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발단
1980년대 일어난 경제사건이자 조희팔 이전 대한민국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금융사기사건으로 이른바 '단군이래 최대의 사기사건'으로 회자되었다고합니다.
1982년 5월4일,언론과 방송은 일제히 검찰이 장영자·이철희 부부를 구속했다는 기사가 대서특필됨으로써 온 세상에 이 사건이 알려집니다. 1982년 5월4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외국환관리법 위반혐의로 이철희-장영자 부부를 구속하고 이들이 명동 암달러시장과 캘리포니아에서 80만 달러를 모았다고 발표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이 뒤에 각종 어음관련 사기행각이 드러나게 되는데 당시 장영자가 유통한 어음 규모가 총 7111억이었고 이 액수중 사기관련 금액은 6404억에 달하는 천문한적인 액수였다고 합니다.
2020년인 현재에도 엄청난 액수인데 1980년대에는 사회적 충격이 더 컸을 것 같습니다.
장영자는 체포 당시 손에는 1억 2천만 원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2명의 비서와 4명의 경호원이 곁을 지켰으며, 평균 대기업 직장인 월급이 20 ~ 30만 원초이던 시절 한 달 생활비로 3억 9천만 원을 쓸 정도로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1980년대초의 물가를 한번 검색해봤습니다. (잘못된게 있는 걸 알려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1982년 쌀 한가미(정부미 기준) : 5만6천원
도시 대기업 근로자 평균 월급 : 20만원 ~ 30만원초
1982년 프로야구 박철순 선수 당시 최고연봉 : 2400만원
프로야구 평균 연봉 : 1215 만원
1982년 사병 월급 : 병장은 4200원, 상병 3700원, 일병 3300원, 이병 3000원
1980년대 초 서울 서민용 개포동 18평 주공 아파트 : 600 ~ 700만원
사건의 발생
1981년 당시 국군보안사령부 보안처장이었던 정도영 준장은 '어느 중년 여인이 군 부대 불교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해 거액을 뿌리고 다닌다.'는 첩보를 입수한 뒤 조사를 시작합니다.
이상한 점은 해당 부대의 부대장들과 아무런 인연도 없으면서 거액을 기부했다는 점입니다.
조사 결과 여인의 이름은 장영자(당시 나이 37세), 법명은 보각행(普覺行) 이었다고 합니다. 곧 장영자는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었다고 합니다.
1981년 청와대 산하 민정수석비서관실에 장영자 부부에 관한 첩보가 입수되었고, 민정수석비서관인 이학봉은 국가안전기획부장 유학에게 통보해줬다고 합니다.
유학성은 처음엔 별 거 아니라고 여겼으나 곧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남편 이철희(육사2기출신)는 중앙정보부 차장출신이고 또 국회의원을 역임한 점이 있다고 합니다. 장영자 관련해서는 이 때 전두환의 처삼촌이 이규광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처제에 해당하는게 바로 장영자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모로 당시 정권과 친 / 인척 관계에 얽혀 있던 상태였다고 합니다.
이후 1982년 4월 공영토건이 장영자에게 어음 사기를 당했다며 진정서를 대한민국 검찰청에 제출하며 이들을 향한 검찰의 수사가 시작되며 둘다 구속됩니다.
주로 행했던 사기 수법
대통령의 친인척인 장영자와 중앙정보부 차장을 지낸 국회의원 출신의 이철희, 이 두 사람의 신분과 이름이 곧 이 사기수법의 기반이 되었던것 같습니다.
일단 이들은 본인들의 이런점을 이용해서 은행에서 거액의 편법 무담보 대출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돈을 종잣돈 삼아 그 돈을 자금 회전이 아쉬운 기업인들에게 빌려주면서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결코 약속한 기일 내에는 유통시키지 않는다는 약속하에 대출액의 2~9배에 이르는 거액의 어음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 자금난에 시달리던 공영토건의 경우 초기 160억을 사채시장에서 이철희가 운영하던 대화산업에서 빌렸지만 차후 갚아아할 어음이 1279 ~1300억원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 지하경제(사채시장)에서 장씨가 큰손이라고 일단 알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또 유리한 조건을 제시한게 컸는데 100억 ~ 200억 차입한도를 두고 이걸 2년 또는 3년 분할상환에 연 금리 20~22% 의 이율로 갚는 유리한 조건을 제시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일신제강, 라이프, 삼익주택, 태양금속, 해태제광등에 같은 방법으로 범행을 반복합니다.
초기 장영자가 빌려준 사채금액은 576억을 빌려주고 2,223억에 달하는 어음을 받아 사채시장에서 자금으로 조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자금을 쪼개서 다른 기업에 돈을 빌려주고 다시 갚겠다고 어음을 받은것이 총 6404억에 달한 것입니다.
당시 지금처럼 금융실명제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차명거래가 일반적이었던 금융시장의 맹점을 활용했던 돌려막기 수법인 것으로 보입니다.
사건 이후
공영토건 ( 당시 건설회사 도급 순위 8위) , 일신제강 (당시 철강업계 2인자) 이 2곳이 지금 기준으로 보면 대기업으로 할 수 있는 회사들이 부도처리로 무너지게 됩니다.
이 두 회사에서 성실히 일하던 근로자들이 갑자기 모두 일자리를 잃게 되고 실직자가 됩니다.
당시 이 두회사의 소액주주 9400명의 주식은 모두 종이조각이 되어버리고 어음피해자들이 속출했다고 합니다.
위 사진의 서경단 할머니는 평생 고생을 해서 모은 9백만원으로 공영토건의 어음을 샀다가 모두 잃게 됩니다.
검찰 수사로 이철희-장영자 부부와 은행장 2명, 기업인 6명, 사채업자 3명 등 29명이 구속이 됩니다.
또 어음 등 금융거래에 대한 불신이 확산되면서 시중 자금 흐름이 마비돼 경제활동이 크게 위축됩니다. 한국은행이 긴급자금 1000억원을 방출했지만 응급조치에 그쳤다고 합니다.
사건의 여파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집니다.
글이 길어져서 2편에 계속됩니다.
출처 : KBS
한국경제를 누가 망치고 있나: 한국개발경제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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