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ch] 같은 꿈을 계속 꾸었다

금산스님 작성일 19.12.02 10:4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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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앞을 걷다가, 너무나도 이상한 헌팅을 당하고,

끝내 인생이 완성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아내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인데,

아마 여기 쓰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어렸을 때, 일 년에 한 번씩

늘 같은 꿈을 꾸곤 했다.

 


중학교 무렵까지 매년

그 꿈을 꾸었던 기억이 난다.

 


클로버가 곳곳에 피어있는 들판에서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어린 여자아이가 뛰어다니는 꿈이다.

 


이 꿈을 꿀 때면 왜 그런지는 몰라도,

이제껏 느낀 적 없던 종류의 행복을 느끼며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꾸지 않다 보니,

어른이 되고서는 까맣게 잊고 살고 있었다.

 


어느 휴일, 서점에 들렀다 돌아오는데

[죄송합니다.] 하고 웬 여자가 어깨를 두드렸다.

 


"어? 나 말인가?" 싶어서

헤드폰에서 귀만 내밀고, [네?] 하고 되물었다.

 


오묘한 얼굴로

[저와 어디선가 만나지 않으셨나요?]라고 질문해왔다.

 


"어라, 아는 사람인가?" 싶어서

얼굴을 찬찬히 뜯어봤지만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아뇨, 아마 잘못 보신 거 같은데요..]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여자는 찜찜하다는 듯, [그래,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갑작스레 얼굴을 훅 들더니,

[저, 첫눈에 반했어요! 사귀어 주지 않으실래요?]라고 고백을 해왔다.

그제야 나는 이게 헌팅인가 싶었다.

 


전혀 인기가 없던 나는

여자한테 고백을 받았다는 것만으로

날아오를 듯한 기분이었다.

 


[앗, 잘 부탁합니다..] 하며 조금 폼도 잡아보고.

여자도 웃으며 [그럼 연락처를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하고

휴대폰을 건네와 그날부터 연락을 하게 되었다.

 


나는 [헌팅을 당해서 말이야~ 나도 여자친구가 생겼다~]라고

으쓱대며 친구들에게 자랑을 해댔다.

 


하지만 여자친구 쪽은 어쩐지

데이트를 할 때도, 연락을 할 때도 무리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긴장이라도 한 걸까 싶었지만,

점점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그래도 그럭저럭 3달 정도가 지난 어느 날,

같이 드라이브를 가게 되었다.

 


차를 타고 가자는 이야기를 꺼낸 순간

여자친구의 얼굴이 가면처럼 굳어서 당황했지만,

곧 웃으며 [드라이브 좋겠어! 가고 싶어.]라고 대답했다.

 


당일, 여자친구를 만나자

엄청 큰 배낭 같은 걸 메고 왔었다.

 


[소풍도 아닌데 뭘 이렇게 많이 싸왔어.] 하고 웃고는

꽤 시골인 동네를 떠나 평소와는 다른 도시 쪽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그날 여자친구는 너무 반짝반짝 빛나 보였다.

역시 수수한 시골보다는 도시 쪽이 즐겁겠지..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꽤 멀리 차를 타고 나오다 보니,

여자친구가 만들어 준 주먹밥이나 샌드위치를 먹기도 했다.

 


차 안에서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일들이

소소하게 행복하고 즐거웠다.

 


이후에도 가끔 드라이브 데이트를 하게 되었고,

여자친구는 매번 이것저것 만들어 와서

마음의 거리가 줄어든 느낌이었다.

 


어느 날, 언제나 그렇듯 여자친구 집 앞에서

여자친구를 태우고 운전을 하는데,

여자친구가 조수석에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

 


[오늘인가 보네, 아마.]

[어? 뭐가?] 하고 묻자, [응? 나 뭐라고 말했어?]라고

웃어서 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야기를 하다 보니 평소와 똑같았기에,

평범하게 데이트를 마치고 저녁을 먹은 뒤 돌아오는 길에 올랐다.

겨울인데다가 주변은 산길이라 벌써 어두웠다.

 


[내일은 영하래.], [정말? 큰일이다..] 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운전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 어쩐지 여자친구의 목소리가 굳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재빨리 얼굴을 바라보자 왠지 눈이 풀린 것 같았다.

 


[왜 그래? 괜찮아? 추워?] 하고 묻자,

[응, 괜찮아.]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거기서부터 대화가 끊겼다.

 


나는 여자친구가 화가 날만한 말이라도 했나 싶어

걱정하며 산길 커브를 돌아갔다.

 


그런데 갑자기 자동차가 슥 하고 커브 바깥쪽으로 겉돌더니,

원심력에 따라 그 기세 그대로 가드레일 너머로 떨어졌다.

엄청난 폭음이 들린 후 의식이 사라졌다.

 


한참 뒤, 여자친구가 나를 흔들어 눈을 떴다.

자동차는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겠고,

머리는 아픈데 눈은 보이지 않고 옷이 축축한 것만 느껴졌다.

 


망연자실하던 와중,

문득 여자친구가 걱정돼서 돌아보고는 깜짝 놀랐다.

