 
해우는 부엌으로 돌아가 그녀가 썰던 두부를 마저 네모나게 자르기 시작했다.
 

그 날 저녘상은 최악이었다.
 
아름이는 햇볓을 쬐는 것만으로 에너지를 얻으므로 음식을 섭취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불쌍한 해우는 인간이었고, 먹어야 했다.
 
양철냄비 안에 누렇게 타들어붙은 찌개는 한 숟갈 한숟갈이 악몽이었다.
 
하지만 해우는 그 모습을 시선한번 돌리지 않고 쳐다보는 아름이를 의식하며 꿋꿋이
 
밥 한공기를 먹어치웠다. 물론 배가 요란하게 구르륵 거렸다.
 
하지만 왠지 행복했다.
 
버스에서 병태녀석에게 턱을 얻어맞고, 무시당하고, 학교에서도 따분한 수업만 듣고 도망치듯 귀가했지만,
 
오늘 자신이 오랜만에 아름이를 위해 무언가를 했다는 기분이 들었던 까닭이었다.
 

 

 

9살의 태우는 조심스럽게 도화지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뭐에요 주인님"
 
"이...씨.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그냥, 해우야. 라고 부르라니까!"
 
"... 네, 주인님"
 
"아 정말! ...그럼 주인님이라고만 부르지마. 이건 명령이야. 알았지?"
 
"예"
 
아름이는 도화지를 받았다. 거기엔 파란색 노란색 크레파스로 삐뚤빼뚤한 그와 아름이의 그림이 그려져있었다.
 
"나하고, 음.. 음..."

해우는 아름이를 칭할 만한 말을 찾아내지 못하고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엄마"
 
그 순간 부엌에 서있던 둘 사이의 공기가 멈춘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해우만이 느낀 기분이었다.
 
"전 엄마가 아닙니다"
 
"... 아냐"
 
"엄마는 생물학적으로 주인님을 잉태해서 출산한 인간 여성이거나, 혹은 법적으로 육아권을 양도받은
 
다른 여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전 그 두가지 어느것에도 해당되지 않..."
 
"아냐! 아냐! 네가 내 엄마야! 응? 우리 엄마해, 그냥 우리 엄마해... 제발... 응? 제발..."
 
해우는 펑펑 눈물을 쏟았다. 아름이는 말을 멈추고 가만히 해우를 바라보았다.
 
해우는 한참동안 울었다. 계속 울다가 종내엔 지쳐버렸다. 그래서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안아줘"
 
그녀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어색하게 벌린 두팔로 아홉 살의 해우를 끌어 안았다.
 
"우리 엄마 안해도 되니까... 아무데도 가면 안돼?"
 
"... 예, 안가겠습니다"
 
"... 약속한거야? 꼭?"
 
"꼭, 안가겠습니다."
 
해우의 작은 고사리손이 아름이의 등을 사붓이 감싸 안았다.
 

 

 


해우는 잠에서 깼다. 자면서 계속 울었는지 눈이 부은 느낌이 들었다. 저 때 꿈을 꾸다니. 이상하네.
 
그 때 변함없이 똑똑똑 소리가 들렸다. 해우가 들어오라고 하자 그녀가 변함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침식사를 하실거에요, 안하실거에요"
 
"응, 먹고 나갈래"
 
"캘리포니아 롤 두개, 레모네이드 한 잔"
 
해우는 비식 웃었다. 아침을 깨우는 무미건조한 억양이 왠지 그에게 힘내라고 말해주는 듯 했다.
 
"응"
 

 

 

해우는 다시 스쿨홈을 기다렸다. 홈이 다시 착륙하고 계단이 열렸다. 해우는 쉼호흡을 한번하고
 
홈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오늘은 아무도 그에게 빈정거리는 어조로 인사를 던지지 않았다.
 
해우는 그 이유를 쉽게 알아챘다. 누군가 그 대신 병태에게 당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호되게.
 
해우의 발 앞으로 병태의 꼬붕이 요란하게 엎어졌다. 이미 여러대 엊어맞은 듯 했다.
 
