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이 항상 늦다
오늘도 역시 사무실 내 머리 위 전등만 켜져 있다.
목도 뻐근하고 허리도 아파서 내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퇴근한다.
계속 귀에 거슬리는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 때문에라도 가야겠다.
어차피 내일 또 출근하면 일은 또 쌓여 있을 것이고 이 생활이 언제까지
반복될지 모르겠다.
아마 그만 둘 때 까지 이럴 것 같다는 생각뿐.
나오면서 휴대폰 시계를 보니 10:28
얼른 가야 씻고 11시 프로라도 조금 보다가 잠들 수 있겠다싶어 담배 한 개피 후다닥 피우고
시동을 걸고 달렸다.
아파트 단지 주차장에 들어가 보니 역시 차들이 넘쳐 주차할 곳이 없다.
매 번 이 시간엔 자리가 없으니 N 으로 놓고 주차하고 만다.
공간을 찾으려보니 앞차를 조금 밀면 내가 넣을 공간이 생길 것 같아
차에서 내려 앞차 트렁크 쪽에 힘을 줬다.
안 그래도 손도 시리고 빨리 주차하고 따뜻한 물에 샤워가 너무 필요했다.
입에서 욕이 자연스레 나왔다. “시발!”
앞차가 N 으로 안두고 주차하고 간 거 같다.
피곤함과 짜증이 급 올라오니 욕이 나오고 재차 차를 밀어도 다시 반동으로 제자리다.
이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라 그러려니 하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더 짜증이 밀려왔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는 생각에 있는 힘껏 밀고 돌아오고 다시 밀고 돌아오고.
'쾅! 쾅! 쾅!"
열 받아 주먹으로 앞차 트렁크 문을 쳤다.
어차피 연락해도 안 받을 인간들이다.
이제 단지 밖에 있는 길에 그냥 주차를 하는 수밖에 없다.
단지 밖으로 다시 나가 주차를 하고 걸어갔다. 아까 밀려온 짜증이 지금도 남아있어 얼른 들어가고 싶을 뿐이었다.
단지 내 작은 슈퍼에 들를까 했는데 문이 닫혔다. 아까 주차하러 들어올 때는 불이 켜진 것 같았는데...
이상하다. 꼭 새벽 1-2시까지는 문을 여는데. 몇 년을 살면서 이런 경우는 보질 못했다.
근데 더 이상했다. 내가 살고 있는 동은 슈퍼 바로 앞이고 복도형 아파트인데
아파트 어느 곳에도 불 켜진 곳이 없다. 내가 주차하러 들어올 때도 불이 켜져 있었는지 아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다른 동을 봤는데 다른 동은 불이 켜져 있는데 우리 동만 그렇다.
내가 사는 7층을 봐도 역시나 불은 꺼져있고 항상 퇴근 무렵 불이 켜져 있는 아랫집이나 윗집도 역시 꺼져있다.
‘정전인가?’ 생각하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는데 ‘젠장!’ 엘리베이터도 작동이 안 되는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계단으로 향했다. 가끔 계단으로 오르락내리락 했던 길이라 그저 힘이 조금 들 뿐이지 그러려니 했다.
별빛인지 달빛인지 모를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빛에 의지해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는데,
3층 무렵 계단과 엘리베이터 사이의 통로 문에서 불빛이 새어 나와 있었다.
일반적인 통로 조명에 의한 불빛이라고 보기엔 빛이 너무 밝아서 문을 조심스레 열어 보았다.
문을 열었는데 집이 나왔다. 익숙한 구조. 내가 중학교정도에 살던 아파트 집이다.
1204호.
그 무렵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중학교 1학년 무렵에 전학을 가서 고등학교 진학 전까지 그곳에 살았었다.
아파트 내부를 천천히 둘러봤다. 전에 살던 집이라 그랬었는지 뭔가 마음이 편안하고 포근해지는 기분이었다. 냉장고도 열어보니 엄마가 한 반찬인지 그대로 있고 살림살이도 전부터 보던 것들...
