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들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

미랄라군1 작성일 20.06.20 17:5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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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조선의 제 11대 왕이었던 중종시절 이야기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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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대 중반 무렵 중종 시절 두 선비가 다툰 일 하나가 용재총화란 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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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을 드나들며 공부하던 김윤량(金允良)과 김복창(金福昌)이란 서생 둘이 싸운 일이었다고 합니다.


김윤량이 볼품 없이 먹을 것만 주섬주섬 챙기는 사람이라고 비웃은 김복창이 김윤량을 심하게 조롱하기 위해 찬(贊)이라는 형식으로 글을 지어서 김윤량을 놀린 것이 일의 시작이었다고 합니다.


김복창이 자신을 비웃는 것을 본 김윤량은 비슷한 방식으로 싸우기 시작했고, 마침내 김윤량은 자신이 아는 점술에 대한 지식을 동원해서, 


"김복창은 일찍 죽을 것이다"라고 악담을 하게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김복창은 판단력을 잃고 격노하여, 불붙은 숯덩이를 찍어 들고 김윤량의 입 속에 짓이겨 넣어 버렸다고 합니다.


타오르는 뜨거운 숯덩이가 입안에 들어온 김윤량은 괴로워 날뛰다가 사망했다고 합니다.


이 외에는 좀 더 명망있고 권력자였던 두 선비의 다툼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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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16대 임금이었던 인조시절 이야기입니다. 해당 인물들은 심기원과 김자점이라는 인물들입니다.


심기원과 김자점이라는 인물들은 1623년 인조반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반정 직후 공을 인정 받아 모두 주요 요직에 오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건 발생 1년전인 1643년경 심기원은 좌의정이라는 직책에 오르게 되었고 김자점은 우의정 및 어영청도제조에 오르고, 진하 겸 사은사(사신)로 중국에 다녀올 정도의 직책에 올라 있었습니다.


그러다 1644년 심기원(沈器遠)은 자신의 정적이었던 김자점(金自點)과 서로 정치판에서 세력 다툼을 치열하게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때 김자점은 심기원의 실책을 놓치지 않았고 마침내 심기원은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형벌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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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 때 심기원의 모반 여부는 확실치 않고 인조의 삼촌이었던 흥안군을 국문없이 멋대로 죽인적이 있어 인조에게 크게 밉보였다고 하는데 이 점이 오히려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정적이었던 김자점은 이걸 놓치지 않고 정적인 심기원을 확실히 제거하려 합니다.


심기원은 형벌을 집행하는 관리들에게 붙들려서 나무로 만든 형틀 위에 묶이게 되었습니다.

심기원은 이때까지만 해도 곤장으로 두들겨 맞은 뒤에 귀양을 가거나, 아니면 참수형이나 교수형을 당할 것을 생각하며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관리들은 형틀 위에 심기원을 단단히 묶어 놓더니 한쪽 다리를 커다란 칼로 내려치려고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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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기원은 깜짝 놀라서,


"도대체 이게 무슨 형벌이냐?"고 물었고,


그러자 형벌을 집행하려는 사람은


"김자점 대감께서 분부한 형벌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곧 심기원은 다리 한 쪽이 잘려나갔고, 차례대로 나머지 다리와 두 팔도 잘려 나갔다. 심기원은 사지가 모두 잘려 나간 상태에서 피를 뿌리면서 나뒹굴게 되었습니다.


극심한 고통을 느끼면서 몸뚱이만 남아 신음하도록 한 뒤에, 정신을 잃을 때 즈음 하여 목을 잘라 죽이는 것이 그 형벌의 끝이었습니다.


심기원은 형벌을 받으면서, 형을 집행하는 칼을 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를 대신해서 김자점에게 전해 주시오. 당신도 나와 같이 될 거라고."


심기원이 잔혹한 형벌의 희생양으로 이렇게 죽은지 5년후인 1649년 김자점은 인조사망 후 왕위에 오른 효종시절 권력을 잃고 실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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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사망 후 6일 만에 대신들의 격렬한 탄핵과 더불어

효종은 "김자점은 아바마마가 승하하실 때 눈물을 흘리지 않고 멀뚱히 있었다. 충성심이 부족할 따름이다."라는 논리로 홍천으로 귀양형에 처해지고 권력을 모두 잃게 됩니다.


효종은 반청성형을 보이고 있었는데 청나라 친화적인 성향으로 권력을 잡고있던 김자점이 눈에 가시였을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 효종이 북벌을 모의하던것을 청나라측에 고해 조선쪽으로 군대가 배치되는등 위기가 처해졌지만 간신히 조선은 이 위기를 넘기고 김자점은 홍천에서 광양으로 다시 귀양보내집니다.


결국 1651년 김자점 역시 아들과 손자와 함께 반란을 시도했고 역모를 일으키려 했다는 죄목으로 심기원과 같이 사지가 찣기는 능지처참형을 당하고 죽게됩니다.


1644년 사망 당시 심기원이 했던 말이 7년 후 1651년 정확히 이루어지게 됩니다.


출처 : 용재총화,청성잡기

https://blog.naver.com/ghshffnfffn1/222006846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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