고개를 들자 씩 씩 거리는 병태가 앞에 보였다.
 
"오늘은 너한테 일없으니까, 뒤지기 싫으면 잽싸게 앉아라"
 
해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곧 한쪽 눈가에 퍼렇게 멍이 든 병태꼬붕이
 
병태의 다리를 부여잡고 빌기 시작했다.
 
"병태야, 몰랐어. 나도 몰랐어. 진짜라니까?"
 
"야이 개.새끼야, 너 때문에 이게 뭐야? 어제 우리집에도 니네 엄마가 전화다했다. 알아? 이 씹새끼야.
 
이거 보여? 이거 보이냐고?"
 
병태는 자신의 뺨을 내보였다.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꼬붕녀석도 아무 말 못하고 어물거렸다.
 
"울 에미한테 뺨 맞았다 새.끼야. 너 때문에!"
 
병태는 다시 발을 내질러 꼬붕녀석의 옆구리를 걷어찼고, 녀석은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옆으로 고꾸라졌다.
 
곧 다른 병태 패거리 녀석 중 하나가 스쿨홈에 탔고, 녀석은 상황을 보고 잠깐 놀라 굳었으나
 
이내 눈치채고 빠르게 맨 뒷자석에 소리없이 앉았다. 녀석이 다른 패거리에게 물었다.
 
"왜 저래?"
 
"어제 병태가 빵코네 하이넴 함 먹어볼라고 갔었잖아?"
 
"어, 근데 그게 왜?"
 
"도중에 빵코네 형 와서 걸렸대. 그래서 둘이 뒤지게 맞았고. 그리고 빵코네 엄마가 병태네 집에 전화도 했다나봐"
 
"씨.발, 조터질만하네. 으짜스까이?"
 
"기냥 냅둬라, 나서서 말렸다 같은 꼴 날라"
 
"가래도 안간다 새끼야 낄낄"
 
일명 '빵코'라는 녀석은 오롯한 병태네 패거리가 아닌 듯 했다. 아무도 저렇게 도와줄 생각을 않고 있으니.
 
빵코녀석은 학교에 도착할때까지 병태에게 죽도록 맞았다.
 
반 실신 상태로 엎어진 녀석에게 병태가 내뱉었다.
 
"너, 씨.발. 내가 못한거 니가 책임져라. 알았냐? 다른 하이넴을 찾든 쉬운 계집을 찾아서 소개를 시켜주든간에
 
니가 책임지라고. 알간? 찾을때까지 아침마다 까일텡께"
 
아이들은 아무도 빵코를 부축해주지 않고 우르르 스쿨홈에서 내렸다. 해우는 내리면서 몇번이나 녀석을 돌아보았다.
 

 

 

"식재료가 떨어졌습니다. 밖에 나가서 사오겠습니다."
 
"응, 그래"
 
해우는 무심코 대답하고 책을 들다가 다시 후다닥 책을 내려놓았다.
 
"같이 가!"
 
"같이..가요"
 
그녀가 또 고개를 갸우뚱해보였다.
 
아름이는 벌써 청바지에 흰 티셔츠로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다친 오른손말고 왼손에 장바구니가 끼워져 있었다.
 
"그래, 같이가. 너 팔 다쳤잖아. 무거운거 들면 안되니까, 가서 니가 골라. 내가 들게."
 
"전 괜찮습니.."
 
해우는 아름이의 팔에서 장바구니를 낚아채고 먼저 전자문의 센서를 열었다. 그녀가 쭈볏쭈볏한 걸음새로 따라나왔다.
 
그녀의 메모리 데이터에 이 사건은 어떻게 기억될까. 주인이 대뜸 따라나서는 장보기라니.. 킥킥. 왠지 웃음이 나왔다.
 
해우는 그녀가 주로 간다는 마트로 향했다.
 
"어서오세... 응? 아가씨, 어라? 오늘은 왠 신사분과 함께 오시네? 동생인가?"
 
