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아들 이강석 생존설

개후루루룹 작성일 16.12.18 17: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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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자살로 비극의 생을 끝내기 전의 이기붕 일가. 왼쪽부터 장남 강석, 이기붕, 박마리아, 차남 강욱.
대한민국 건국 이래 역대 정권마다 이른바 ‘권력의 2인자’가 있었다. 그들 중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두른 인물은 누구일까. 단연 이기붕을 꼽아야 할 것이다. 혹자는 1961년 박정희를 도와 5·16군사정변을 일으킨 후 중앙정보부장과 공화당 의장 등으로 오랫동안 권력을 누린 김종필을 들겠지만, 행사한 권력의 질과 내용, 무게와 영향력을 감안할 때 이기붕에겐 미칠 수 없다.

이기붕이 누구인가. 1950년대 집권 자유당의 실력자(중앙위 의장), 이승만 대통령의 후계자, 민의원(국회) 의장, 이른바 ‘서대문 경무대’의 주인으로 이 나라 최고 권부의 정상 바로 밑까지 올라간 실권자였다.

그는 1960년 봄 이승만 대통령후보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선거에 출마, 사상 최악의 부정선거로 당선됐다가 4·19혁명으로 몰락했다. 더욱이 그는 혁명 8일 후 일가족이 집단자살함으로써 과도한 권력욕으로 파멸한 비극의 주인공이 됐다. 이기붕의 장남이자 이승만의 양자인 이강석(당시 23세)은 부모와 남동생 강욱을 권총으로 사살하고 본인도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집단자살 사건을 주도한 이강석이 실제로는 자살하지 않고 비밀리에 목숨을 보전했을 가능성은 없는 걸까. 그가 극적으로 구명돼 극비리에 외국으로 보내져 세계 어디에선가 자신의 모든 것을 철저히 숨기고 살아왔을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일까.

정광모 선생의 제보

독자는 이기붕 가족이 목숨을 끊은 지 53년이나 지난 지금 왜 새삼 이 문제를, 그것도 이강석의 구명 가능성과 생존설을 제기하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것이다. 필자는 지금부터 20년 전 이강석 구명·생존설을 전해 듣고 놀라움과 호기심에 근 1년 이상 사실 여부를 확인하느라 고심하고 나름대로 전력투구한 적이 있다. 어찌 보면 한낱 ‘기이(奇異)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뒤늦게나마 이 이야기의 입수 경위와 내용을 알리고 싶어 글을 쓴다.

거기엔 두 가지 계기가 있다. 하나는 올해 2월 작고한 저명한 여성 언론인이자 한국 소비자보호운동의 창시자였던 정광모(1929~2013) 선생과의 약속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당시 정 선생으로부터 들은 이강석 생존설 관련 취재 메모를 최근 우연히 발견해서다.

6·25전쟁이 끝난 직후 언론계에 입문한 정 선생은 ‘평화신문’ ‘서울신문’ ‘한국일보’ 기자로 맹활약했던, 당시로선 매우 드문 여성 언론인으로 청와대 출입 여기자 1호였고 한국여기자클럽 초대 회장을 지냈다. 필자는 1960년대 중반 정 선생이 한국일보 정치부 차장이던 시절부터 모시고 함께 일한 적이 있다. 그 후 정 선생이 언론계를 떠나 소비자 보호와 에이즈 예방 및 퇴치 등 사회운동에 전념하는 동안에도 서로 자주 만나 시국 얘기를 나누곤 했다.

필자가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재직하던 1993년 가을 어느 날, 정 선생에게서 급히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단골 식당으로 가니 언제나 쾌활하고 명랑한 그답지 않게 굳은 표정이었다. 정 선생은 “이 위원! 이거 사실로 확인되면 당신은 세기적 특종을 하는 거야”라고 운을 뗐다.

그는 본론을 얘기하기 전에 먼저 세 가지를 반드시 지키겠다는 약속부터 하라고 요구했다. △이 이야기를 취재하는 동안 비밀로 할 것 △이야기를 전한 사람 본인과 그의 형제, 부모에 대해 일절 묻지 말 것 △취재해서 사실로 확인되면 보도하되, 확인이 안 될 경우에도 이야기의 입수 경위 등에 관해선 훗날 자기가 눈을 감은 뒤에야 밝히라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내용이 심상치 않게 느껴지는 데다 기자적 호기심이 발동해 ‘약속 준수’를 다짐한 뒤 귀를 기울였다.

