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간 사귄 여자가 있었습니다.
5년이라는 세월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4년째가 지날 무렵부터,
여자친구는 결혼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사귀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도 나중에 결혼하자고 이야기하곤 했고,
언젠가는 진짜 결혼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나는 막 대학을 졸업했지만,
아직 취직처를 찾지 못했던 상황이었습니다.
나 자신조차 가누지 못하는 상황인데,
왜 결혼 이야기를 대뜸 꺼내는 걸까.
여자친구는 자기도 일하겠다고 말해왔지만,
남자인 내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결혼하고 살다보면 아이도 생기겠지요.
적어도 가정을 부양할 수 있다는 자신이 생길 때까지는,
결혼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 의견을 알아주면 좋겠다고 몇 번이고 설득에 나섰지만,
서로의 의견은 어긋날 뿐이었습니다.
사랑하고 있으니 결혼하고 싶다.
지켜주고 싶으니 기다려줬으면 좋겠다.
우습게도, 그런 마음이 오히려 이별을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사랑을 속삭이던 입은 끝내 서로에게 더러운 말을 내뱉고 말았고,
그녀가 외친 [두 번 다시 보기 싫어!]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 관계는 그대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헤어지고 반년 정도 지났을까요.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다시 만나고 싶다고,
잊을 수 없는 사랑이라며 울며 호소했습니다.
매정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터지고 말았던 큰 싸움 탓에 완전히 정나미가 떨어졌던 터였습니다.
관계를 회복할 생각이 없다고 말한 뒤,
나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사흘 뒤,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이번에는 한 번 만나달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만나서 얼굴을 보면 마음이 움직일 거라 여긴거겠죠.
나는 우유부단하고 결정을 잘 못내리는 성격이라,
사귀고 있을 무렵에는 모든 결정을 여자친구에게 미루곤 했었습니다.
그런 내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제안을 했던 거겠죠.
물론 나는 거절했습니다.
다음 전화는 이틀 뒤였습니다.
세 번째나 전화를 받으니, 슬슬 기분이 나빠지더군요.
전화기에 여자친구 이름이 뜨는 것도 보기 싫어,
쿠션 아래 핸드폰을 던져넣고 없는 척 하기로 했습니다.
진동이 다 울리고 멈췄나 싶으면, 또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견딜 수 없어 큰맘 먹고 핸드폰을 집어드니,
부재중 통화가 30통 넘게 찍혀 있었습니다.
이쯤 되니 기분 나빠 견딜 수가 없더군요.
뭐라고 한마디 해줄 생각으로,
통화 버튼을 누른 순간이었습니다.
[왜 안 받는거야!]
귀에 전화기를 채 대지 않아도 들릴 정도로 심한 절규였습니다.
한심한 이야기지만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내 분노는 순식간에 사라지더군요.
그녀의 분노를 가라앉혀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문득 떠오른 거짓말을 그대로 말했습니다.
핸드폰을 잊어먹고 나갔다가 지금 막 돌아왔다고.
그리고 가능한 한 상냥한 목소리로,
왜 그러냐고 물었습니다.
[크크크..]
낮은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울고 있는건가 싶었지만,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껄껄 웃기 시작했습니다.
[너희 집 앞에 자판기 있지? 지금 보여?]
내 방에서 수십미터 떨어진 곳에 자판기가 있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 창밖을 바라본 순간,
손에서 휴대폰이 미끄러져 떨어졌습니다.
그녀가 귀신 같은 얼굴을 한 채 눈물을 흘리며 웃고 있었습니다.
사귀던 5년간, 한번도 보지 못했던 얼굴이었습니다.
아니, 한번이라도 봤다면
당장 이별을 고했을거라 생각할 정도로 무서운 얼굴이었습니다.
그날 밤은 무서워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아침해가 떠오르자, 나는 겨우 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상쾌한 공기를 마시고, 밝은 햇빛을 받으면 마음이 달라질거라 여겼죠.
살짝 커튼을 열고 밖을 내다봤지만, 자판기 쪽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는 안심하고 커튼을 활짝 열었습니다.