야채물 앞 아저씨가 알은체를 했다. 해우는 아름이가 또 주인님이라느니 하는 말을 쓸까싶어
 
선수를 쳤다.
 
"예, 동생입니다. 누나가 팔을 좀 다쳐서요"
 
슬쩍 그녀를 보니 더욱더 의아스럽다는 눈으로 멀뚱이 해우를 보고 있다.
 
"아, 으쩌다가!"
 
"예, 찌개거리를 칼질하다가 그만"
 
"저러어언! 자네가 잘혀! 누나가 참하니 아주 예쁘고 착하게 생겼어! 저런 누나 있는게 쉬운 일인감 어디?"
 
"그럼요. 알겠습니다."
 
"그려, 그려. 아가씨, 늘 사던걸로 줄까?"
 
"예, 그렇게 주세요"
 
대답을 가로채는 나를 아저씨가 의아스럽게 보았다. 하지만 곧 비닐랩에 야채를 싸서 건넸다.
 
마트 한바퀴를 돌자 어느덧 커다란 비닐이 세 개나 되었다. 수산물 센터를 마지막으로 그녀가 해우를 돌아보았다.
 
"끝입니다. 다 샀어요"
 
"후...그래?"
 
내심 무거워죽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애써 담담한체 하던 해우는 반색했다. 짐 하나는 자신이 들겠다는 아름이를
 
만류하며 해우는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걷는 길은 온통 노을의 따뜻한 빨강에 잠겨있었다. 길을 걷는 내내 몸이 따뜻했다.
 
"아- 따뜻해"
 
옆을 보니 그녀가 다시 의아스럽다는 눈으로 해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붉게 비추는 노을빛에 잠긴 그녀가 더 아름다워보였다. 본인은 전혀 자각할수 없는 아름다움이지만.
 
"응, 햇빛이 비추니까. 따뜻해"
 
"하지만 지금은 공기의 기온이 낮습니다. 인간이 온기를 느낄만한 온도가 아닙니다"
 
물론 피부로 와닿는 물리적인 따뜻함은 아니지만... 해우는 난감했다. 따뜻하다는 걸 어떻게 표현한다?
 
"음... 있잖아. 그건."
 
그녀가 대답을 기다리며 빤히 해우를 쳐다보았다.
 
"오늘 내가 너를 위해 짐을 들어주는 것 같은거야"
 
"아..."
 
아름이는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해우는 생각에 잠긴듯 골똘해보이는 그녀의 옆모습을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서 걸음을 빨리했다.
 
영문도 모르는 그녀도 해우를 따라가기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였다.
 
해우가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아름이가 멈춘 해우를 보면서 자신도 걸음을 멈추었다. 해우는 앞을 보았다.
 
빵코였다.
 
눈에 시퍼렇게 멍든채 강둑 시멘트에 앉아 있었다. 가만히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빨리 지나가자' 빵코는 그에게 폭력을 가한적이 없었다. 병태가 하는 폭력을 지켜보기만 했었을 뿐.
 
그래도 마주치는 건 피하고 싶었다.
 
그 때, 해우는 고개를 돌리는 빵코와 눈이 마주쳤다. 빵코는 처음에는 놀란듯했지만, 이내 눈이 다시 작아졌다.
 
그러다가 해우의 옆에 서있는 아름이를 보면서 눈이 다시 커졌다. 해우는 자신도 모르게 아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천역덕스럽게 늘어놓았다.
 
"누나, 빨리가자. 아버지 걱정하시겠다.
 
그러게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고 그러냐? 그냥 내가 사자는 거 사지.
 
몇 푼 깎는게 얼마나 절약된다고 참...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자?
 
빨리가서 요리해 먹자"
 
그녀는 손을 잡아끄는 해우의 태도와 엉뚱한 말에서 혼란을 느끼며 말없이 해우와 함께 빨리 걸었다.
 
그 순간, 옆 잔디구장에서 누군가 날린 슈팅이 빗나갔다. 축구공이 엄청난 속도로 해우에게 날아왔다.
 
