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전혀 애틋하지 않은 이름 아버지 - 2 -

촉한 작성일 14.12.06 17:5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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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는 2002년도 한일월드컵을 한참 부산하게 준비하던 시절이였다.

 

당시 히딩크 감독의 별명이 오대영 감독으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첫 개최국 16강 탈락의 망신을 당하고 싶지 않거든 당장 자르고 지금이라도 다른 감독으로 교체를 해야 한다는 국내 축구계 인사들의 한결같은 말이 스포츠 뉴스의 메인으로 항상 자리잡던 시절

 

그리고 내 개인적으로는 아버지에 과연 나와 전생에 무슨 악연이 있었는지 하늘아래에서 절대 같이 숨을 쉬고 살 수 없었던 사이가 현생에서 부자사이로 태어난 걸까?? 라는 의문을 품어도 이상하지 않은 정신적인 학대가 최전ㅅ기를 향해 달려가던 무렵이였다.


(전ㅅ기도 금칙어에 걸리는 건 좀 너무한 것 같아요 ^^)

 

신문을 보실 때 글씨가 너무 작아 그야말로 온 인상을 찌푸리며 신문을 보는 아버지를 보고

안경이나 돋보기 하나 맞추세요 아버지라고 말씀을 드려도 내가 되돌려받는 대가는 욕설이였다.

 

대체 세상에 어느 아버지가 안경을 맞추실 것을 말하는 아들 앞에서 안 그래도 좋다고 할 수 없는 인상을 찌푸리며 또라이같은 새끼라고 말할 것인가??

 

위와 같이 무슨 일을 벌이건 간에 옆에서 보기에 아무리 답답해보이고 멍청한 짓을 벌여도 조언하는 건 포기하는 것이 좋았다.

 

그건 아닌 것 같아 말씀드려도 좋은 소리 들을 가능성은 동전으로 긁는 즉석복권을 긁어 1등 당첨이 될 확률이 차라리 높았을 것

 

이전의 글에서 마지막에서 쓴 대로 나의 주제넘은 실수는 그 때로부터 10년을 훌쩍 넘는 세월 12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가슴속의 흉측한 흉터라는 대가를 받게 되었다.

 

아마 내가 죽어서 세상에 존재가 사라지기 전까지 잊혀지지 않을 듯한 흉터를...

기억을 지우는 지우개가 있다면 제일 먼저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

 

현재 살고 있는 이 집으로 이사오기 전이였다.

 

막 완공한 아파트였고 전 집주인 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 들어오려고 입주공사까지 싹 다 해놓았는데 급전이 필요해서 내놓게 되었고 그 정보를 입수한 어머니께서 여기저기 꼼꼼히 알아보고 계셨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집에서 갖고 있는 자금으론 그 집을 사기가 무리였다.

 

대출을 좀 더 받아야 하는데 당시는 아버지의 일 전체적으로 따지자면 그 업계가 그야말로 중국발 직격탄을 맞은 상황이였다.

 

무슨 일을 하셨는지 자세히 밝히질 못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읽으시는 분들에게 양해를 먼저 구하고자 한다.

 

대충 말하자면 건설 쪽이랑 더 정확히 말하자면 건축자재랑 관련이 되어있다.

 

당시 아버지의 업계상황은 하다못해 IMF때도 이 정도 수준은 아니였다. 라는 말이 나올 수준의 불황이였다.

 

간단하게 건물하나 짓는데 필요한 건축자재 비용이 국내업체에선 아무리 못해도 100이 든다 친다면 중국 업체에선 한국으로의 배송료까지 합쳐 40~50 수준이라면??

 

내가 건설사 사장이라도 어느 쪽을 택했을까?

 

아버지 직종의 관련업계는 그 쪽 방면에는 큰 기업이라도 크게 휘청거릴 정도였다고 한다. 중소규모 업체들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설명이 따로 필요하지 않을 것...