 


여자친구는 무사했는지 멀쩡한 모습으로

(나중에 안 것이지만 실제로는 여자친구도 다친 채였다)

담담하게 언제나 메고 다니던 배낭에서 거즈와 붕대를 꺼내고 있었다.

 


그리고는 믿을 수없는 깔끔한 솜씨로,

내 머리에 대고 지혈하며 두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 머리는 충격으로 깨져서,

그 피로 옷이 젖어 있던 모양이었다.

그 후 여자친구는 휴대폰으로 구조를 청했다.

 


예보대로 영하의 추위였던 탓에,

배낭 속에 들어있던 손난로를 내 몸에 잔뜩 붙이고

우리는 꼭 껴안고 체온을 지켰다.

 


나는 피가 빠져나간 탓인지 굉장한 한기가 느껴졌고,

공포에 질려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자친구는 무척 침착했다.

 


어째서인지 [내가 꼭 지켜줄게.]라고 나에게 말하며..

나는 무척 신기한 기분이었다.

 


잠시 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고

우리는 같이 구조됐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도중,

여자친구에게 그 응급치료 솜씨는 무엇이었는지 물었다.

 


여자친구는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나, 알고 있었어.]라며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여자친구는 어릴 때부터

모르는 남자가 밤중 산길에서 사고를 당해

죽는 꿈을 반복적으로 꾸었다고 한다.

 


너무 자주 꿈을 꾸다 보니,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자 위에서 내려다보던 꿈이

조수석에서 지켜보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리고 차차 꿈을 꿀 때마다,

어떻게 사고가 일어나서 어디를 다치고,

무엇이 원인이 되어 죽는지를 파악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남자가 죽지 않을 수 있도록,

꿈속에서 필요한 도구를 갖추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노력의 결과,

사고 끝에도 살아나는 게 당연한 일이 되어,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처음 나를 봤을 때,

여자친구는 너무나 큰 충격에

온몸에서 땀이 나고 토할 것만 같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다.

정기적으로 꿈에 나오던 남자를

현실에서 마주친다면 누구라도 무섭겠지..

 


처음 만났던 그날은,

정말 큰맘 먹고 말을 걸었던 거라고 한다.

 


그저 우연일 뿐이라면 여기서 끝이지만,

만약 꿈이 현실로 이루어진다면

이 남자에게 말을 걸지 않은 걸 평생 후회할 거라 느끼면서..

 


솔직히 외모적으로 나는

여자친구의 이상형이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갑자기 친구가 되어달라고 말하면 기분 나빠하고 끝날 거 같아,

첫눈에 반했다고 그럴듯하게 둘러댔던 것이다.

 


사귀고 있다 보면 언젠가 그 사고를 마주칠 테니,

적어도 그때까지는 사귀겠다는 마음으로..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통곡했다.

여자친구가 그동안 무리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사고로 머리를 다쳐서 그런 걸까

오히려 그 이야기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졌다.

 


솔직히 목숨을 건진 기쁨보다,

여자친구가 이제 내 곁을 떠나갈지도 모른다는 것에 절망했다.

 


나는 통곡하며 [이제 우리는 헤어지는 거야?]라고 물었다.

그런데 여자친구는 반문했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나는 절대로 헤어지고 싶지 않아. 이제 진심으로 좋아하게 됐으니까.]

어쩐지, 결코 여자친구와 헤어져서는 안된다는 예감이 들었다.

 


당시에는 나 같은 놈이 이런 여자를 놓치면

다음은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 그랬다고 여겼지만,

헤어지면 안 된다는 것을 마음속에선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내 대답을 들은 여자친구는

[나도 너를 좋아하게 됐어. 앞으로도 잘 부탁해.]라며 웃었다.

 


그로부터 반 년 정도를 더 사귄 후,

사귄 지 1년쯤 될 무렵 우리는 결혼했다.

결혼하고 2년 만에 아이가 태어났다.

 


어느 화창한 날, 이제는 아내가 된

여자친구가 만든 도시락을 가지고 피크닉을 갔다.

 


2살 된 딸은 무척 들떠서,

피크닉 시트를 준비하는 동안에도 뛰어다녔다.

 


웃으며 위험하니까 이리 오라고

딸에게 손을 뻗던 순간,

나는 번개를 맞은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아내가 땋아준 양 갈래머리를 휘날리며

뛰어다니는 딸의 모습은

어린 시절부터 반복해 꾸어오던 꿈속의 그 장면이었다.

 


퍼즐 조각이 맞춰지듯,

모든 것이 딱 맞아떨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내가 나를 돕는 꿈을 꾼 것도,

내가 아내와 결코 헤어지면 안 된다고 느낀 것도,

모두가 딸아이를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그 꿈을 보고 느끼던 말로 표현할 수 없던 행복감은,

고작해야 중학생이던 내가 알 턱도 없는 것이었다.

어린 딸을 보는 아버지의 행복감이니까..

 


지금 처음 맛보는 부모로서의 행복 속에서,

그리움을 느끼는 모순된 감정으로 서 있다.

 


내 인생은 언젠가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고 순응하고 있다.

 


출처: VK's Epita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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