정 선생 얘기의 요지는 ‘이기붕 아들 이강석이 살아 있다’ ‘믿을 만한 사람에게서 이강석을 직접 만났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정신이 번쩍 들 만큼 놀랐다. 그러면서도 뭔가 허황한 꿈같은 얘기 아닌가 싶었다.

“이강석이 살아 있다”

정 선생이 전해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으로 이민 간 신경숙(가명)이 오랜만에 서울에 들러 며칠 전 나를 찾아왔다. 50대 초반인 그녀는 고교 및 대학교 후배인 데다 예전부터 부모님, 형제들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그런데 그녀가 유럽 여행에서 이미 죽은 것으로 알려진 이강석을 만났다는 게 아닌가. 3년 전(1990년) 여름 남편과 함께 결혼 후 처음으로 유럽 여행을 하던 중 묵고 있던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한 호텔 식당에서 만나 잠시 대화를 나눴는데, 이강석이 분명했다는 것이다.’

다음은 신 여인이 전한 당시 상황이다.

호텔 식당에서 식사한 후 남편은 여행 스케줄을 문의하러 프런트로 가고 자신은 계산을 하고 나오는데 6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머리가 하얗게 센 백발의 동양인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백발 : 실례지만 한국 분 아니신지요.

신 여인 : 맞는데요.

백발 : 저 모르시겠습니까.

신 여인 : 잘 모르겠는데요, 누구신지요.

백발 : 저는 대한민국의 역적(逆賊) 아들입니다.

신 여인 : 역적의 아들이라니요. 무슨 말씀이신가요.

백발 : 저는 과거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 내외분을 모시고 살았었습니다.

(신 여인은 이상하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백발 남성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럴 수가…. 너무나도 낯익은 얼굴, 귀에 익은 목소리 아닌가!)

신 여인 : 저, 혹시 이강석 씨…이강석 오빠 아니신가요.

(순간 백발 남성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잠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신 여인 : 아니, 부모님을 권총으로 쏘고 자살한 것으로 모두들 아는데 어떻게 되신 겁니까.

백발 : 누군가의 도움으로 동생(강욱)과 대만으로 나와 잠시 머물다 미국으로 가서 숨어 지내며 공부했습니다. LA, 뉴욕, 샌프란시스코 등 교포들이 많이 사는 데는 가지 않았지요.

신 여인 : 오래전의 지난 일들인데 이젠 모든 것을 떳떳이 밝히고 살아도 괜찮은 것 아닌지요.

백발 : 아닙니다. 우리 집안은 나라와 국민에게 너무도 큰 죄를 지은 만고의 역적이기 때문에 영원히 눈에 띄지 않게 숨어서 살아야지요.

신 여인 : 지금 오빠는 어디서 살고 무슨 일을 하세요? 강욱이도 잘 있는지요.

백발 : 미국에서 삽니다. 동생도 잘 있지요. 현재 ABC방송에서 일합니다.

신 여인 : 저의 형제들은 모두 미국으로 이민 가서 살아요. 지금 남편과 휴가여행 중인데…이게 제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힌 명함이에요. 저에게도 명함 한 장 주세요. 미국에서 자주 연락하고 만났으면 해요.

백발 : 지금 명함이 없는데요.

(이때 남편이 가까이 다가오자 백발 남성은 갑자기 당황한 표정으로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말한 후 서둘러 호텔 밖으로 사라졌다.)

이것이 신 여인이 전한 ‘이강석과의 만남과 대화’의 전부다.

3년간 묻어둔 얘기

정 선생은 신 여인에게 ‘이기붕 일가 집단자살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정말 이강석이 분명한가’ ‘혹시 과거 경무대에서 근무했던 청년들 중 이강석과 닮은 사람을 잘못 보고 착각한 게 아닌가’ ‘네가 이강석이냐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분명한 대답이 없지 않았는가’라며 따졌다고 했다. 특히 정 선생은 그가 신 여인에게 ‘역적’ 운운했지만 진짜 이강석이라면 그토록 오랜만에 만난 한국인인데 자살 당시 상황, 양부(養父) 이승만에 관한 얘기 등을 몇 마디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상하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신 여인은 “선생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줄 알았어요. 사람을 잘못 보고 오인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강석 씨와는 양가 아버님이 일제강점기에 미국 유학을 같이 했고, 광복 후엔 두 집안이 자주 교류했으며, 자녀들끼리는 초·중·고교와 대학 때까지 형제처럼 어울려 자랐기 때문에 착각이나 오인을 할 수는 없어요”라고 강변했다고 한다.