 

당연히 어느 중견업체에서 도급계약으로 아버지 기계를 들여서 일을 맡아하는 아버지 일의 타격도 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기계를 들이느라 대출받은 금액도 아직 한참 남아있었다. 거기에서 더 대출을 받으면 아버지의 업계가 당장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인데 과도한 빚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집은 계약을 하기 일보 직전이 상황.

 

당시 그래서 어머니와 상담을 했다.

 

더 좋은 집에 이사가는 거 자체는 좋은데 지금 안 그래도 대출금이 남아있는 상황이고 아버지 업계가 좀 많이 좋지 않은 상황이잖아? 거기서 더 대출받는 건 위험부담이 너무 큰 거 같은데 조금 신중하게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라는 식으로 어머니와 상담을 좀 했던 것 같다. 일리는 있다 생각하셨는지 어머니도 어느 정도 공감을 해 주신 것 같았다.

 

당시 요일은 토요일이였다. 아침식사가 끝날 때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촉한이가 이런이런 의견을 내놨는데 좀 신중하게 생각할까? 라고......

 

그리고 바로 그 날 점심 이후 정확히는 저녁식사가 가까워졌을 시각 그 집을 계약하기로 결정하고 어머니는 즐거우신 표정으로 가족들 저녁 식사준비를 마쳐 주시고 아파트 가계약건 때문에 밖으로 외출했다.

 

어머니가 나가신지 5분이나 지났을까 밥을 먹고 있던 상황

 

엄마가 나간 대문을 잠깐 확인한 아버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분명 막말이고 속 된 표현인 걸 잘 알고 있지만......

 

당시 나를 보는 눈빛은 눈깔이 돌아갔다.라는 표현이 아주 적합해보였다.

 

오른쪽 뺨이 화끈해지는 통증과 함께 짜악----!!!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안경이 주방 어딘가로 날아갔다.

 

뿔테는 아니였다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했을까? 뿔테안경이였으면 100% 부러졌을테니...그 다음에 날라온 것은 머리와 얼굴을 향한 주먹질과 따귀의 대군이였다.

 

평소에 어머니만 안 보인다 싶으면 나에게 날리는 폭언과 욕설 역시 더욱 강도를 보태어서 날아왔다.

 

X같은 새끼 어디서 공부도 못하는 새끼가 감히 집안일에 나서서 참견해? X새끼 또X이 새끼 콱 뒤져버리지 왜 살아? 뒤져버려!! 어디서 공부도 못하는 게 감히...!!”

 

간략하게 줄여서 순화(?)해서 이 정도였다. 평소의 욕설보다 업그레이드 된 욕설도 포함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공부도 못하는 건 사실이였지만...

 

동생은 조용히 밥을 먹다가 벌어진 눈앞의 사태에 놀랐는지 숟가락을 든 채로 그대로 굳어져버렸다.

 

왜 병x같이 맞고만 있었던 걸까?

 

꼴에 아버지라고 대들면 안된다는 감정이 앞섰었던 걸까? 하기사 모르는 사람이 다짜고짜로 내 따귀를 날린 경우였으면 설사 개값을 물어주는 한이 있어도 가만 있진 않았으리라

 

밥이고 뭐고 뒷정리를 하고 휘어진 안경을 찾아들고 내 방으로 들어가는 내 등뒤로 익숙해질래야 익숙해지지 않는 아버지의 욕설이 들렸다.

 

나가서 뒤져버려!!

 

왜 밥이고 뭐고 들어가버린 내 방에서 어떻게든 멈추려고 하는 눈물이 그렇게 멈추질 않았을까? 이성은 계속 눈물을 멈추라고 지시하는데도 눈에서 한스러운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왜일까? 왜였을까? 아프지 않았는데 마음만 먹으면 덩치로 오히려 아버지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줄 수도 있었을텐데

 

최소한 하나는 확실한 것이 아무리 어머니만 눈에 안 보이시면 마당쇠처럼 부려먹고 욕설을 날리시고 어떻게든 구박을 줄 구실을 찾는 듯한 이미지의 아버지였다.

 

그래도 설마 여기까지 이 정도까지 가슴을 찢는 상처를 선사하셨을지 어리석었던 나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였다.