창문 정면, 가느다란 전봇대에 기대듯 앉아,
그녀는 내 방 창문을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지었습니다.
안녕, 하고 입이 움직이는 듯 했습니다.
열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힘껏 커튼을 닫았습니다.
귀찮은 일이 되어버렸구나 싶었습니다.
한숨이 절로 나오더군요.
알아채지 못하게 슬쩍 밖을 보니,
그녀는 여전히 전봇대 옆에 앉아 내 방을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집에는 일주일 정도는 버틸 식량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그녀라도 배는 고플 것이고, 목은 마를테며, 화장실은 가고 싶겠죠.
나는 틈을 봐서 방을 나온 뒤,
당분간 친구네 집을 돌아다니며 묵을 작정으로 짐을 쌌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들여다보지 않을 때만 볼일을 보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볼 때는 늘 거기 있었습니다.
나흘째 밤.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희희낙락해서 방을 나오려다,
현관문을 보고 우뚝 멈춰섰습니다.
우편물 구멍이 기묘한 형태로 열려 있었습니다.
신문 정도만 들어올 수 있게 열리는 타입이라 다행이었습니다.
90도로 돌아가서 열리는 타입이었다면,
나는 거기서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을테니까요.
더 열기 위해 손가락이 발버둥치고 있었습니다.
[저기, 들여보내 줘. 이야기를 하자. 그렇게 서로 사랑했었잖아. 한 번 더 이야기를 하자.]
뇌리에 떠오른 것은, 오랜 세월 봐왔던 사랑스런 웃는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자판기 옆, 귀신 같은 얼굴만 떠오를 뿐..
나는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 쓰고, 미친듯이 벌벌 떨었습니다.
그럼에도 몇 시간 정도는 잠을 자고 말았던 것 같습니다.
정신을 차린 뒤,
조심스레 이불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가만히 현관문을 바라봤습니다.
우편물 구멍에서 새빨간 줄이 수도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끼익, 하고 철판이 살짝 열리더니, 무언가가 던져져 들어왔습니다.
붉은 줄이 하나 더 늘어납니다.
그게 무엇인지 알아차림과 동시에,
나는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고기토막이었습니다.
그녀는 작아져서 내 방에 들어올 생각이었던 겁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더니
[구급차 불러!] 하고 소리치는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더욱 소란스러워지더니,
잠시 지나 [문 열어주세요.] 하고 말하는 남자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문을 열었습니다.
사실은 열고 싶지 않았지만, 남자는 경찰일테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현관문도 그 앞 복도도 새빨갰습니다.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미 구급차로 옮겨진 듯 했고,
경찰 쪽에서도 배려를 해줘 대면하지는 않았죠.
발견됐을 때,
그녀는 자기 손가락을 물어뜯고 있엇다고 합니다.
나는 곧바로 이사했습니다.
새집은 건물 입구에 우체함이 있는 곳으로 골랐습니다.
처음 이사했을 때는 커튼을 열때마다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그 사건이 있고 몇 개월 뒤,
그녀가 자살했다는 말을 전해들었습니다.
솔직히 안심했습니다.
안됐다 싶었지만 안도하는 마음이 더 강했죠.
어느덧 안정을 찾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 여자친구도 생겼습니다.
그 무렵부터였습니다.
끼익, 철컥, 끼익..
불규칙하게 소리가 들리게 되었습니다.
끼익, 철컥, 끼익..
다른 곳으로 가도 소리는 들려옵니다.
노이로제 증세까지 생겨,
여자친구와도 헤어졌습니다.
그러자 소리는 멎었습니다.
다시 시간이 흘러, 나는 다시 새 여자친구를 만났습니다.
끼익, 철컥, 끼익..
끼익, 철컥, 끼익..
나는 지금 홀로 지내고 있습니다.
결혼은 평생 할 수 없겠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평생 홀로 남을 수 없을 겁니다.
아직도 그녀가,
문 앞에서 스스로를 작게 잘라내고 있으니까.
출처: VK's Epitap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