아울러 신 여인은 이강석이 머리가 백발이고 얼굴이 늙어 보이는 것 말고는 남자치곤 약간 작은 키와 말씨, 태도 등이 변하지 않았더라고 전했다.

정 선생은 신 여인의 부친과 이기붕이 1920~30년대 초 미국 유학을 했고 광복 후 각기 작고할 때까지 형제처럼 지냈으며, 식구끼리도 각별한 관계였음을 알고 있었기에 이강석과 만났다는 그의 얘기를 한낱 뜬소리로 여길 수 없었다고 했다. 신 여인도 어릴 때부터 너무나 모범적이고 착실한 사람이라며 거짓말은 아닌 듯하다고 했다.

신 여인의 뒷얘기는 계속된다. 남편에게는 물론 미국으로 돌아간 뒤 친형제들에게 이강석과 만난 얘기를 전하자 모두 놀라면서 절대로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라고 재삼재사 당부하더라는 것이다. 기자들이 집요한 취재에 들어가면 오래 교류했던 집안 사정까지 이것저것 보도돼 돌아가신 부모님에게 누를 끼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 여인은 3년 동안 가슴속에 넣어둔 채 끙끙 앓다 당시 고국 방문길에 정 선생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되, 집안 얘기는 모두 가려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정 선생은 필자에게 “그녀는 내가 아직도 언론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줄 아는 모양”이라면서 “그 집안과 식구들에 관한 것은 약속한 대로 절대 취재도 보도도 하지 말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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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83회 생일 축하 케이크를 자르는 이 대통령 부부. 맨 왼쪽이 양자였던 이강석이다.
이기붕과 박마리아

이기붕(1896~1960)은 10세 때 부친이 작고해 홀어머니 밑에서 끼니를 거르며 가난하게 성장했다. 모친의 교육열로 상경해 보성중학과 연희전문에서 수학했다. 보성중학 시절엔 종로 YMCA(기독청년)회관에 나가 이상재, 이승만 등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에 건너가 농장 일, 호텔 일, 접시 닦기 등으로 고학하며 대학을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워싱턴에서 허정, 장덕수, 윤치영 등과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도와 ‘3·1신문’을 발간했고 1934년 귀국 후에는 잡화상, 광산업 등에 실패한 후 종로의 대형 요릿집 국일관의 지배인을 지냈다.

부인 박마리아와는 미국 유학 중 만나 약혼한 뒤 1935년 서울에서 결혼했다.

이기붕의 출세길은 광복 후인 1945년 10월 이승만의 귀국으로 열렸다. 윤치영 비서실장의 비서를 지내다 비서실장으로 승진했고, 윤보선에 이어 서울시장(1949년 6월~1951년 4월)으로 재임하던 중 6·25전쟁을 맞았다.

이승만은 대통령 연임을 위해 부산 정치파동을 일으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킨 후 유공자인 장택상, 이범석을 밀어내고 1953년 원내외 통합자유당의 2인자(중앙위 의장)로 자신의 충복인 이기붕을 내세웠다. 이기붕은 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민의원 의장에 선출된 뒤 이승만에게 초대 대통령의 영구 출마를 보장한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안을 억지로 통과시켜 보답했다.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 때 부통령선거에 나섰다가 장면에게 패했고, 1960년 3월 15일 사상 최악의 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됐다.

박마리아(1906~1960) 역시 가난 속에 교회 전도사인 홀어머니 밑에서 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후 주위의 도움으로 개성 호수돈여고를 거쳐 이화여전 영문과에 진학했다. 선교사 아펜젤러의 후원으로 미국에 건너가 매사추세츠 주 마운트 홀리요크대와 테네시 주 스칼렛대를 거쳐 피바디대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이화여전에서 교편을 잡다 결혼 후 YWCA 총무로 옮겼고 일제강점기 말 4~5년 동안엔 일제가 내세우는 동조동근(同祖同根) 내선일체(內鮮一體)에 동조해 식민정책을 찬양하고, 학병과 근로보국대 지원을 독려했다.

