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여름날이었습니다.
다른 도시에 일이 생겨 밤 9시가 다 되어서야
집 근처에 도착했습니다.
집에 가기 전, 문득 아버지가 병원에서
당직을 서시는 날이라는 게 생각났습니다.
오래간만에 커피나 한잔하면서 잠깐 말동무를 해드리려고
아버지가 계시는 당직실로 향했습니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이라 그런지
운전하고 나서 평소보다 더 피곤하더군요.
차를 끌고 아버지가 계시는 병원 입구에 들어섰습니다.
밤이라 정문은 잠겨있어서 장례식장이 있는 후문에 차를 대고 아버지를 뵈었습니다.
들어갈 때 보니 누군가 상을 당한 모양이던데
장례식장 안은 쓸쓸할 정도로 텅텅 비어있더군요.
아버지와 간단하게 차를 마시면서
오늘 있었던 일을 들려드렸습니다.
슬슬 집에 가서 쉬어야겠다 싶어 일어나자,
시간은 이미 11시가 넘어서 있었습니다.
후문을 나서니 습한 공기가 폐를 채웠습니다.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을씨년스럽게 내리더군요.
주차장으로 가서 차에 시동을 걸고 나오려고 하는데
차를 돌릴 곳이 마땅치 않아 장례식장 옆쪽으로 나있는 공터까지 갔습니다.
자갈이 깔린 공터에 들어서니 새까만 운구차가
묘한 분위기를 내뿜으며 공터 한가운데 주차되어 있었습니다.
차를 돌리려 운구차 주위로 천천히 원을 그리며 운전했습니다.
기분은 조금 음산했지만 별 신경 안 쓰며 집으로 돌아왔죠.
집에 돌아와 간단히 정리를 하고,
피곤한 마음에 얼른 눈을 붙였습니다.
한참이 지나고 깊은 새벽이었을까요.
누운 자리에서 맞은편에 창문이 나 있는데,
푸르스름한 기운이 들어 눈을 떴습니다.
아! 시퍼런 눈동자 두 개!
도깨비불같이 이글거리며 불타오르는 두 개의 눈동자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겉이 다 헤진 거적때기를 머리에 뒤덮고 있었습니다.
얼굴을 보려 했지만, 그림자, 아니..
심연에 가까운 어두움 때문에 거적때기 밑으론 두 개의 눈동자만이 보였죠.
처음엔 깜짝 놀랐지만,
다시 깨달으니 너무 괘씸한 겁니다.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창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곤 제가 생각지도 못했던 낮은 중저음으로 이렇게 호통을 쳐대었죠.
[네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발을 붙이는 게냐! 네가 감히 나한테 붙으려고 하는 게냐!
내가 누군지 알고 그런 괘씸한 행동을 한단 말이냐! 얼른 너의 자리로 돌아가라!]
속으로 괘씸하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었지만,
제 목소리와는 살짝 다른 힘차고 낮게 울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호통을 칠 줄은 스스로도 몰랐습니다.
제가 호통을 치니 집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고,
집안에는 시퍼렇지만 무언가 의지할 수 있을 것 같은 묘한 불빛이 일렁였습니다.
하늘에선 비 오는 와중에 천둥이 몇 번 치더니,
이윽고 그 형체는 사라졌습니다.
개운한 마음이 들어 창문을 짚은 제 팔을 보는데
무언가 화를 내고 엄하던 분위기는 마음에서 사라지고,
아까 창문을 엿보고 있었던 그것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결 편한 마음에 잠자리에 다시 들었는데,
정작 눈을 감는 순간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 모든 게 꿈이었던 거죠.
하지만 그 꿈이 너무 현실 같고 생생했기에,
그저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그렇게 꿈을 꾸고 난 후,
물 한 잔을 마시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고 내가 왜 그런 꿈을 꾸고
왜 그것이 우리 집에 붙어있나 생각해봤습니다.
전날 밤 운구차 주위를
차로 한 바퀴 돌며 나온 게 원인이 아닐까 싶더라고요.
측은한 마음에 마음속으로
간단히 망자의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전날 밤 보았던 그 두 개의 눈동자 너머로
단지 두려움과 괘씸함이 아니라 배고프고 쓸쓸하고 외로웠던
한 사람의 인생이 어렴풋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출처: VK's Epitap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