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학교에서 단체로 일본 여행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단체 여행이었기 때문에 방은 여럿이서 함께 배정받게 되었지요.
1주일 동안 오사카에서 도쿄까지 둘러보고 귀국하는 코스였습니다.
정말 즐겁게 여행을 하던 도중,
5일째 밤에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친구 2명과 함께 3명이 같은 방을 쓰게 되었는데,
너무나 갑작스레 다른 친구 2명이 졸리다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시간은 아직 10시 정도밖에 되지 않았었고,
룸서비스로 맥주와 안주를 잔뜩 시켜 놨었기 때문에
그런 친구들의 모습이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그냥 [그래, 너희 먼저 자. 난 TV 좀 더 보다 잘게.]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말이 떨어지자마자 친구들이 그대로 잠에 곯아떨어졌습니다.
저는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복도에서 얼음을 가져와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맥주에 얼음을 넣고 안주와 함께 먹으며 TV를 봤습니다.
그리고 어느샌가 저 역시 그대로 잠에 빠져버렸습니다.
한참 자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몸이 너무 답답했습니다.
후덥지근한 데다 움직일 수도 없었습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일어나려는데,
몸이 전혀 움직이지를 않았습니다.
눈만 겨우 움직여서 방 안 구석구석을 살피는데,
자기 전까지만 해도 잘 나오던 TV 화면이 지지직거리며 노이즈만 나오고 있었습니다.
이게 뭔가 싶어 더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호텔방 문쪽 천장 구석에 여자아이가 앉아 있었습니다.
천장에 아주 자연스럽게 말입니다.
그때는 천장에 앉아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쉽게 납득했었습니다.
여자아이는 갈색 단발에 교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반팔 와이셔츠에 갈색 니트 조끼, 체크무늬 치마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아이를 본 순간 저는 한눈에 그 아이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피부는 혈색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창백했죠.
백인의 하얀 피부 같은 느낌이 아니라,
말 그대로 흰 도화지처럼 새하얀 얼굴이었습니다.
눈 역시 동공이 풀려 있어 눈빛을 읽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눈으로 그녀는 계속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이젠 죽었구나 싶었습니다.
식은땀만 뻘뻘 흘리고,
처음 눌린 가위에 당황한 채 그대로 누워있을 뿐이었습니다.
머릿속으로 가위에서 풀려나는 법을 찾아봤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그것마저 포기하고
그저 그 아이에게서 시선을 피하려 애썼습니다.
고개를 돌릴 수조차 없어 눈알만 굴리는 수준이었지만요.
그런데 갑자기 그 아이가 앉은 채로
스르륵 저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달팽이 같은 매우 느린 속도였지만
한 가지만은 알 수 있었습니다.
[저게 여기까지 오면 나는 죽겠구나.]
저는 그저 할 수 있는 것도 없이
그것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요.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졌습니다.
아마 제가 정신을 잃었던 것 같습니다.
일어나 보니 이미 아침이었습니다.
친구들은 어느새 옷도 다 차려입고 짐까지 싸두었더군요.
저는 후다닥 일어나서 친구들에게 질문을 마구 던졌습니다.
[야, 너희 귀신 못 봤어? 나만 본 거야?]
[무슨 헛소리야, 갑자기..?]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꺼져 있는 TV에 눈이 갔습니다.
[어젯밤에 TV 누가 껐어? 난 아닌데..]
[아침에 일어나니까 꺼져 있던데?]
[..그럼 내가 먹던 얼음은 누가 버린 거냐?]
[얼음은 무슨? 얼음통도 없는데 무슨 소리야.]
제가 가져왔었던 얼음통은 감쪽같이 사라졌고 TV도 꺼져있었습니다.
때문에 저는 어제 그 일이 꿈이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제가 전날 밤에 얼음통을 올려뒀던 테이블에는
물기가 흥건히 남아 있었습니다.
얼음통은 복도의 얼음 자판기 앞에서도 찾을 수 없었고,
그 층 어느 곳에도 없었습니다.
그 귀신은 과연 저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어째서 제가 잠든 뒤 방 안을 정리해 뒀던 것일까요?
아직도 그때 일만 생각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습니다..
출처: VK's Epitap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