박마리아는 광복 후 이화여대 교수로 복귀한 뒤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측근이 됐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총애에 힘입어 남편을 권력가도로 이끌었다. 이기붕이 권력의 2인자로 승승장구할 때 자신도 이화여대 부총장, YWCA 회장, 대한부인회 회장을 맡아 여성계를 좌지우지했다.

이강석과의 조우

1937년생인 이강석은 서울중·고교를 거쳐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1957년 서울대 법대에 편입했다가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하며 퇴출운동을 벌이자 다시 육사로 갔다가 1958년 8월 육군보병학교 141기 간부후보생으로 훈련받고 소위로 임관했다.

이기붕 부부는 이승만의 83세 생일인 1957년 3월 26일 당시 20세인 이강석을 그의 양자로 입적시킨다. 이승만은 구한말 박모 여인과 결혼해 봉수라는 아들을 얻었으나 미국에 데리고 갔다 요절했고 프란체스카와의 사이엔 자녀가 없었다. 이강석이 양자로 입적해 이승만 내외와 이기붕 부부 등 5명이 경무대에서 생일 케이크 촛불을 끄는 사진을 본 많은 국민은 ‘이기붕 부부가 권력에 눈이 어두워 이제 아들까지 바친 게 아니냐’고 비아냥댔다.

필자는 딱 한 번 그와 인사를 나눴다. 1959년 여름 대학생들의 농촌계몽운동을 준비하던 무렵 백기완(백범문제연구소)과 함께 계몽대를 이끌던 고인환 선배와 세종로의 반공회관(현 미국대사관 자리, 4·19혁명 때 소실) 전시실에 갔다가 마주쳤다. 고인환이 “야! 강석아”라고 부르자 소위 계급장을 단 군복 차림의 이강석이 달려와 거수경례를 하며 “선배님, 자주 못 찾았습니다”라고 인사했다. 고인환이 필자를 가리키며 “후배인데 인사해라. 네가 조금 위일걸?”이라고 하자 이강석은 손을 내밀며 “반갑습니다. 어느 대학 다니시지요? 자주 만납시다”라고 말했다. 키가 165~168cm쯤 돼 보였는데, 친부모인 이기붕 부부를 반반씩 닮았고 똘똘하다는 인상을 줬다.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제4대 정·부통령선거는 여당(자유당), 정부(내각), 권부(경무대)가 장기집권을 위해 경쟁적으로 또는 혼연일체가 되어 치른 사상 최대, 최악의 불법·부정선거였다. 투표시간 종료 후 자유당의 농간으로 투표조차 못한 수천 명의 마산 시민이 ‘내 표 내놔라’ ‘선거는 무효다’ ‘선거 다시 하라’며 평화적 시위를 했다. 경찰이 이들에게 무차별 발포해 약 80명을 살상하자 전국 각지에서 연일 부정선거 항거시위가 일어났다. 정부·여당은 이를 북한의 오열(五列)이 사주한 선동으로 규정하고 강경 진압에 나섰다.

시국은 날로 급박하게 돌아갔다.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김주열 군의 시신이 발견되자 마산 시민들은 다시 대규모 규탄시위에 나섰다. 이어 18일엔 고려대생 3000여 명이 ‘부정선거 다시 하라’ ‘발포경찰 엄벌하라’ ‘이기붕은 사퇴하라’며 태평로 국회의사당까지 나가 종일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이날 저녁 경찰의 안내를 받아 학교로 돌아가던 도중 정치깡패들에게 습격당해 수십 명이 중상을 입었다. 다음 날 신문에 이 사실이 특보되자 서울의 각 대학 학생들이 분격해 대대적인 시위에 나섰다.

전국 주요 도시에서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학생시위가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수천 명의 대학생 시위대가 경무대로 돌진하다 경찰의 발포로 수십 명이 살상되는 사건도 발생했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학생과 시민의 저항은 계속됐다.

4월 23일 장면 부통령은 사퇴를 선언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다음 날 아침 경무대로 찾아온 이기붕에게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겠다고 통고했다. 이기붕도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이날 오후 민의원 의장, 자유당 중앙위 의장, 국회의원 등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당선된 부통령’에 대한 사퇴는 언급하지 않았다.

다음 날 낮 서울시내 대학교수단이 선거무효와 발포경찰 처벌 등을 요구하는 시위에 나섰고, 드디어 26일 오전 이승만이 하야 선언을 했다. 장기집권을 획책했던 이승만, 이기붕과 자유당 정권은 부정선거 42일 만에 붕괴하고 말았다.

