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회식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커다랗고 반투명한 토끼가 나를 앞질러 폴짝폴짝 뛰어갔다.
시바견 정도 크기였다.
취했기 때문에 무섭지는 않았다.
[어라? 혹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토끼씨인가? 기다려..]
그런 식으로 오히려 두근대면서 바보같이 뒤쫓아갔다.
그러자 토끼는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현관을 뚫고 들어가버렸다.
당황해서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문이 열려 있었다.
어? 분명 문을 잠궜었는데?
우선 안으로 들어갔더니, 토끼가 거실에서 나를 쓱 돌아봤다.
토끼는 내가 안으로 들어온 걸 확인하고,
이번에는 벽장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서둘러 벽장을 열자 토끼는 없었다.
그 대신, 낯선 남성이 땀투성이가 되어 기절해 있었다.
기절초풍해서, 나는 옆집 여자에게 도움을 구하고,
요령부득이지만 토끼 이야기까지 더해 어떻게든 설명했다.
옆집 여자는 경찰과 구급차를 불러줬고,
경찰에게 이야기를 할 때 토끼 이야기는 안하는게 좋겠다는 조언도 해줬다.
경찰에게는 집에 돌아와보니 문이 열려 있고,
벽장 안에 모르는 남자가 있었다는 말만 했다.
나중에 경찰에게 들은 이야기는 이랬다.
그 남자는 내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시간을 이전부터 체크하고 있었단다.
그래서 내가 평소 돌아오던 시간보다
조금 일찍 문을 부수고 방에 들어와, 벽장 속에 숨어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회식 때문에 돌아오는게 늦어지는 사이,
열사병으로 정신을 잃은 것 같다.
구급차를 부르는 게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생명이 위급했을지도 몰랐다고 한다.
아무래도 무섭기 때문에,
나는 고향집으로 내려가 살기로 했다.
비록 회사랑 거리는 좀 멀어졌지만..
그날, 내가 돌아오는게 더 일렀으면 남자에게 무슨 일을 당했을지 모르고,
더 늦었으면 그 남자가 죽어서 귀찮은 일에 휘말렸을지도 모른다.
큰 토끼는 그걸 알려준 것이었을까?
그 이후 그 토끼를 다시 보지는 못했다.
출처: VK's Epitap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