해우가 눈을 질끈 감고 손을 들어올리는 찰나, 아름이 앞으로 뛰어 들며 관수로 축구공을 찔렀다.
 
뻥!!
 
요란한 소리와 함께 축구공 가죽이 산산이 찢어져 공중에 흩날렸다. 하이넴의 본능. 소유주가 위험에 처하면
 
보호한다. 그리고 그 장면을 큰 눈으로, 면밀히 계산하며 바라보는 빵코.
 
해우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빵코는 눈알을 재빨리 굴리더니, 몸을 돌려 강둑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해우는 따라가 그를 잡지 못했다. 털썩 주저앉은 해우 주변으로 떨어지는 가죽공 조각들,
 
그리고 할말을 잊고 아름을 쳐다보는 축구하던 대학교 선수들.
 

 


해우는 각오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죽어도 병태가 하는 더러운 놀음에 그의 가족을 팔아넘길 순 없었다.
 
놈이 칼을 들이밀어도 입을 열지 않겠다는 각오로 버스에 오른 그였지만, 상황은 예상밖이었다.
 
아무도 그에게 무어라고 하지 않았다. 어떤 빈정거림과 폭력도 그에게 날아들지 않았다.
 
해우는 어리중절한 채로 좌석에 앉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뒤돌아보았다가 순식간에 다시 앞을 보았다.
 
병태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옆에는 한시름 놓았다는 듯이 멍든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빵코가 있었다.
 


학교가 파하고, 해우는 평소처럼 집으로 곧장 갔다. 무언가 불안했다. 심장의 혈관이 수축하는 느낌. 빨리가서,
 
그의 집에가서 아름을 보고, 식사를 하고, 평소처럼 책을 읽고 싶었다. 그의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그가 사는 빌라에 이르러 전자인식센서에 카드를 넣으려는 찰나,
 
누군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 병태였다.
 
"야, 너 부자냐?"
 
해우는 얼어붙은 채 말을 하지 못했다. 병태의 뒤로 네명이 더 서있었다. 빵코가 바닥을 쳐다보며 해우와 눈을 마주치자 화들짝 놀랐다.
 
"부자는.. 좃도. 이런 집에 살면서 부자? 야 빵코 이 개.새끼. 확실한거야? 둘러댄거면 넌 평생 까인다 새끼야"
 
"지..진짜야. 접때 봐, 봤어. 하이넴이 확실해"
 
"닥치고, 어떻게 생겼는데? 우리집 할머니 하이넴같으면 넌 두배로 죽어 이 씹새야"
 
"예뻤어! 진짜루! 우리 집에 있는 A 클래스랑 비교도 안,안되던데... 진짜 모델 같았어"
 
"뭐, 거야 좀 있으면 알게 되겠지."
 
병태는 고개를 돌려 다시 험악한 눈을 해우에게 부라렸다. 눈썹에 박힌 피어싱이 위협적으로 꿈틀거렸다.
 
"야, 이 형아가 니네 집 하이넴좀 데리고 놀라 그러는데... 안되냐?"
 
해우는 이를 악 물었다. 그리고 평소였으면 결코 하지못했을 행동을 했다.
 
눈 앞에 병태를 있는대로 노려보기 시작한 것이다.
 
병태는 어이없다는 제스처를 뒤에 있는 똘마니들에게 취해보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몸을 돌려 해우의 배에
 
주먹을 박아 넣었다. 해우는 욱하며 쓰러졌다.
 
병태는 쓰러진 해우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 올렸다. 그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힘없으면 안 가지면 돼. 대체 힘 없이 뭘 가지려고 하냐? 응?"
 
그리고 가방에 손을 넣어 전자카드를 꺼냈다. 그리고 주저없이 센서에 가져다대었다. 삐익- 소리와 함께 정문이 열렸다.
 
곧 병태 패거리가 정문으로 우루루 들어섰다. 12층에 위치한 그의 집 앞까지 끌려온 해우는 통증에도 이를 악 물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아름이에게 도망치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물론 하이넴이 가지는 근력이라면 우습게 아이들을 제압하고,
 
심지어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안된다. 인간에게 상해를 입힌 하이넴은 폐기되는 것이 원칙이니까.
 