생각해보니 부모님 댁에 안간지도 꽤 된 것 같다. 일이 바쁘다고 얼마 안 되는 거리인데도 지난 명절때 이후에 연락도 잘 안드렸던 것 같다.
‘아!’
지금 이게 꿈인가. 왜 갑자기 통로 문을 열었는데 전에 살던 집이 나왔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베란다를 통해 들어오는 밝은 빛이 갑자기 사라지고 집 안은 다시 어두워졌다.
굳게 닫힌 예전 내 방은 빼고...
화장실 오른쪽 옆은 안방이고 왼쪽 옆은 내 방이었다. 캄캄한 거실에서 보이는 내 방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나가야 해‘
이곳을 나가야 한다. 지금은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현관문으로 움직이려는데 “끼이이이익” 소리가 들린다.
뒤돌아보니 내 방의 문이 조금씩 열린다. 문이 열리는 틈 사이로 뭔가 어두운 물체가 보인다.
마치 내 방 안에서 그 어두운 물체를 뱉어내려는 것 같다. 바닥에 바짝 붙은 이상한 형체의 그것은 아주 천천히 내 방 안에서 방출되는 것 같다. 자세히 보이지 않지만 사람 같지도 않고 그저 검정색의 고무가 열에 녹아 바닥에 눌러 붙은 그런 모습 같다. 그렇지만 사람의 형체 비슷한 그것.
저것이 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나가야 한다. 꿈에서 깨든 여길 벗어나든 해야 한다.
현관문을 여니 다시 계단이 나왔다. 다행이다. 문을 닫고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4층. 기괴한 이 상황에서 4라는 숫자가 괜히 찜찜해 보였다.
별빛인지 달빛인지 모를 창문 너머의 빛은 아까보다 더 가늘어진 것 같다.
휴대폰 시계를 보니 11:14.
보통 11시면 집에 이미 도착해서 씻을 시간인데 오늘 이게 뭔지 모르겠다.
아직도 꿈인지 분간도 안 가고 아까 그 기괴한 형체는 뭐였을까.
이럴 생각할 때가 아니다.
3층. 4층 다음엔 5층인데 다시 3층이다.
아직 꿈인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 제발 정신 차려야 한다. 머릿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꿈인지 진짜인지 모를 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다시 계단을 올랐다. 4층. 3층. 아 젠장. 3층이다. 3층 통로 문에 귀를 대봤다.
“쾅쾅쾅쾅쾅!!!”
귀를 대자마자 반대편에서 엄청 세게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대체 저건 뭘까.
담배를 한 대 빼서 물었다. 이거라도 피면서 정신을 차려야겠다. 지금 상황을 정리해보자.
난 분명 퇴근해서 차를 운전해 주차도 하고 걸어 올라와 지금 내 아파트다.
정신을 잃은 기억도 없고 지금 이건 꿈은 아니다. 그럼 저건 대체 뭐고 전에 살던 아파트는 어떻게 나왔을까? 아파트 불은 왜 다 꺼져있고, 엘리베이터는 왜 또 안 되는 것이며 왜 3층과 4층을 계단은 반복되지?
답이 안 나온다. 뭐에 홀렸거나 내가 미쳤거나 둘 중에 하나다. 꿈은 분명 아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항상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세상은 만만한 곳이 아니다. 여기까지 내가 살면서 어떻게 달려왔는데... 정신 똑바로 차리며 살아남아 여기까지 왔다.
3층 문에 다시 귀를 대봤다. “쾅쾅쾅쾅쾅!!!” 역시 엄청 세게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그 누군가가 아까 그 기괴한 것인지 뭔지를 모르겠지만 이젠 무슨 웅얼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그냥 4층으로 가서 4층 문을 열어봐야겠다.
4층. 문에 귀를 대봤다. 아무소리도 안 들린다. 다행이다.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미쳤다.