이기붕 일가의 행적

이기붕 일가는 두 차례에 걸쳐 피신했다. 제1차 피신은 19일 오후 2시경. 대학생들이 경무대 진입을 시도하다 경찰의 발포로 밀리자 광화문에 운집한 일부 군중이 ‘서대문 이기붕의 집으로 가자’며 몰려갔다. 이기붕과 박마리아, 차남 강욱, 그리고 비서와 경호원 등은 검은색 지프를 나눠 타고 허둥지둥 집을 나섰다. 먼저 창동의 검찰총장 별장에 갔으나 전화시설이 없음을 알고 다시 의정부 북쪽으로 차를 몰아 육군 제6군단 본부에 도착했다.

당시 군단장은 강영훈 중장(후에 국무총리 역임)으로 1952년 이기붕이 국방장관 때 경리 및 감리국장으로 재직했다. 강영훈 장군은 이들이 온 사실을 당시 김정렬 국방장관, 송요찬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유재흥 1군사령관에게 보고했다. 20일 밤 김 장관이 전화로 “서울 상황이 안정돼가고 있으니 내일은 귀가해도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 장군은 21일 아침 윤태호 군단 참모장을 안내역으로 붙여 일가를 서울로 보냈다. 이들은 서울에 도착하는 대로 경무대로 직행, 이 대통령을 면담하려 했으나 비서들이 주선해주지 않자 불쾌한 표정으로 서대문 집으로 향했다.

제2차 피신은 25일 오후. 이날 교수단 시위로 크게 불어난 군중이 ‘부정의 원흉인 이기붕을 몰아내자’며 서대문으로 몰려가자 일가는 의복과 신발도 제대로 못 갖춘 채 지프를 북쪽으로 몰았고, 밤 9시경 다시 6군단에 도착했다. 이때 군단사령부 일직 사령에게서 전화가 왔다. 방금 들어온 서울 미아리 검문소 보고에 의하면 1대당 대학생 20여 명씩 탄 화물트럭 20여 대가 의정부 쪽으로 북상 중이라고 했다.

강 장군은 이들이 이기붕 일가의 행적을 알고 6군단으로 향하는 게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군단사령부엔 전투병력이 거의 없었다. 그는 북쪽으로 30여 분 거리에 있는, 산하 1개 연대 병력이 주둔한 부군단장 숙소가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기붕은 “자네 판단대로 하게”라고 말했다. 밤 10시경 출발하려는데 경무대의 사실상 비서실장 격이자 이기붕의 직계인 박찬일 비서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승만이 허정, 변영태, 이범석, 윤치영 등 5명을 다음 날 오전 10시에 경무대로 부르라고 지시했다는 보고였다.

이때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수화기를 건네받은 박마리아가 “다섯 분 중에서 허정, 변영태 씨에게만 연락하라”고 지시하는 것 아닌가.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오랜 측근 원로들을 불러 긴박한 시국 수습 문제를 논의하려는 것이었다.

다음 날 연락을 받은 허정과 변영태만 경무대에 들어갔고, 이승만은 수석국무위원을 맡아 국가적 위기를 수습해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는 헌법에 따라 국무총리제가 없고 수석국무위원(외무장관)제여서 이를 맡아달라고 한 것이다. 이에 변영태는 사양했고 수락한 허정은 이승만이 하야한 뒤 수석국무위원으로서 대통령권한대행 겸 과도정부 수반, 외무장관으로서 약 3개월 반 동안 헌법 개정과 총선거를 관리해 새 민주정부 수립에 진력하게 된다.

박마리아의 지시는 경무대 비서실을 휘하에 거느리고 대통령 지시도 마음대로 조정하는 ‘서대문 권력’의 막강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만일 원래 지시대로 5명이 모두 들어갔다면 허정 대신 다른 과도체제가 수립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피신, 칩거, 집단자살

이기붕 일가가 부군단장 숙소로 이동한 뒤 트럭 대열의 북상 보고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강 장군의 걱정은 계속됐다. 당시 일선 부대엔 재학 중 입대한 학보병이 많았는데 혹시나 학생시위에 자극받아 연대 내 학보병들이 이기붕 일가에 위해를 가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강 장군은 부군단장 숙소보다 훨씬 북쪽에 위치한 미군 1군단이 더 안전할 것으로 여겼다. 자정 무렵 유재흥 1군사령관에게 보고하자 유재흥은 이에 동의하면서 다음 날 오전 10시 원주사령부에서 긴급 소집되는 고위급 작전회의에 오라고 지시했다.