 

30대를 넘긴 지금의 시점에서도 아직도 생생한 10대 청소년기 시절의 기억

한동안 새벽에도 자다가 깨서 이를 바드득 갈던 부들부들 몸을 떨던 그 시절의 기억

 

세간에서는 트라우마 라고 부를 것이다.

 

분명 피곤한데 잠이 오지 않아 뜬눈으로 새벽을 보내면서 나는 마음속 끝에서 끝까지 박박 긁어봐야 얼마 나오지도 않는 아버지에 대한 최소한의 좋은 감정마저 내 마음속에서 떠나보내고 있었다.

 

다음날 일요일 무슨 사유였었는지 나는 집에 혼자 남아있었다.

 

식욕이라곤 없었고 새벽 내내 뜬눈으로 보내다시피 했는데도 피곤해도 잠이 오지 않는 정말 문자 그대로 누가 나를 봤으면 혼이 나간 듯한 사람으로 보았을지도 모른다.

 

친구에게 전화로 하소연이라도 할까 밖으로 나가서 산책이나 할까 했었지만 곧 그 마음을 접어야 했다. 지금 당장 뭘 하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였다.

 

당시 짱공유가 메인화면에서 마징가Z가 춤을 추고 웹하드로 팝폴더를 쓰던 시절이였을까

 

아닌가...? 리뉴얼한 다음이였나? 그것까진 확실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에 양해를 잠시 구한다.

 

아무 생각없는 좀비처럼 PC를 켜고 생각 없이 마우스 클릭질을 하고 간단하게 게임으로 정신집중이라도 해보려고 했지만 뭘 해도 도저히 집중이 되지는 않았다.

 

뭐라도 다운받아서 좀 볼까하던 참에 어떤 영상물 제목이 눈에 띄었다.

 

짱구는 못말려 어른제국의 역습

 

일본명 크레용 신짱 : 태풍을 부르는 불타라! 어른 제국의 역습

クレヨンしんちゃん: ぶ モ?レツ!オトナ帝?逆襲

 

분명 제목 참 웃기다라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었다.

 

짱구는 못말려 역대 극장판 중 최고로 사람들이 평가하는 작품이였다는 건 나중에 안 이야기였지만 평소 어쩌다가 TV에서 볼 게 없을 때나 가끔보던 내 동생이나 꼭 챙겨보던 시리즈

 

정신차려보니 어느새 컴퓨터로 다운로드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영상을 다운로드 하고 감상하기 시작한 이후로 난 근래 영상물을 이리도 집중해서 본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몰입되기 시작했다.

 

당연한 말부터 한 마디 한다면 짱구는 물론 짱구엄마 짱구아빠 짱아는 물론 작중에서 등장하는 메인급 캐릭터는 원작가 우스이 요시토(臼井義人)가 창작한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들

 

적어도 그 때 내가 느낀 것은 최소한 짱구 아빠(한국이름 신형만...맞나? 갑자기 헷갈리네요)는 그 애니메이션의 숨겨진 주인공이 아니였을까?

 

그 어른제국의 역습에서 명장면이라고 일컬어지는 어렸을 때 자기 아버지의 자전거 뒤에 타면서 낚시를 떠나던 장면부터 시작해서 짱구엄마랑 만나고 짱구가 태어나고 짱아가 태어나고 고단하고 힘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가정에선 좋은 남편과 짱구와 짱아의 좋은 아버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정신차려보니 울고 있었다.

 

어떤 감동물을 봐도 코끝이 찡한 때야 있었어도 운 적은 없었는데

 

내가 보는 그는 좋은 아버지라고 할 수 있을 사람이였기 때문이다.

 

꽤 헤비스모커에 술을 좋아하고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 짱구처럼 미인에 약한 모습을 보여주지만...최소한 자기 아들 짱구가 아무리 말썽을 부려도 욕설이나 폭언을 날리고 함부로 행동하는 인품을 가진 사람은 아니였기에

 

내가 만약 나중에 결혼해서 저러한 가정을 꾸민다고 하더라도 나는 짱구아빠만한 사람이라도 될 수 있을까...?

