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조선시대 시절부터 전해내려온 이야기라고 합니다.
충청북도 북서부에 있는 음성군쪽에 음성읍 신천리 남천동입에서 갈라지고 있는 삼거리를 지나 금왕읍 무극리로 행하는 차도를 따라 약 1km 지점의 주막거리 근처로 가면 완만한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 '흔행이 고개'라고 합니다.
이 고개는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직접 넘지 말라고 명할 만큼 출입이 금기시 된곳이었다고 할 정도로 이상하고 무서운 소문이 많이 나돌던 곳이라고 합니다. 이 자리에는 한때 성황당이 위치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흔행이 고개는 조선왕조의 14대 왕이었던 선조때 그 유래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최초에는 특별한 명칭은 없었고 단순히 전염병으로 사망한 사람의 시체를 버리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붙은 명칭이 처음에는 흉행이 고개라는 이름이였는데 이 이름이 변해서 흔행이 고개라는 이름으로 전해졌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당시에은 이러한 행위를 "더금뫼"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고 합니다.
더금뫼란?
정확히는 악성질환(장티푸스,천연두,홍역)으로 사망한 시체를 두는 일종의 가장법이라고 합니다.
그러던 중 세월이 흘러 더금뫼라는 풍습은 서서히 사라졌다고 합니다.
더금뫼라는 풍습은 서서히 사라졌지만 흉흉한 이미지가 남은 탓인지 조선 18대왕 현종때는 음성 현청에서 죄수를 효수하는데 이 곳 고개에서 참수를 했고 죄를 지어 장도 지내지 못하는 죄인들의 시체를 가매장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다 조선왕조 제 20대왕 경종때에 이르러 한 무리의 산적떼들이 이 흥행이 고개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이 고개를 넘는 사람들의 돈을 뺏고 살해하는등의 행위를 일삼았다고 합니다. 백성들의 피해가 계속되자 관아에서 군졸들을 보내 토벌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산적들은 그 때마다 군졸들을 피해 도망다니며 토벌에서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지속적인 토벌에서 몇주를 쫓고 쫓기는걸 반복 하다가 군졸들은 한 토굴에 숨어 있던 산적들을 발견 했는데
산적들은 이미 미치거나 죽은 상태였다고 합니다.
산적떼들이 잡힌 이후로도 밤에 고개를 넘는 사람들 앞에 이제는 머리를 산발한 귀신이 출물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귀신을 보고 혼절해서 죽었다고 하는 얘기가 떠돌기 시작하고 이 고개의 흉흉한 소문은 점점 조선의 다른 지방으로 알려졌고 결국 당시 조정에서도 이 얘기에 대해 들었다고 합니다.
조선의 22대 왕 정조시절에도 이 고개를 넘다가 뭔가에 홀려서 실성하거나 다치고 죽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정조가
직접 그곳으로 출입을 금하는 왕명을 내린적이 있다고 할 정도 였습니다.
"부정한 고개이니 넘는것을 금하라."
이 흔행이 고개에는 대충 묻힌체 썩어가는 시체의 흉한 모습과 참을 수 없는 냄새로 코를 둘 수가 없었으며 비가 오는 날에는 사람들의 끔찍한 비명 소리가 들리기도 해서 그 주변 마을에 사는 백성들은 절대 가까이 가지 않으려 했다고 합니다.
이곳은 이후에도 출입이 금기시 됬고 일제강점기 시절 이곳에 별장을 지은 한 일본 상인 가족이 있었는데 별방에서 며칠 머물던 도중 한꺼번에 떼 죽음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독립이 되자 이 고개에 치성을 지내고 큰 성황당을 세워 이 고개에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을 위로 했다고 합니다.
현재는 전설이 되었지만 그 근처의 사람들은 지금도 이 고개를 넘는걸 기피 한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출처 : 음성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