다음 날 아침 강 장군은 미군 1군단 본부로 갔다. 스토크 군단장은 일본 출장 중이어서 대신 샌더스 참모장에게 보호를 요청하자 그는 “요인 보호는 계엄사령부가 할 일 아니냐”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 원주로 갔다.

작전회의는 이미 끝났고 군단장급 장성들은 시국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강 장군이 본의 아니게 어려운 일을 맡게 됐다고 위로했다. 이 자리에서 민모 장군은 “지금 팔도강산에 이기붕 의장을 위해 안전한 곳이 어디 있겠나.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모든 책임을 지고 자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해외로 망명하는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 무렵 유재흥이 이기붕 의장 신병 처리 방안을 육군본부에 요청하자 오후 4시까지 기다리라는 연락이 왔다. 하지만 아무런 지시가 없어 강 장군이 군단본부로 돌아가니 부군단장이 전화를 해왔다. 조금 전 경무대 소속 경찰관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와서 이기붕 일가를 서울로 데려갔다는 것이다. 강 장군이 군사령부 회의에 참석하러 간 사이 군단 참모들이 모임을 갖고 이기붕 일가의 군단 체류가 군단장에게 불이익이 될 것이란 의견을 모아 이기붕에게 떠나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기붕 일가는 이날 저녁 7시경 경무대에 도착, 이무기 비서가 묵고 있는 36호 관사로 들어갔다. 밤에는 본관으로 이승만 내외를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별 인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기붕 일가는 이날 밤 거기서 묵은 후 다음 날은 온종일 누구도 외출하지 않고 관사에 칩거했으며, 그다음 날인 28일 새벽 집단자살로 세상을 등졌다.

이에 앞서 이승만은 26일 낮 곽영주 경무관(경무대경찰서장)에게 이기붕 일가를 경무대로 데려오도록 하고, 김정렬 국방장관에겐 이기붕 일가의 미국 망명을 교섭하라고 지시했다. 경무대 경찰관들은 일가를 이날 저녁 데려왔고 김 장관은 27일 밤 주한미국대사관 측과 타결을 지은 후 경무대에 보고했으며, 이 대통령은 다음 날 아침 이 사실을 이기붕에게 알려주려 했으나 자살로 물거품이 된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한미 간의 이기붕 망명 합의 내용은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뒤따른 의문들


이기붕 일가 자살 후 수도육군병원에 옮겨진 이강석.
4월 28일 오전 8시경 이기붕 일가가 집단자살했다는 방송보도가 나왔다. 계엄사는 이들이 새벽 5시40~50분 사이에 서울 종로구 세종로 1번지 경무대 구내 36호 관사에서 리볼버 36구경 권총(6연발)으로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자살 당시 목격자는 없었으나 자살 이전의 동향과 이후의 상태로 보아 계획적인 자살이 분명하다면서 검시를 끝내고 4구의 유해를 수도육군병원(후에 국군보안사령부 자리)으로 이송했다고 밝혔다. 검시는 군과 일반 의사, 서울지검의 김동호·조태형 검사가 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경무대, 군(계엄사), 검찰과 경찰 소식통들이 전한 내용을 종합한 이기붕 일가 집단자살 경위는 다음과 같다.

경무대 정문을 들어서면 우측은 잔디밭을 지나 본관으로 향하는 길이고, 정문에서 직진하면 후문까지 사이에 차고와 비서들의 관사가 있었다. 자살 장소는 관사 36호실. 오전 5시40~45분 사이에 연발하는 총소리를 듣고 별실에 머물던 이무기 비서가 즉시 경비실에 연락했고, 5시 53분경 경비원이 현장에 왔을 땐 모두 사망한 상태였다.