이번엔 고등학생 때 살았던 집이다. 어려서부터 이사를 참 많이 다녔다. 지금까지 살면서 총 8-9군데 이사 다니며 살았는데 지금 이 집은 가장 오랫동안 살았던 곳이었다.
아파트가 아니라 도시 외곽에 전원주택이었고 집을 새로 지어서 갔는데 마을에서도 외곽에 있었다.
마을이 있어도 마을 끝부분 작은 산을 올라가는 입구 쪽에 집이 있었는데 마당도 넓고 집도 커서 좋았다. 텃밭도 넓어서 채소도 키우고 부모님들께서 좋아 하셨던 집이다.
그 집 위로 다른 집이 한 채 있었는데 거기가 무당집이었다. 무당 아주머니는 어머니와 친하게 지내셨고 단지 난 무섭다고 생각하기보다 그냥 관심이 없었다. 원래 타인에 대해서 크게 관심이 없다.
단지 이 집에 있을 때는 난 고등학생이어서 3년 내내 기숙사에서 지냈기 때문에 그다지 많이 지내진 않았고 그 이후에 대학 가자마자 자취를 시작해서 이 집에서는 대학 방학 때나 잠깐씩 살아서 나에겐 그리 큰 기억은 많지 않다.
다만 이 동네에서 기억에 남는 것 하나가 엄마랑 정말 친했던 동네 아주머니 한 명이 나중에 우리가 이사를 가고 나서 몇 년뒤에 자살을 했었다는 정도이다. 지인이 자살했다는 소식은 그 때 처음이어서 솔직히 충격이었다.
어쨌든
이 이상한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오른쪽 방이 내 방이었다.
그 방에서만 불빛이 새어나온다. 3층에서와 똑같은 상황인건가.
먼저 문을 열었다. 다행히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큰 책상. 목공소 일을 했던 고모부께서 고등학생이 되셨다고 선물로 만들어주신 것.
대기업 회장님들이나 쓸 정도 되는 큰 책상이었는데 그 책상 위 스탠드 불이 켜져 있다.
책상위엔 노트가 한 권 있다. 일기장. 열쇠가 잠겨져있는.
지금은 중2병이라 불리는 그런 것들이 나 때도 있었다. 어릴 적부터 일기를 쓰게끔 습관을 들여서 고등학교 때는 자주는 아니었어도 일기를 종종 쓰곤 했다. 그 일기장이었다.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어딘가에 버려졌을 내 추억들.
문득 궁금해져 일기장을 한 장씩 넘기며 보는데
왼쪽 침대 구석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 커튼에 가려진 그 구석에 뭔가가 있다. 웅크린 무언가.
절로 문 쪽으로 몸이 젖혀졌다. 아까 그 기괴한 것인가. 아무 미동도 하지 않는 무언가에 침 삼키는 소리가 조용히 들렸다.
“끄으윽” 소리를 그것이 내더니 이내 웅크림을 피는 듯한 모습이었다. 마치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것은 기지개를 피는 것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타이어가 녹아내려 뭉쳐진 것처럼 그것은 새카맣고 사람이 아니었다.
“끄으윽” 소리를 내며 움직인 그것은 귀신도 아니었고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다시 꿈을 꾸는 것은 아닐테고 난 그저 몸을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끄으윽... 끄윽... 끄으윽...”
정신차려야 한다. 저것과 닿기라도 하면 당장 내 몸도 저런 모습으로 변할 것만 같았다.
문을 열었다. 현관문을 열었다. 거칠게 닫았다.
계단이다. 올라가야 한다.
5층.
다행이다 5층. 4층. 5층. 4층. 5층. 4층
시발
다시 반복이다. 이제 나보고 5층을 가라는 소린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4층 통로 문에 귀를 대보니 “끄으윽” 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역시 웅성웅성 대는 소리가 들린다.
어쩌란 말인가. 진짜 미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