하지만 절대로 자신의 가족이 이런 쓰레기들에게 더렵혀져서도 안된다. 결론은 하나다. 그녀가 도망치는 것.
 
병태가 현관문을 열자마자 해우는 방이 떠나가라 고함을 질렀다.
 
"아름아! 도망가! 빨리 도망가!"
 
그 말에 그녀가 우스울정도로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부엌에서 나왔다.
 
패거리 모두가 기묘한 함성을 토했다.
 
"이야! 죽이는데!"
 
"우와 장난아냐! 진짜 이쁜데?"
 
"야, 병태야. 너하고 우리들도 한번씩만 하자. 응?"
 
"기다려 이 새끼들아. 뭘 해도 이 형님이 먼저야. 알았냐?"
 
해우는 호흡을 꿀꺽 삼켰다가 다시 한번 목이 찢어져라 고함을 질렀다.
 
"빨리 도망가! 난 괜찮으니까! 빨리!"
 
그녀는 해우가 더없이 사랑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턱을 왼쪽으로 가볍게 올려보이는 의아스러운 표정.
 
지금 이 극한의 상황조차도 이해하는데 너무도 오랜시간이 걸리는 꼬마아이같은.
 
병태가 거들먹거들먹 다가가 척 하고 아름이의 뺨에 손을 얹었다.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손을 그녀는 미동없이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이윽고 그녀가 말했다.
 
"주인이... 위험합니다"
 
"주,주인이 위험하면 최대한 안전한 상황으로 만들어야 해, 그렇지?" 옆에서 빵코가 운을 더 띄었다.
 
해우가 엎어진 채 고개를 올려 보았다. 자신의 목에 서늘한 칼이 닿아 있었다. 빵코가 쥐고 있는 과도였다.
 
해우는 미.친듯이 몸부림쳤다. 소용없었다. 빈약한 몸으로 남자 셋이 억누르는 힘을 당해낼리 만무했다.
 
"난 상관말고 빨리 어디든 가란 말이야! 가! 빨리!"
 
패거리가 옆에서 턱을 후려 갈겼다. "아오, 학교에선 말 한마디없던 새끼가 존나 시끄럽네"
 
병태가 능글 능글 웃으며 아름이의 하얀 원피스위로 손을 집어 넣었다.
 
여전히 살짝 기울어진, 의아스럽다는 그녀의 표정. 아무런 미동없이, 어떠한 자각도 없이.
 
병태가 한바탕의 추잡한 주물럭거림을 끝내고 몸이 달은 표정이 되었다. 아름이의 손을 잡고
 
침실로 들어가려했다. 다른 패거리들이 휘유 휘파함을 불었다. 빨리 끝내고 나와! 낄낄, 다음은 내 차례다.
 
조까, 나야 새.끼야.
 
해우는 순간 결심했다.
 
앞으로 혓바닥을 입술 밖까지 길쭉이 내민 그는 앞니를 닫으면서 턱을 바닥에 힘껏 부딪혔다.
 
아릿한 느낌과 함께 곧이어 혓바닥에 불이 옮겨 붙은 느낌이 났다.
 
"씨.발, 이새끼 이거 뭐야! 이거뭐야!" 피가 아득히 번지기 시작했다.
 
빵코가 놀라 과도를 떨어뜨렸다.
 
"나, 난 안찔렀어! 진짜 안찔렀어!"
 
"웃기지마 새.끼야! 칼은 니가 들고 있었어!"
 
"븅.신들아 안보이냐! 이새.끼 혀 물었잖아! 씨.발 미치겠네 진짜!"
 
그 때 해우가 천천히 일어났다. 덜렁거리는 혓바닥사이로 피와 침이 폭포처럼 떨어졌다.
 
어차피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의 유일한 가족이 없었다면 필요 없었을 혓바닥.
 