방 안엔 피가 낭자한 가운데 앞에서 볼 때 정면의 긴 소파 좌측에서 우측까지 이기붕-박마리아-강욱이 손을 잡고 앉은 상태로 머리는 모두 뒤로 젖혀져 있었다. 소파 1m 앞엔 이강석이 소파 쪽으로 다리를 뻗고 누워 있었다. 이들은 자살을 결심한 후 이강석이 부친, 모친, 동생을 차례로 쏜 후 자살한 듯하다. 검시 결과 이기붕과 강욱은 왼쪽 가슴에, 박마리아는 머리에 각각 1발씩 총알을 맞았고 이강석은 자신의 복부와 머리에 각 1발씩 쏜 것으로 보였다. 권총엔 탄알 1발이 남아 있었다.

이기붕은 전날 저녁 찾아온 경호원과 운전기사에게 “내 걱정은 말고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짓도록 하라. 내일부터는 여기에 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 이강석은 사건 발생 10여 분 전 본관 숙직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아버님(이승만)께서 정말 오늘 이화장으로 가시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6군단에서 돌아온 27일 종일 방 안에서 집단자살을 협의, 결심한 듯했다. 하야를 선언한 이승만 내외가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가면 한 가닥 권력 유지는커녕 생명의 보호막조차 완전히 걷힌다는 절망감에 목숨을 끊은 것으로 분석됐다. 부모와 강욱이 수면제를 마시고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이강석이 차례로 쏜 후 나란히 소파에 앉힌 것 같다고 했다. 방 안에선 수면제 병과 알약이 발견됐고, 이강석의 손엔 피가 많이 묻어 있었다고 한다.

현장에서 절명한 것으로 발표됐던 이강석은 빈사 상태에서 수도육군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이날 오후 1시경 사망했다고 한국일보(4월 29일자 조간 3면)는 보도했다. 김치열 서울지검장은 “유서나 일기는 없고, 다만 당장 입을 옷 몇 가지와 약간의 일용품만이 남아 있었다”고 밝혔다.

사건 발생 후 한동안 집단자살에 대한 갖가지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첫째, 이강석이 3명을 먼저 쏘고 나란히 소파에 앉힌 후 자살했다면 3발의 총성이 나고 적어도 3~5분 후 다시 2발의 총성이 나야 하는데 계엄사는 잇달아 5발의 총성이 울렸다고 했다.

둘째, 수면제를 먹게 하고 1발씩 쐈다고 하나 적어도 한 명이라도 총성에 놀라 깨어 어느 정도 저항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셋째, 이강석이 2발을 쏴서 자살했고 머리와 복부 모두 치명상이라는데, 과연 1발을 맞은 후 머리나 복부 등을 다시 쏜다는 게 가능한가.

넷째, 바로 옆 별실에 있었다는 이무기 비서의 행적이 일절 밝혀지지 않았다. 경비실에 보고했다고는 하나 처음 총성이 났을 때 달려가 목격한 것인지, 전혀 들어가보지 않았는지 아리송하다.

다섯째, 제3자에 의한 집단타살설이다. 경무대 내부의 곽영주 경무관 등 이승만의 최측근 또는 충성분자들이 자유당의 숱한 실정(失政)과 3·15부정선거에 대한 거센 인책(引責) 공세를 예상, 이승만을 보호하려고 아예 이기붕 일가를 제거했다는 주장이다.

장례식이 끝난 후 4대의 영구차는 100여 대의 차량이 뒤따르는 가운데 서울시내를 벗어나 망우리 공동묘지에 도착했다. 이기붕과 박마리아의 유해는 이미 잠들어 있는 외동딸 강희의 묘 위쪽에, 강석과 강욱의 유해는 바로 아래에 안장됐다.

재미동포 기자와 공동 취재

여기까지가 이기붕이 이승만을 승계, 대통령이 되려는 야심 아래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정선거를 자행해 부통령에 당선됐다가 국민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절박한 궁지에서 방황한 끝에 일가족 집단자살, 장례식, 매장으로 이어진 상황이다.