 

결국 애니가 끝나고 엔딩곡까지 끝 영상이 종료되어 영상 플레이어의 검은 화면만 남고 난 후에도 난 한참동안 여운에 잠겨 있었다.

 

엄마가 없으면 욕설 + 폭언에 이번의 새집 계약 사건만 해도 아버지가 얼마나 이중적인 인간임은 아버지라는 호칭의 그에게 지워지지 않는 낙인효과를 낳았다.

 

앞으로 그가 벌일 일을 생각하면 이건 삼류막장 드라마극의 서막에 불과했다.

 

대한민국 5천만 전국민을 붉은 물결에 뒤덮이게 한 2002년도의 월드컵이 끝나고 그 다음해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현재의 집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지금 과거를 돌이켜보면 나의 인생의 1차 방황기가 시작됐다.

 

물론 위에 언급한대로 공부와 담을 쌓긴 했지만(...)

 

현재 살고 있는 이 집을 사느라 약간 무리를 한 탓에 대학 학자금 역시 빠듯한 상황이였고 내가 이 상황에서 대학을 가야 하나?? 학자금대출 받아서 대학을 갈까? 차라리 군대를 일찍 갔다올까? 하는 고민을 심각하게 하던 시절이였다.

 

그렇게 갈팡질팡하다가 내가 드디어 실성한 건지 정말 미친 결정을 해버리고 말았다.

 

당시 집에 있었던 아버지와 상담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촉한 : 저 아버지 저 상담 좀 하고 싶은 게 있는데

 

아버지 : 아 뭐어어~~~!?

 

촉한 : (이러저러 고민말함)

 

아버지 : 난 너한테 투자하기 싫어 대학을 입학하던지 말던지 니 알아서 하고 대학교 가서 학사경고장이나 그런거 집에 날아오는 날에는 난 니 꼴 안 봐 나가서 뒤지던지 말던지 니가 알아서 해

 

(......)

 

타인이 보면 이 대화에서 뭘 느낄지 모르겠다.

 

내 마음이 나 자신을 비웃는 듯했다.

 

야 이 미x놈아 저 인간이 어떤 인간인데 너한테 힘내라는 말 한마디라도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냐? ㅋㅋㅋ』

 

라고 날 비웃는 듯했다.

 

사실 내게 있어 진정으로 필요한 건 학자금이나 그런 것보다는 따뜻한 한 마디의 격려 하다못해 그래 열심히라도 해라라는 말 한마디가 목이 말랐을 뿐이였는데......

 

절대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할 대상


힘겨울 때 등을 잠시 기대 쉴 수 있는소나무는 부러진 작은 나뭇가지 조각같았던 사람에 난 너무 큰 기대를 해버렸던 것이다.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는 나의 한심한 기대심리였던 셈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학은 가지 않았다.

 

정신차려보니 직업학교에 입학해 다니고 있었다 매달 국가보조금이 지급됐고 국비로 시켜주는 교육이였고 한 달에 20여만원씩의 국비지원금도 들어왔다.

 

내가 선택한 학과는 컴퓨터관련 학과였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였던 것일까? 컴퓨터 관련학과를 들어갔지만 어딜 봐서 이게 컴퓨터전공 학과인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납땜질 학습의 연속이였기 때문이였다.

 

물론 이건 나를 위한 변명일 뿐이다.

 

납땜 연기로 머리가 까마득해졌을 때 쯤 난 결국 직업학교도 그만두고 말았다.

 

그 이후 PC방 알바등을 하면서 아무 의미없는 천금만금을 줘도 살 수 없는 시간을 무의미하게 낭비하던 세월도좀 더 흘러 내가 신검을 받고 군입대를 하던 날

 

306보충대로 입대해야 하는 날의 아침이였다.

 

어머니가 쓰러지셨다.

 

숨을 제대로 못 쉬시고 답답한 듯 가슴을 부여잡으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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