하얗게 질린 아이들 넷이 뒷걸음 치는 찰나, 갑자기 방에서 폭발음과 요란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아름이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흰 원피스가 온통 시뻘건 피로 물들어 있었다.
 
"주인이... 위험에 처해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잠재적 위험군이 있습니다. 제거합니다. 제거합니다."
 
아름이가 패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왼팔을 잡은 두 손이 몸뚱이에서 어깨를 처참하게 떼어냈다.
 
놈은 빌라가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목이 뽑히고나자 비명은 바람새는 소리로 금새 바뀌었다.
 
순식간에 옆으로 어깨를 돌린 그녀가 다른 놈의 면상을 잡고 그대로 힘을주어 으스러뜨렸다. 해우가 매주었던
 
뭉대가 이제 온통 붉은 피로 물들어버렸다. 그때, 갑자기 그녀의 머리가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털썩 앞으로 엎어졌다.
 
빵코가 쇠파이프를 들고 부들부들 떨고있었다. 그리고 우아아 비명을 지르면서 빌라 밖으로 튀어나갔다.
 


해우는 덜렁거리는 혓바닥을 손으로 잡아 떼어냈다. 빛이 번쩍 할만큼 고통스러웠다. 잘려진 혓반토막사이로 계속 철맛이 느껴졌다.
 
다물어진 입안속으로 온갖 고통이 느껴져 몸을 잠시 뒹굴었다. 하지만 해우는 곧 그녀에게 기어가기 시작했다.
 
빌라 바닥이 온통 피바다로 질척거렸다. 잘려진 팔과 다리, 머리가 으깨진 시체를 타고 넘어 해우는 아름이에게 다다랐다.
 
그녀의 흰 피부가 붉은 핏바다에 잠겨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해우는 그녀를 흔들기 시작했다.
 
가볍게 흔들렸다가 다시 움직이지 않은 그녀.
 

"우... 우으... 으으으..."
 
해우는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조각난 혓토막 사이로 먹먹히 부르짖었다. 마지막남은 가족과 행복을 앗아가버린
 
것들에 대해. 그것도 잠시, 해우는 미.친듯이 아름이의 몸을 끌어당겼다.
 
부서진 뒤통수를 보고 거기서 무엇인가를 끄집어내려다 손가락이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개의치 않고 계속 손으로 후벼파냈다.
 
이윽고 그의 손가락에 무엇인가가 걸리었다. 꺼냈다.
 
그것은 부서진 메모리카드였다.
 
푸른 레이저 플라스틱과 쇳조각으로 이루어진 조각.
 
엄지손톱만한 그 부품.
 
쇠파이프에 타격에 맞아서인지 전체에 실금이 가 있었다.
 
"우으으! 우우!" 해우는 미.친듯이 몸을 일으켜 자신의 티셔츠로 그 부품을 감쌌다.
 
그리고 힘겹게 걸음을 옮기고, 이내 뛰기 시작했다.
 

 

"인조심장이나 갈비뼈 내부의 에너지 동력원만 고장나지 않으면 거의 멀쩡합니다. 머리만 각별히 조심하세요.
 
머리엔 메인 메모리가 있으니까요."
 
"휴..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메인 메모리라구요?"
 
"아 예. 9년되셨다고 하셨지요? 그럼 그 메인메모리에 9년간의 기억이 고스란히 축적되어 있는 것이지요.
 
많은 분들이 하이넴을 교체할 때 그 메인메모리를 그대로 사용하시죠.
 
아무래도 정을 느끼는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요."
 
"그렇군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둘둘 말린 티셔츠를 들도 도심을 미.친듯 질주하는 소년을 모두 흥미있게 바라보았다.
 
따듯하게 지는 석양의 붉은 빛이 수놓은 길을 따라 소년은 폐를 터뜨리고 싶은 것처럼 뛰었다.
 

 

해우가 달린다.

가족을 위해서,
 
그의 어머니, 그의 누나.
 
그리고 그의 연인을 위해서.

금산스님의 최근 게시물

무서운글터 인기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