그런데 이강석이 살아 있고 신 여인이 그를 직접 만났다니 놀라운 일이 아닌가. 필자는 며칠 동안 심사숙고한 끝에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 국내외로 나눠 취재를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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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이기붕 일가의 자살을 불러온 4·19혁명.
해외 취재 대상국은 당연히 미국이었다. 마침 재미동포 중진 언론인 가운데 뛰어난 활약으로 수많은 특종을 보도했고 탐사보도의 베테랑으로 알려진 친구 박형진(가명) 군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그에게 연락해 비록 한강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 같은 작업이 되겠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번 파헤쳐보자고 제의했다. 예상대로 그는 흥미진진한 소재라면서 당부한 대로 비밀취재와 신원보호는 반드시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필자는 재미동포 사회를 통한 은근한 수소문, ABC방송에서의 인물 찾기, 1960년 당시 한국에서 근무했던 전직 외교관 추적, 관련 자료 입수 등을 탐사 방향의 의견으로 제시했다. 박 군은 좋은 생각이라면서 최대한 뛰어보겠다고 답했다. 그는 미국 방송계 인맥을 총동원해 ABC방송 뉴욕 본사를 비롯해 각 지사, 유럽 등 해외지사에 근무하는 동양계 사원들의 경력과 사진 등을 최대한 입수해 면밀히 점검했다. 미국식으로 이름을 개명했을 가능성, 얼굴을 숨기려 앵커나 기자 외에 PD, 카메라맨, 기술인으로 근무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이들에 대한 조사에도 나섰다.

필자는 국내에서 당시 생존해 있던 전 자유당 중진, 이기붕의 측근, 계엄사 고위 장성, 은퇴 외교관, 4·19혁명 당시 주한 미국대사관에 근무했던 한국 직원들을 상대로 수소문했다. 그때 이미 33년 전 상황이라 대부분 작고했거나 신병과 노령으로 인한 기억력 감퇴 등이 걸림돌로 드러났다.

이강석의 고등학교, 육본 근무(의장대 소속) 시절 친구들도 탐문했으나 뚜렷한 사실 또는 자료를 확인하거나 증언을 듣기 어려웠다. 한 친구는 이강석과 4·19혁명 직후 만남이 끊겼으나 자살 며칠 전 잠시 마주쳤을 때 “차라리 죽고 싶다” “멀리 어디로 떠나고 싶다”라는 말을 하더라고 전했다. 이기붕 측근과 전 자유당 간부들은 대부분 “말하고 싶지 않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라며 입을 다물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기붕이 민의원 의장이던 당시 그의 비서실장을 근 4년간 지낸 한글학자 한갑수 선생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한 선생의 얘기로는 자살 소식을 뒤늦게 듣고 28일 낮 수도육군병원으로 달려갔으나 출입을 금지당했다고 한다. 군용전화로 송요찬 계엄사령관과 통화한 후 들어갔을 땐 이미 시신들을 입관한 상태였다. 오랫동안 모셨던 분들이라 얼굴만이라도 꼭 보고 싶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이강석의 시신을 수습할 때 눈알이 자꾸 빠져나와 담당자가 몇 차례 손으로 집어넣었다는 얘기를 나중에 전해 들었다고 했다.

이강석의 해외 도피 가능성을 묻자 필자가 접촉한 모든 자유당 간부, 이기붕 측근, 계엄사 및 외무부 출신 인사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한갑수 선생은 그렇지 않아도 일가가 자살한 직후 몇 달 동안 ‘가족 전원이 해외로 몰래 나갔다’ ‘집단자살-4구의 관-장례식-매장은 각본이다’ ‘이 의장이 부부의 자살 조건으로 두 아들을 해외로 빼돌리게 했다’는 등의 소문에 시달렸다고 술회했다.

종적 감춘 신 여인

탐문하는 동안 만날 때마다 취재 상황을 묻던 정 선생이 어느 날 전화를 걸어와 신 여인이 전화를 끊고 번호까지 지워버렸다고 전했다. 결국 근 1년 반 동안 소리 없이 전개했던 ‘이강석 찾기’에 대한 반응은 여러 인사로부터 ‘있을 수 없다’는 부정적 의견부터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 ‘끝까지 공개적으로 수소문해볼 만한 소재’라는 격려(?)까지 다양했다. 그러나 국내외에서 모두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참으로 답답했던 것은 국내에 이기붕 일가의 자살, 자살 전 행적, 현장 수사, 검시 등에 관한 기록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53년 전 일가가 자살했을 당시의 관련 인사들은 거의 다 사망했다. 정광모 선생도 작고했고 신 여인도 미궁으로 사라졌다. 이강석 형제 생존설이 과연 사실인지, 신 여인이 착각한 것인지도 가릴 수 없다.

만일 이강석이 생존한 게 사실이라면 망우리 묘소는 어떻게 된 사정인지 모를 일이다. 차라리 세상에 ‘이강석 찾기’를 널리 공지하는 방법도 고려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성춘│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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